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이 오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 간다. 부모님 울타리 안에서 살던 때, 우리 집은 애옥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설이나 추석 때면 그 가난한 우리 집도 떡과 전, 고기산적, 과일 등 풍요로운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추석 명절이면 조상들에게 올릴 차례 상을 성의껏 마련했다.
추석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장에서 생선을 사다 깨끗이 손질해 말리는 것을 시작으로, 가장 좋고 가장 튼실하고 가장 신선한 과일이니 채소 등을 고르고 골라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집 손질하고, 문을 떼어 창호지를 다시 바르고, 제기들 꺼내 씻어 말리고, 오빠들과 함께 성묘도 다녀왔다.
추석 전날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고 밤을 치기도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추석맞이의 즐거운 덤이었다. 추석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갔다. 식구가 제법 많은 우리 가족은 한 줄로 길게 줄을 늘여 긴 논밭길을 지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가산에 있는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이런 기억들이 따듯함으로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추석이 가져다준 풍요로움 때문이었다. 그때만은 우리 가족도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행복한 한 때를 보냈던 것 같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조선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 나오는 이 말은 수확의 계절 가을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성하여 일 년 365일이 이날처럼 풍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김매순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아무리 가난한 벽촌의 집안에서도 예에 따라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도 만들며, 또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차려놓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다. 추석 때만 되면,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찾아 돌아온다. 이런 광경은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귀성객들의 수는 엄청나다. 고향을 찾은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하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고, 친지들을 찾아 선물도 나누고,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고, 마을 사람들과 놀이를 즐긴다. 먹을 것 풍성하고 좋은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내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1969년 9월 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서울역. 8만 1천여 명의 귀성객이 서울역 광장에 운집해 있다.
추석 명절을 지내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농경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원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의 문헌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8월 15일에 왕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에게 활쏘기를 시켜 상을 준다는 기록들이 있고, 우리나라 문헌 중 추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에 왕이 6부를 정하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두 패로 가른 뒤, 편을 짜서 7월 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했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살펴 지는 편은 술과 밥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이에 온갖 유희가 일어나니 이것을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고 하였고, 또 이때 진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날 사람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적어도 추석 명절은 신라시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하나의 축제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추석은 우리 민족의 명절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추석 명절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물론 작은 국가였을 때처럼 왕이 주관하여 잔치를 베풀고 놀이를 즐기는 문화는 사라졌고, 또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풍성한 수확에 대한 신과 조상에 대한 감사와 풍요로운 음식의 대한 추억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추석맞이는 어땠을까.
이웃집 소 잡는다는 소식 듣고 제육을 얻으러 가다
‘선비’들이라고 추석의 기대감과 감흥이 다를 리 있을까. 기록에 나타난 선비들의 추석맞이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추석날 달맞이로 들뜬 선비, 말을 전세 내어 고향집으로 달려가는 선비, 성묘와 제수 준비로 바쁜 선비 등.
조선 광해군 때 김택룡의 <조성당일기>에는 8월 12일부터 추석 당일까지 추석맞이 분주한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김택룡은 조카를 시켜 벌초를 시키고, 그때까지 제육(祭肉)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마침 이웃집에서 소를 잡는 다는 소리를 듣고 어른 조카를 보내 얻어오기도 하고, 누님 집에 두부를 만드는 콩 포태(泡太)를 보내기도 한다. 그는 증조부모, 외조부모, 아내, 요절한 아들의 묘까지 두루 다니며 벌초를 하고 제사를 지낸다. 추석 전날에는 비가 그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묘소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포기하고 큰아들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술과 과일을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경은 정겹기까지 하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에는 얼음을 관리 감독하는 일이 무척 큰일이었다. 빙고(氷庫)는 얼음을 저장하고 지급하는 중요한 관청이었다. 만일 빙고에서 얼음을 잘못 보관하여 추석 이전에 얼음을 다 쓰게 되면 이를 맡아보는 관리가 처벌을 받았다. 또한 겨울에는 사한제(司寒祭)를 열어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때 공주목사 권문해의 <초간일기>에는 빙고에서 추석을 앞두고 아침저녁으로 얼음을 관리하러 빙고에 들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빙고에서 언 얼음은 제향과 공불에 우선적으로 쓰이고, 5월 보름~7월 보름 전에 임금과 백관에게 돌아갔으며, 활인서의 환자와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에게도 지급되었다고 한다.
