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立冬)을 앞두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아침저녁 공기는 제법 차가워졌고, 나무들은 한 해 동안 품고 있던 잎을 하나둘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의 이름을 듣고 있으면 사람의 움직임도 조금씩 움츠러들 것 같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특히 전쟁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겨울은 기다려온 시간이었습니다.
강이 얼면 배 없이도 대군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진과 만주의 기병에게 겨울의 압록강과 두만강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 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조선군에게도 겨울은 때로 공격의 계절이었습니다. 1479년 성종 때에는 평안도 도원수 어유소가 강이 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진 원정에서 회군했고, 이후 얼음이 얼 때를 기다려 윤필상을 보내 여진의 본거지를 공격했습니다.
전쟁은 병력과 무기만으로 벌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를 읽는다는 것’ 역시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때’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바람과 비, 강물과 추위는 때론 아군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적군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웹진 〈담談〉 11월호의 주제는 ‘전쟁의 타이밍’입니다.
전쟁에서 ‘때’를 안다는 것은 단지 공격 날짜를 잘 잡는다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언제 나아가야 하는지,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칼과 화살이 오가지 않을 뿐 시험을 치르고, 경쟁하고, 누군가의 편에 서고, 때로는 자신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이번 호의 글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묘하게 같은 질문으로 모입니다. 당신은 어느 순간 움직일 것인가.
김병륜 박사의 「전쟁의 때」는 그 질문을 가장 문자 그대로 파고듭니다. 병자호란의 겨울부터 왜구의 침입 시기, 임진왜란과 장마철의 위화도까지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전쟁의 ‘배경’ 정도로 생각했던 계절이 사실은 전쟁의 중요한 당사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같은 추위가 누구에게는 고통이면서 누구에게는 무기가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남한산성의 군사들을 얼어붙게 한 바로 그 추위가, 무너진 성벽에 쌓은 흙가마니에 뿌린 물을 얼려 청군의 포격을 버티는 단단한 벽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자연에는 본래 적도 아군도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읽고 준비하느냐였습니다. 전쟁의 타이밍이란 결국 ‘좋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때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능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 지승현의 「인생戰! 즐거운 도전!」은 전쟁터에서 시작해 한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옵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장군을 연기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을 물고 늘어진 양규 장군의 싸움을 돌아본 뒤, 자신의 20년 연기 생활 역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캐스팅되지 못하고, 비교당하고, 거절당했던 시간 속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남과의 싸움보다 자신의 색깔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묵묵히 버텨낼 뿐이었습니다. 마치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속 양규 장군처럼 말입니다. 양규 장군의 마지막 화살은 결국 목표에 닿지 못했지만, 그의 싸움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버팀’이 도망치던 고려 백성들의 살아갈 길을 열어주었으니까요.
당장 눈앞에서 명중하지 않았다고 모든 노력이 실패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싸움에는 이길 때보다 끝까지 버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 그 시간의 촬영장을 다시 기억해보니 〈고려 거란 전쟁〉 의 연출가였던 저 역시 배우 지승현의 ‘버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은경 작가의 웹툰 「독 선생전」 30화 「과거, 그날(上)」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과거 시험장으로 옮겨갑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싸움부터 부정행위 단속, 미리 새어나간 시험 문제까지, 붓을 든 선비들의 시험장은 웬만한 전쟁터 못지않게 소란스럽습니다. 누군가에게 과거시험은 단 하루의 시험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인생의 승부였을 것입니다. 이 순간의 때를 놓치면 인생이라는 전쟁의 판도는 어찌 될지 모릅니다.
이문영 작가의 「백이와 목금」에서는 「망허산에 전쟁나다」라는 제목 그대로 정말 전쟁이 납니다. 사또가 떠난 틈을 노린 여우 귀신이 도깨비와 영괴들을 이끌고 망허정을 치고 들어옵니다. 시작부터 ‘때’를 노린 공격입니다. 하지만 목금 역시 이미 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지금이야!”라는 외침과 함께 싸움의 흐름은 단숨에 뒤집힙니다.
영괴들의 전쟁에서도 단순히 무리가 많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준비했고, 결정적인 순간을 누가 알아보았느냐가 승부를 가릅니다. 동화 같은 영괴들의 전쟁인데도 묘하게 〈손자병법〉을 읽는 기분이 드는 이유입니다.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은 연대」가 다루는 내용은 우리를 잠시 전장에서 빠져나오게 합니다. 뮤지컬 〈홍련〉과 영화 〈가능한 사랑〉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며, 권력과 폭력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침묵하고 등을 돌리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왜 다시 연대를 말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영웅적인 저항보다 ‘등’입니다. 내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정작 내가 맞을 때 달아나는 뒷모습말입니다.
사람은 두렵고 나약하기에 연대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대는 아름다운 구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이 말하는 전쟁의 타이밍은 결국 싸워야 할 때보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때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한편 「제12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최종 피칭 현장에는 또 다른 의미의 ‘결전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116개 팀에서 시작해 마지막 무대에 오른 여덟 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0분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팀을 꾸리고 기획서를 쓰고, 교육과 멘토링을 거쳐 아이디어를 수없이 고쳐 온 수개월의 시간이 그 짧은 무대에 쌓여 있었습니다.
과거의 기록은 그대로 있었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보드게임으로, 누군가는 웹툰과 뮤지컬, 드라마와 참여형 공연으로 다시 보았습니다. ‘스토리테마파크’에 수록된 과거의 기록이 새로운 세대의 상상력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 오래된 이야기는 다시 현재의 시간이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때’는 그 순간을 기다려온 긴 준비가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을 잘 보내준 참가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응원의 박수를 드립니다.
이번 호의 글들을 모두 읽고 나니 ‘전쟁의 타이밍’이라는 말이 처음보다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있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화살을 쏘아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의 곁에서 도망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것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고, 때로는 나 자신과 맞서 새로운 길로 한 걸음 내디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어떤 때가 오고 있을까요. 나아가야 할 때인지, 잠시 기다려야 할 때인지, 끝까지 버텨야 할 때인지. 혹은 누군가의 곁에 서야 할 때인지.
좋은 타이밍이란 가장 유리한 순간을 차지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 놓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때를 읽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웹진 〈담談〉 11월호가 그 ‘때’를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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