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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2) ]

잘못한 사람이 내미는 뉘우침의 손,
제마수

이상호

1621년 11월 30일, 예안의 선비 김령金坽(溪巖, 1577~1641)은 설레는 마음으로 바삐 아침상을 물렸다. 추운 날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현사사玄沙寺에서 배원선과 밤을 새면서 술 한잔 할 요량이었다. 주위 사촌 형제들과 아들까지 대동하고 현사사에 도착을 했지만, 배원선은 갑자기 일 때문에 안동에 나가야 한다고 횡하니 가버렸다. 배원선이 급히 떠난 자리는 그의 둘째 동생이 대체하기는 했지만,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선방에서 기분 좋게 유숙하니, 12월 초하루 아침부터 벗들이 현사사에 찾아왔다. 아침 식사도 하기 전에 술 동이를 가져온 친구의 권유로 아침 술에 취해 버렸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두부와 밥으로 아침 식사는 마쳤지만 취기는 쉬 가시지 않았다.

예안으로 돌아 온 뒤에도 술 기운이 남아 있었던지, 몇몇 사람들이 어제 먼저 간 배원선에게 약속을 어긴 죄를 물어 ‘제마수齊馬首’로 처벌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배원선에게 보낸 편지는 술기운을 담아 장난으로 보낸 벌칙이었지만, 원래 제마수는 향약에서 자주 실시하곤 했던 벌칙 의례였다. 몇 년 뒤인 1626년 음력 윤6월 12일에는 경북 예천에 살았던 권별權鼈(竹所, 1589~1671)의 제마수 행사 기록이 있다. 같은 고을 사람인 신백순이 마을에 잘못을 범한 게 있어서, 그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제마수 행사를 개최했던 것이다.

‘제마수’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 하면 “말의 머리를 나란히 하다”라는 뜻이다. 이 행사는 원래 생원과 진사를 뽑는 사마시司馬試 결과를 발표하면, 합격자들이 말을 타고 시내를 행진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합격자 가운데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 합격자 전원에게 점심을 한 턱 내면, 그 사람은 그날 장원한 사람과 말 머리를 함께 한 채 행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한 턱 내기만 하면, 장원한 사람과 함께 제일 앞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행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이후 자치규약이나 향약 등에 오면서 ‘한 턱 내는 벌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그 벌칙 대상은 ‘한 턱 내는 것’으로 충분히 무마될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잘못에 한정했다. 잘못을 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임원들이나 지역민들에게 한 턱 냄으로써 그 잘못을 용서받는 것이다. 따라서 제마수의 예는 우선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에 대한 인정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잘못에 대한 인정은 사죄의 예를 생각하게 되면, 향약의 경우 유사에게 제마수의 예를 청하고, 유사가 그것을 받아들여 제마수의 예가 열리게 된다. 잘못한 사람은 우선 지역의 명망가와 나이가 70이 넘은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가 자기 잘못을 고하고, 제마수 행사에 참석을 청하곤 했다. 그리고 모든 회원들에게 참석을 부탁하는 글도 돌려야 했다. 1626년 권별이 참석한 제마수의 예는 이러한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비록 장난삼아 보내기는 했지만, 김령이 배원선에게 보낸 제마수는 ‘약속을 어겼으니 한 턱 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마수 행사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이것은 벌의 수위가 낮은 가벼운 죄에 대한 지혜로운 처리의 과정이다.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는 잘못을 뉘우치고 책임 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한 벌칙이다.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는 구체적 방법이 바로 공동체가 결속할 수 있는 장을 열게 하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 모두가 마음의 상처 없이 한 턱 내고 대접 받으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의 대부분은 큰 처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벼운 것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공동체 해체는 이 같은 가벼운 잘못들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나 책임질 기회를 갖지 못해서 잘못을 지속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그 사람과 관계를 깨는 방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깊어질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공동체를 내부에서부터 철저하게 해체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공동체도 가벼운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사소한 잘못들이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도록 했던 제마수의 예를 다시 한 번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그날

백성, 고난의 주인 김령 , 계암일록(溪巖日錄)

1621년 11월 30일 맑음.
밥을 먹은 뒤 여희, 이실 형제, 요형 및 참 등과 현사사(玄沙寺)에 갔다. 배원선(裴元善)은 일 때문에 안동에 갔고, 그의 둘째 아우가 소식을 듣고 와서 선방에서 함께 잤다.

