뮤지컬 〈홍련〉 포스터
뮤지컬 〈홍련〉은 설화 ‘장화홍련전’을 바탕으로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던 홍련의 억울한 죽음과 치유를 다루며,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고통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 속의 가부장제는 단순하게 가부장제의 상징인 아버지의 억압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고전 설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홍련과 장화라는 인물을 통해 가부장제의 구조적 폭력과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개인의 상처받은 내면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구조가 최근에 개봉한 영화 〈가능한 사랑〉의 결정적 한 장면과 겹쳐 보인다는 사실이다. 두 작품 모두 억눌린 개인의 목소리, 욕망과 책임, 그리고 사랑과 폭력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개인이 어떻게 고통을 내면화하고, 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 기대했던 노동자상, 기대했던 사랑, 기대했던 굴복, 기대했던 저항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고통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뮤지컬 〈홍련〉 속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까지는 원작 이야기 속의 무심한 애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새로 맞은 아내의 거짓과 음모를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무능이 아니라 편안함 때문이다. 새 아내가 두 딸에게 휘두르는 권력의 근본은 사실 아버지의 권력을 대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아버지가 그 권력을 거두면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같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행동반경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내를 얻은 이유는 하나다. 자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 교육과 집안을 돌보는 것.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그는 눈을 돌리기를 선택하고 결코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의 파멸이 눈 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그가 보호해야 하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안락함과 자신의 지위다. 때문에 그는 권력의 중심임을 무심함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이창동의 영화 속 조인성이 연기한 ‘상우’라는 인물과도 닿아있다. 상우는 아내의 일을 지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큐 감독인 아내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부유한 부모에게 저항하기 위해 나름 가난한(?) 예지와 결혼했고 아내의 노동계급에 대한 관심이 표피에 머물 뿐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하게 직시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에게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욕망이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금액의 크기, 숫자 0의 갯수를 믿는 인물이다. 때문에 적은 숫자의 사람들의 일은 ‘작은 일’이고, 자신의 일은 ‘빅픽처’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에게 타인의 고통은 그림이나 사진 속 이야기처럼 자신과 무관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욕망 뿐. 그는 등장인물 가운데 가부장제이며 억압적인 자본가의 바운더리다.
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
새어머니는 작품 속에서 가장 직접적인 폭력의 주체다. 그녀는 장화와 홍련을 모함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밀어 넣는 인물이다. 그러나 뮤지컬은 새어머니를 단순히 악인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새어머니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억압과 침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녀의 욕망은 단순한 개인적 탐욕이 아니라, 권력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억압하도록 강요받는 현실을 상징한다. 새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 가해자로서, 억압의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소위 ‘여적여’라는 말에 부합하는 인물이지만 그 자신은 그게 자신과 아들의 행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이용가능한 권력을 비로소 손 안에 넣었기에. 영화에서도 뮤지컬에서도 주인공들을 절망으로 밀어넣는 것은 더 가지고 싶은 가진 자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다.
그 거대한 욕망 앞에서 일개 노동자인 호석과 그의 아내 미연의 삶은 그저 흰 종이에 쓰인 검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종이는 파쇄기에 넣어 갈아버리면 그만인 이름이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중심인물인 호석과 미연은 쌍용차 대량 해고 사태를 배경으로 실제 인터뷰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다. 호석은 시위하며 쫓기다 회사 지붕 위에서 폭력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몸의 상처도 더디게 나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영영 나을 기색이 없다. 그의 마음을 곪아 터지게 한 것은 그가 보호하려고 했던 동료가 정작 그가 얻어맞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모습이다. 동료들의 등, 야속하게 그를 두고 달려서 멀어지던, 그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가족이라고 여겼던 동료들의 등.
홍련은 이 이야기에서 그 멀어지는 등을 맡고 있다. 장화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나섰다가 대신 새어머니의 핍박의 대상이 된 것을 뻔히 알고도 그 새엄마가 무서워 언니의 고통을 귀 막고 눈 가리며 외면하려고 했던, 그 돌린 등을 맡았다. 홍련은 장화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죽음 이후의 기억을 왜곡한다. 장화를 위한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해냈다고 믿는다. 자신과 장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압박의 폭력에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폭력으로 응징했다고 믿는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피해자가 오히려 자기 책임을 내면화하는 구조적 폭력의 전형이다.
