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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16세기 어느 선비의 일상을 보다.
권문해의 『초간일기』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보물 제897호 『초간일기(草澗日記)』


『초간일기』는 권문해(權文海)가 47세부터(1580년 11월 1일)부터 58세(1591년 10월 6일)까지 쓴 일기로써, 2,187일에 대한 기록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관료가 쓴 일기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적 자료를 보완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초간일기』는 『실록』 편찬에 주요한 자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86년 보물 제879호로 지정되었다. 『초간일기』는 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권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역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일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초간일기』를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2년에 국역으로 펴냈고, 대중들에게 일기의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136건의 이야기 소재로 개발해 스토리테마파크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초간일기』는 권문해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고 있어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가족들과의 만남과 이별, 친구와의 교우 관계에서 느낀 감정과 소회를 생생하게 남겨 그 시대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 친구로서 살았던 한 사람(남자)의 감성을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자신이 중앙의 관료직과 지방직을 지내면서 직무수행에 관한 여러 문제를 다룬 일기인 만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 지방관아의 기능과 관리들의 생활, 당쟁관련 인물 및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지리 등 전반에 걸쳐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진다.


『초간일기』의 원본‧국역본


일기를 활용한 이야기 소재 구축 사이트


권문해는 누구인가?


권문해의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며, 1534년 7월 28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竹林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의參議에 증직된) 지(址)이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 참봉 정찬종(鄭纘宗)의 딸로서 문학과 명절(名節)을 소중히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나 가학적(家學的)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뛰어나 사람들이 “권씨 가문에 또 사람이 났다”고 하였다.

권문해는 19세에 향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23세 때인 1556년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형조 좌랑, 예조 정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지방관으로는 영천군수, 안동부사, 공주 목사, 대구 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사간원 사간 등을 거쳐 7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8월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도 당쟁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청렴과 정직을 신조로 삼았으며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에는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또한 역사에 정통하고, 학문에도 밝았던 그는 단군에서부터 조선 명종 이전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와 인물, 사회, 문학을 총망라하는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저자이다. 여기에서는 관료로서, 학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초간일기』의 저자 권문해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관료이자 동인(東人)으로서의 권문해


권문해는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속한다. 그래서 이 일기에는 정파적 입장에 따라 동인계에 속하는 김효원․허봉 등의 입장과 서인계에 속하는 이이․성혼․정철 등의 입장이 달리 나타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583년 2월에 북방에 호란이 있었을 때 병조 판서 율곡 이이의 처사에 대하여 비판한다. 이는 오랑캐의 침입사건을 처리할 때 이이는 사림의 공론을 무시하고 독대를 청하여 동인들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독대란 고위직에 있는 신하가 사관(史官)을 물리치고 임금을 혼자 만나 자신의 정견(政見)을 밝히는 제도지만, 공론을 무시한 독대는 폐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평소 공론에 의한 정치를 강조했던 권문해는 가차 없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의해 비판을 가하였다.

“병조판서 이이는 막 논계하여 추고하려던 중이었는데,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언연(거드름을 피우며 잘난 체 함)히 예궐하였다.” (1583년 2월 16일)

1575년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1584년 1월 16일, 서인세력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동인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이이의 죽음의 탓을 동인에 돌리며 모함과 질타가 끊이질 않았고, 이에 선조는 조정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인을 지방의 외직으로 보낸다. 권문해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한스럽게 바라본다.


율곡 이이의 죽음으로 조정에서 밀려난 동인(東人)
권문해, 초간일기, 1584-01-16 ~ 1584-05-27

동인으로서 입장과 소신이 확실했던 권문해는 관료로서도 확고한 신념으로 일했는데, 그는 민심을 헤아리고 살피는 관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 부사로 부임해 활동하던 중 흉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주린 사람들이 늘어 갔다. 그러자 권문해는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휼 활동을 펼치는데, 사흘 넘도록 관아에 들어오지 않고 인근 지인의 집을 찾아 신세를 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간다. 권문해는 마을을 순회하며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주었다. 흉년으로 온 나라가 어려워 특별한 대책 마련이 어려웠던 권문해는 발품을 팔아 직접 사람들을 만나는 정성으로 민심을 돌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조선의 학자로서 우리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리라.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정서(正書) 작업을 27일부터 시작하였다.”
(1587년 10월 30일)

1587년 10월 27일, 권문해는 드디어 오랫동안 공부하고 준비했던 일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문학, 인물, 식물, 동물 등 총망라한 백과사전의 집필이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 이후, 조선 선비들이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우리 역사에 대해선 문외한인 현실을 한탄하였다. 권문해는 차근차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리라 각오한다. 권문해는 조선[大東]의 여러 귀중한 것들[群玉]을 운(韻)의 순서대로 배열한 책[韻府]이라는 뜻을 담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라 책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한다. 그리고 8년 후, 완성시킨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일기 곳곳에 남아 있는데, 난생 처음 본 공작새를 보고 남긴 기록은 읽는 이에게 마치 공작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세밀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을 준다.

