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날이 쌀쌀해지고 나뭇잎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춥다, 추워.”
백이는 아랫목 이불 속에 폭 싸여있었다.
“이제 입동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춥다고 그러면 어떡해?”
사과를 깎고 있던 목금이 웃으며 말했다.
“추운 건 추운 거라고. 난 겨울이 정말 싫어.”
“여름에 덥다고 싫다고 하지 않았어?”
“지나간 과거를 따지지 말라고.”
“불돌이라도 부를까? 불돌이가 있으면 금방 따뜻해지잖아.”
불돌이는 망허산에서 주워 온 양수지조(陽燧之鳥)라는 신물이다.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뜨끈뜨끈했다.
“좋은 생각이야. 네가 데려오는 거지?”
“아, 나도 추운데 나가고 싶진 않아. 초록이가 데려올 거야.”
목금이 초록색 팔찌를 톡톡 두드렸다. 옥같이 보이던 팔찌는 스르르 움직이더니 작은 초록색 뱀이 되었다.
“초록아, 불돌이 좀 데려다 줘.”
초록이는 군말없이 방 밖으로 사라졌다. 불돌이가 오면 따뜻해지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찬바람이 마구 몰아닥쳤다.
“앗, 추워! 무슨 일이야?”
검은 그림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목금이 검은 그림자에게 말했다.
“갑돌이 아저씨?”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돌이는 홍경래의 난 때 죽은 무사귀신이다.
“무슨 일이에요? 추우니까 들어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난 그 방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 급하니 빨리 같이 가자!”
“네? 어디를요?”
“빨리, 한시가 급하다.”
(AI 생성 이미지)
갑돌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추워서 싫은데…….”
백이가 이불을 치우며 일어났다. 목금은 백이가 정말 갑돌이 말에 일어날 줄 몰랐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괜찮아?”
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번에 갑돌이 아저씨가 왔을 때, 도깨비들이 망허정에 쳐들어왔었잖아. 아마 이번에도 여우 누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겠지.”
“아아, 도깨비들 싫은데.”
목금이 손가락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도깨비들이 쳐들어왔을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야 했었다.
“빨리 쫓아가자.”
갑돌이는 이미 몸을 돌려 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백이와 목금이 그 뒤를 쫓자 낑낑거리며 부엌 부뚜막에서 빠져나온 불돌이와 초록이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백이가 얼른 불돌이를 안았다.
“아, 따뜻해서 살 것 같네.”
백이는 한동안 불돌이를 안고 가다가 목금에게 넘겨주었다. 덕분에 목금도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전쟁은 원래 겨울에 난다더니, 이번엔 진짜 전쟁이 난 건가.”
망허정 쪽에 불이라도 난 듯 벌건 화광이 비치고 있었다.
“이제 물러나라. 망허정은 이제 우리가 차지하겠으니.”
기세등등하게 외치고 있는 이는 배씨 자매의 언니였다. 덤불 아래 숨은 백이가 목금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배씨 자매 언니잖아. 왜 저러는 거지?”
목금이 언니를 빤히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여우 귀신이야. 여우 귀신이 배씨 언니 몸을 차지해버렸네.”
“여우 귀신이 이제 저렇게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야?”
목금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또 나리가 떠난 걸 안 거야. 사또 나리가 없으니까 이제 자기 세상이라고 생각한 거지.”
“치, 여우 귀신을 쫓아낸 건 너였잖아. 저게 뭘 모르는구만.”
“그렇긴 하지만…….”
사실 목금이 그때 용기를 낸 건 사또와 함께 있어서였다.
“언니! 정신 차려! 이러지 마!”
배씨 자매 동생이 언니에게 정신차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목금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소용없어. 여우 귀신이 그냥 물러날 리는 없지.”
여우 귀신이 히히 웃으며 동생을 불렀다.
“동생아, 너도 이리 와라. 언니를 도와줘야지. 언니 혼자 두면 외롭단다.”
그 말에 동생이 홀린 듯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목금이 뛰쳐나갔다.