뮤지컬 〈홍련〉 스틸컷 (출처: 마틴엔터테인먼트)
홍련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상징하는 세상의 압력에 맞서지 못하고, 침묵과 자기 비난 속에 갇힌다. 그녀의 무력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잃고, 억압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가능한 사랑에서도 여성 인물들은 사랑과 욕망을 억압당하며, 그 억압을 자기 책임으로 내면화한다. 영화 속 여성들은 사회적 규범과 가부장제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고통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이는 홍련의 내면적 갈등과 정확히 겹친다. 고통을 내면화하다 못해 그게 폭력으로 분출되고 방향은 정확하게 중심을 타격한다. 아버지의 머리를 깨버리는 것으로. 뮤지컬 홍련 속에서 강령 등은 왜 가장 잔인했던 새엄마가 아니라 새엄마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이기도 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아버지를 죽였는지 묻는데, 사실 이 질문 자체에 답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주지 않았다면 새어머니의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홍련은 자신이 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인 아버지의 목을 정면으로 노렸고 그 복수를 이루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홍련의 폭력은 아버지를 향하지도 남동생을 향하지도 못한다.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만 향한 폭력으로 귀결된다. 홍련은 자살했다.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 회한으로 저승에서 거듭 외친다. 아버지를 죽였노라고. 허망하게도.
홍련의 언니 장화는 일찌감치 두려움에 굴복했던 홍련과 달리 끝까지 새어머니의 거짓과 폭력에 맞서고 동생이라도 지키려 했지만, 결국 희생된다. 장화의 저항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지키려 했던 이상주의적 태도를 상징한다. 현실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와 목소리를 지키려는 장화의 선택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 목소리는 그렇게 죽음으로 잊혀지지 않고 홍련에게 남아 기억과 치유의 힘으로까지 이어진다. 장화는 억눌린 목소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저항의 인물로, 홍련의 자기책임 의식을 깨뜨리는 계기를 제공한다.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도 저항은 중요한 주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통해 억압에 저항하려 하지만, 그 저항은 종종 실패하거나 비극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실패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억눌린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장화의 저항과 영화 속 인물들의 저항은 모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지키려 했던 투쟁을 상징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에 담고 싶어 한 예지는 해고노동자를 상징하는 호석에게서 투쟁의 아름다움과 지속성을 담고 싶어한다. 연대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담고자 한다. 하지만 다 한 번도 속내를 비치지 않았던 호석이 마침내 속마음을 카메라 앞에서 터트렸을 때 예지는 그 필름을 사용하지 못한다. 호석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동료들에 대한 원망을 화산처럼 터트리는데,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노동자의 뜨거운 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석이 보여준 반응은 예지가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지의 영화는 다큐라고 하지만 사실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그에 반해 호석과 미옥의 삶은 그 자체가 저항이 되어버린다.
뮤지컬 〈홍련〉과 영화 〈가능한 사랑〉은 서로 다른 매체와 서사를 사용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눌린 개인의 고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세상의 압력과 욕망을 상징하며, 홍련과 장화는 그 압력 속에서 억압을 내면화하거나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작품 모두 피해자가 자기 책임을 내면화하는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면서도, 치유와 연대를 통해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눌린 개인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결과다. 그러나 그 고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은 결국 연대라는 것, 그러나 사람은 나약한 존재라 연대는 폭력 앞에서 때로는 잔혹하게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라는 것.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뮤지컬 〈홍련〉에서는 이 모든 일이 저승의 재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리데기 공주가 판사로 등장하지만 이 법정의 목표는 잘잘못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게 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이 법정의 마지막은 씻김이다. 왜곡된 폭력의 기억을 씻고, 사랑만을 남기고 회한을 씻고 떠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정이다. 고통을 준 기억을 불러 법정에 세우고 마침내 어떠한 형태의, 끔찍한 사랑을 남긴다. 홍련의 가능한 사랑을.
뮤지컬 홍련의 재연은 끝났지만 영화 “가능한 사랑”은 넷플릭스에서 보기가 가능하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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