1621년 12월 1일 맑음.
아침에 류의언(柳宜彦)이 왔는데 어제 이실이 전한 말을 듣고 온 것이다. 의언 및 배 군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아침술에 취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밥 및 두부가 들어왔다. 밥을 먹은 뒤 의언은 안동으로 돌아가고 우리들은 오천(浯川)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배원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장난으로 글을 보내어 제마수(齊馬首)로 처벌한다고 했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작가소개

이상호
이상호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계명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07-10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난파된 세곡선의 일로 세금을 징수하려는 것에 대해 법을 근거로 선처를 요청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09-30 ~
1751년 9월 30일, 호조(戶曹)에서 관문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인 즉, 병인년(1746)에 감관(監官) 신윤보(辛胤寶)와 색리(色吏) 김윤택(金允澤) 등이 납부할 것이 각각 쌀 34섬 8되 3홉과 콩 16섬 10말 9되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사하고 심문해 보니 감관 신윤보는 작년 3월에 전염병으로 온 집안이 몰사하였고, 색리 김윤택은 정묘년(1747) 5월에 대동미 실은 배에 탔다가 8월 22일에 남양(南陽) 경내의 창도(倉島) 앞바다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어 사공과 격군 3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감관과 색리 및 격군 8명은 요행이 살아났으나 침몰한 곡물은 끝내 1섬도 건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경우였다.

“잠수부를 많이 동원하여 시신을 건지도록 하였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2-02-18 ~
1752년 2월 18일, 창원부 병선의 사공과 격군으로서 북관에 운반해갈 곡식으로 진주(晉州)의 곡식을 받아서 싣고 색리, 사공, 격군 모두 15명이 같이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가 풍랑을 맞아 난파되어 곡물은 모두 물에 빠지고 8명은 죽고, 7명은 살아남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진주 색리 김순은(金舜殷) 나이 25세, 사공 물선군(物膳軍) 임악(林岳) 나이 42세, 격군 양인 유선(劉先) 나이 58세, 금위군(禁衛軍) 정정의(鄭正儀) 나이 43세, 사노(寺奴) 시돌이(時乭伊) 나이 43세, 칠장보(漆匠保) 김석제(金石諸) 나이 18세, 봉군(烽軍) 박선학(朴善鶴) 나이 32세, 봉군(烽軍) 장귀발(張貴發) 나이 25세 등 8명인데, 그 가운데 사노인 시돌이의 시신이 떠서 나왔기에 나룻가에 임시로 매장하였고 나머지 7명의 시신은 끝내 건져내지 못했기에 잠수부를 많이 동원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하고 건지도록 지시를 내린다.

“조선시대의 소방관, 도처의 화재에 대응하다”

서찬규, 임재일기(林齋日記),
1847-01-16 ~ 1858-02-09
1847년 1월 16일, 서찬규는 영천 은해사에 불이 났다는 것을 들었다.
1853년 12월 4일, 밤에 순영(巡營, 감영)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1858년 2월 9일, 정군백의 편지에 답장을 썼다. 요즘 도처에서 화재가 많으니 괴이하다.

“임금의 능에서 발생한 화재, 왕릉을 지키던 자 모조리 잡혀가다”

김종, 임진일록(壬辰日錄),
1592-03-24
1592년 3월 24일 저녁, 명종(明宗)의 능인 강릉(康陵)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는 강릉을 감싸는 담장 안에서 발생하였는데, 왕릉에 입힌 무덤의 떼까지 태웠다. 다음날(3월 25일) 강릉을 지키고 있던 참봉(參奉) 이귀(李貴)가 궁으로 들어와 지난밤 화재를 아뢰었다. 선조(宣祖)와 조정에서는 이를 불미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또 행여 왕실에 거역하는 무리가 있을까 하여 우선 왕릉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부터 잡아들였다. 이귀는 물론이고 능을 지키고 있던 수호군(守護軍)인 경국(敬國)과 그의 아비 홍순(洪順)을 모두 붙잡아 가두었다. 그리고는 선조는 조정의 당상관(堂上官)들과 예조의 당상관, 해당 관사의 제조(提調), 승지(承旨) 이정형(李廷馨)과 내관(內官)들을 파견하여 곧장 강릉으로 가서 왕릉을 살피도록 하였다.

“안동 태사묘만 화재를 면하다”

권상일, 청대일기(淸臺日記),
1721-03-23
1721년 3월 23일, 권상일이 들은 이야기였다. 안동에서 일주일 전 큰 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문 밖에 어느 작은 집에서 불이 났는데 그로 인하여 불이 성 벽을 넘어 성 안쪽으로 옮겨 붙었다고 한다. 성안으로 옮겨진 불은 삽시간에 400여 채를 모두 불태우고 관아도 피해를 입어 객사와 공수청 이외에는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태사묘(太師廟)만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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