“안 돼요!”
목금이 동생을 붙잡았다.
“놔, 놔! 언니가 부르잖아!”
“언니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잖아요!”
백이도 뛰쳐 나와 동생을 붙잡았다.
“흐흑! 어떡하지? 언니를 되찾아야 해!”
“되찾아야죠.”
“되찾겠다고?”
여우 귀신이 까르르 웃었다. 그 뒤로 도깨비불들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지난번에는 내가 오지 않아서 도깨비들이 피를 보고 당황한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어림없어. 피를 내기만 해봐. 내가 다 먹어치워주지.”
여우 귀신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때 노루 요괴 장선생과 그 부하 염소 요괴가 달려왔다.
“이것들이 그때 뜨거운 맛을 보고도 또 왔…….”
장선생이 말을 하다 눈을 크게 떴다.
“너, 넌 여우 귀신이구나.”
“그래, 나다. 장선생, 그동안 잘 있었나?”
장선생은 약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하기는 저 여우 귀신은 호랑이도 때려 잡을 만큼 요력이 높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또 온 것이냐!”
장선생의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도망치진 않았다.
“흥!”
여우 귀신은 콧방귀를 뀌더니 목금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계집애. 지난 번에는 물을 뿜어서 나를 괴롭혔지. 하지만 이번엔 소용없어. 그래서 내가 오늘 온 거니까.”
“무슨 소리야? 날씨가 좀 쌀쌀하다고 물이 얼기라도 할까 봐?”
목금도 지지않고 맞대거리를 했다. 사실 이번에는 조개와 소라고둥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물을 뿜을래야 뿜을 수 없었다.
“흐흐. 내가 있으니 아무 소용이 없지.”
여우 귀신 뒤쪽의 덤불에서 덩치가 큰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동장군!”
“비비비, 나도 있다.”
“영노!”
동장군과 영노가 다 여우귀신 편이었다. 둘 다 요력이 막강하니 장선생과 염소 요괴는 한입거리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으, 벌써 추워.”
백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가씨! 걱정마세비!”
그때 허공에서 외침이 들리더니 푱 소리와 함께 달두꺼비가 나타났다.
“우리 아이들의 원수 영노! 네가 복수를 하고 말겠비!”
달두꺼비가 벌컥 화를 내며 다짜고짜 영노에게 독을 뿜었다. 영노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는데 동장군이 날아오는 독을 얼려버렸다.
“까불지 마라.”
동장군이 앞에 서더니 호령을 했다.
“역병신, 나와라!”
“대별상이라고! 역병신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대별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들이 자꾸 늘어나니 목금도 걱정이 많이 됐다.
“앗! 이게 뭐비?”
달두꺼비에게 검은 그림자가 덮쳤다. 순식간에 달두꺼비가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슨대야!”
백이가 외쳤다.
“불돌아! 불을 밝혀!”
불돌이가 온몸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그슨대가 쳇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아가씨, 이번에도 절 구해주셨비! 감사합비!”
“흥, 양수지조냐? 그 정도로 이길 것 같으냐?”
여우 귀신이 비웃었다.
“나도 있굴!”
“금개구리, 왔구나!”
“당연하굴. 영웅 금개구리가 납시었굴!”
영노가 입을 크게 벌리며 금개구리를 노려보자 금개구리는 이번에도 얼어붙고 말았다.
“금개구리, 정신 차려!”
백이가 금개구리 몸을 흔들자 금개구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걱정마라굴! 다들 오고 있다굴. 비렴이와 용마가 오고 있고, 흑구랑 황구도 도와주러 오고 있다굴! 강철이도 늦더라도 온다고 했다굴!”
강철이는 용이 되어서 강철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만 금개구리는 그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강철이…… 아니 미르님도 온다고?”
“영노가 용알을 먹으려고 해서 강철이는 화났굴!”
목금은 용이 우리 편에 선다면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목금이 금개구리에게 물었다.
“혹시 물귀신은 안 와?”
“저기 와 있다굴.”