석빙고 (石氷庫) :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가 있어 말기인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으며,빙고라는 관청을 두어 5품 이하의 관원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추석은 일 년 중 가장 달빛이 밝은 때다. 그 달빛 아래에서 좋아하는 친구와 술 한 잔 하길 기다리며 설레어 하는 선비의 모습은 자못 흥미롭다.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인 김령(1577~1641)이 그의 나이 27세부터인 1603년부터 그가 사망한 해인 1641년까지 쓴 일기인 <계암일록>에는 추석에 고나한 에피소드가 여러 차례 나온다. 그 기록을 보면 김령은 꽤나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년 추석이면 지인들과 보름달이 뜰 즈음이면 달빛 아래 뱃놀이를 하거나 술을 마셨다. 1620년의 추석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올해는 유례없이 달빛이 밝다. 지인과 버드나무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 구름이 모두 사라지고 달빛이 휘황하게 밝아 한 점의 찌꺼기도 없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이렇게 밝은 달은 고작 두세 번밖에 없었다. 이 달을 보며 이도(以道)와 앞강에 배를 띄우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해질 무렵에 술을 가지고 강으로 가 친구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밤이 깊도록 달을 노래했다.”
이듬해 추석에는 안개가 짙게 끼고 날이 흐렸다. 김령은 어두운 구름이 종일 끼고 걷히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는 친지들이 술을 가지고 김령을 방문했고, 김령도 함께 술을 내어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었는데, 보름달을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마치 거울을 닦아놓은 듯 맑아졌고, 달빛이 교교하게 흐르자 그들은 매우 즐거운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술자리를 파한 뒤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너덧 잔을 더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 잠자리에 누우니 닭이 세 번째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김령은 추석 달빛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술을 마시는 등 추석의 흥취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사는 사람들은 추석 무렵이면 너나없이 두둑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향의 부모님과 친지를 찾아간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도 그때만은 넉넉한 부자가 된다. 과거에는 서울역 앞에서 장사진을 친 귀성객들의 모습이 종종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곤 했다. 지금은 각자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다른 교통수단들도 많이 있어 그런 진풍경은 흑백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지만, 추석 귀성열차 예매는 일 년 전에 마감이 되는 등 여전히 추석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조선시대, 객지에 나와 있던 선비들은 귀향 준비를 어떻게 했을까? 철종 때 김수근의 <을묘청의변>에는 안동에 서원을 세우기 위해 고향을 떠나와 있던 그가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추석 사흘을 앞두고 관사로 갔더니 서로 고향으로 떠나려는 사람들로 들썩였다. 그는 아직 고향으로 떠나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말을 전세 냈는데, 그것이 잘못되는 바람에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말만 구하면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한다.
청량산 여행기인 <청량산유록>을 쓴 박종의 이야기는 가슴 한 편을 짠하게 하기도 한다. 유람 중에 주막에서 바가지를 쓰고 빈털터리 신세가 된 그는 성묘를 해야 하지만 노자가 떨어져 돌아갈 수 없고, 명절날 먹을 것 하나 마련할 수 없어 그냥 웃고 만다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 박종의 이야기는 명절 때일수록 더욱 외로워지고 고단해지는 우리 이웃을 떠올리게 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추석도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풍속이 변하고 인심이 변했지만 추석을 맞는 설레는 심정이나 성묘하고 음식을 하는 등 분주한 모습, 친지와 이웃과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 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1980년 9월 24일 경북 김천군. 4대가 함께 모여 성묘를 하고 있다.
1621년 8월 15일. 밤이 깊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닦아놓은 것 같았는데 거울처럼 달빛이 교교하였다. 인간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것 또한 어찌 이와 같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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