목금이 백이에게 귓속말을 하자 백이는 물귀신을 만나러 갔다.
“자, 뭐 두고 볼 거 있나? 우리가 훨씬 많을 걸. 밀어버리자!”
여우 귀신이 신호를 하자 도깨비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는 동장군이 서 있었다.
“멈춰라!”
하늘에서 소리가 나더니 용이 나타났다. 동장군이 용을 막아섰다.
“강철이가 왔굴!”
금개구리가 팔짝 뛰며 외쳤다. 목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포뢰가 온 거야.”
종을 울리고 승천했던 포뢰가 돌아왔다. 하지만 동장군이 막아서는 바람에 도깨비들은 망허정을 향해 계속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영노가 앞장섰다.
“너, 잘 만났비!”
달두꺼비가 영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힘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멍멍멍!”
목금이 박수를 쳤다. 황구와 흑구가 도와주러 온 것이다. 둘만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들을 데리고 함께 왔다. 개들이 도깨비를 막아섰다. 장선생과 염소 요괴는 대별상과 싸우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대별상의 역병이 먹히질 않았다. 목금이 손바닥을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백이는 물귀신한테 말을 잘 전했나?”
“잘 전했지! 저길 봐.”
백이가 달려와 목금에게 말했다. 물귀신이 아리따운 아가씨로 둔갑해서 동장군에게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동장군은 포뢰를 놓아주고는 물귀신을 따라가 버렸다. 여우 귀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뒤에 대고 고함을 쳤다.
“동장군! 어딜 가는 거야!”
동장군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보면 몰라? 용왕네 공주님하고 같이 가잖아.”
동장군은 목금의 꾀에 그대로 넘어간 것이다.
도깨비들은 황구와 흑구가 몰고 온 개들과 다투느라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됐어! 달마루야, 지금이야!”
(AI 생성 이미지)
목금이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도깨비불에 둘러싸여있던 여우 귀신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망허산의 도깨비 달마루는 일찌감치 이 도깨비 무리에 섞여 있었다. 여우 귀신이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목금이 부탁을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달마루는 퉁방울 눈을 가진 도깨비로 화해서 바로 여우 귀신을 밭다리걸기로 자빠뜨리고는 순식간에 꽁꽁 묶어버렸다.
목금이 달려가 주문을 외웠다.
“육도(六道)가 다른데 귀신과 사람이 어찌 한곳에 있으랴. 귀신은 사람을 내놓고 떠날지어라. 임병투자(臨兵鬪者) 개진열전행(皆陣列前行)!”
배씨 자매 언니의 미간이 밝게 빛나더니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지금이야!”
목금의 말에 초록이가 그 빛줄기를 꿀꺽 삼켰다.
“이, 이게 뭐야?”
초록이의 배가 밝게 빛났다. 목금이 웃으며 말했다.
“넌 이제 잡혔어. 초록이는 삼시충이란다. 섣달 그믐날이 오면 옥황상제께 너를 데려갈 거야. 그때까지 얌전히 있으려무나.”
“안 돼! 놓아줘! 다신 안 올게!”
“웃기는 소리.”
목금이 팔을 내밀자 초록이는 손목을 휘감더니 초록색 팔찌로 변했다. 여우 귀신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장을 잃은 도깨비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빗자루, 도끼 자루, 호미 등등 본 모습으로 털썩털썩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별상과 그슨대, 영노도 이제는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달아났다.
“와, 이겼다!”
백이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배씨 자매도 둘이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망허산은 안전해진 거겠지?”
백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금에게 물었다.
“당연히 그렇지.”
목금이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망허정에서는 승리의 잔치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괜찮은 걸까? 요괴들과 어울리는 나는? 목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는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신분이라고 했던 구미호의 말이 떠올라 목금은 기분이 착 가라앉고 말았다. 한 사또 나리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무슨 생각해? 너 또 한 사또 나리 생각했지?”
백이가 목금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얘는…….”
“아쭈,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지지?”
백이의 놀림에 목금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래도 언제나 친구가 되어주는 백이가 있어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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