“공작새는 마치 꿩 같은데,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다. 온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었다.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길지 않았다. 9~10월에 이르면 길이가 서너 자쯤 되는데, 얼룩무늬가 다 드러난다고 하였다.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그려진 그림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먹는 것은 벼와 기장, 개구리와 게, 지렁이와 벌레로부터 오이·수박, 술과 밥 등 먹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암컷은 무늬가 없고 긴 꼬리도 없다.” (1589년 7월 13일)


『대동운부군옥』 초고본


1589년 7월 13일 권문해가 본 공작새는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져온 것으로, 그림으로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다


『초간일기』에 실린 여러 편의 시에서 권문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읊고 있다. 여러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고향을 떠나 살아야했던 그는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일기에 고스란히 담았다. 1580년 11월 29일, 눈발이 흩날리는 밤, 공주목사 권문해는 텅 빈 관아에 홀로 앉아 시를 읊었다. 그는 목사로서 관아의 주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온 심상으로 ‘객이 되어 읊는다[客中卽事]’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눈발은 먼 산에 흩날리는데
하늘 끝에는 얼어붙은 구름이 머물러 있네
얼음 밑에는 어룡이 몸을 웅크려 있고
숲속에는 참새가 추위에 떨고 있네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려니 바람은 지게문을 때리고
밥을 훔치려는 쥐새끼는 밥상 위로 오르네
반달은 공산(公山)의 관아를 비추는데
부질없이 거울 속 얼굴만 시들어가네


1582년 1월, 권문해는 옥에 갇혀 있던 죄수의 탈옥 사건(1581년 9월 23일)으로 공주 목사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이 그리웠던 권문해는 파직이 한편 반갑기도 했다. 그는 예천으로 돌아오자 바로 자신의 호를 딴 정사, 초간정사(草澗亭舍)를 짓기 시작한다. 오랜 관직 생활에 지쳐 있었던 권문해는 고향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곳에 단을 높이 쌓고, 마루가 넓은 누정을 지었다. 누정은 선비들의 공간이자, 남자의 공간이었다. 좋은 벗을 만나 술과 시를 나누기도 하고, 깊은 사색과 사유에 빠져들기도 했다. 1582년 2월 26일 권문해는 초간정사를 완성한 이후, 매일 같이 그곳에서 생활한다. 실로 그에게는 꿈꾸어 오던 쉼터의 역할은 한 듯하다.

권문해의 로망, 정사(亭舍)를 짓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02-08 ~ 1582-03-08

봄의 초간정사 모습


이상의 몇 가지 기록을 통해 권문해와 그가 쓴 『초간일기』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기록은 기억을 이어주고, 시대와 시대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권문해는 그의 삶 속에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기억하기위해, 특별한 감정을 훗날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을 것이다. 권문해는 2,187일의 기록을 통해 40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엇을 기억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없는 지금, 그것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서거 100주년을 맞은 가문의 학자, 그의 추모 사업에 힘써줄 것을 문중에 호소하다”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6-02 ~ 1699-07-11
분강서원 건립을 위해 1699년 6월 2일 인근 문중 일가에 공지문[通文]을 보냈다. 특히 서로 나누어 맡을 재정적 분담금을 분명하게 밝혀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우리 분천(汾川) 일대는 바로 선조(先祖) 효절공(孝節公)께서 대대로 살아오신 옛 마을이니, 남아 전해오는 기풍과 향기가 잠시 머물다가 거쳐간 보통 지역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위 기슭 위에 애일당이 우뚝 높게 서 있는데,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자손이 날로 교체되어, 장차는 평천(平泉) 서업(緖業)이 마침내 사라져 전해지지 못할 형편이 될 것이니, 이 어찌 후손들이 깊이 부끄러워하고 듣는 사람들이 다 함께 개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에 애일당 언덕에 알맞은 땅을 살펴 정사 하나를 창건해서 추모의 정성을 부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자손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또한 한미하여 제각각 생업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아무 것도 없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하고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렴하고 고지식한 신임 감사의 임기 연장을 위해 통문을 돌리다”

김령, 계암일록,
1622-05-15 ~ 1622-05-19
1622년 5월 15일, 신임 감사 김지남(金止男)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김령의 집에 들른 여희와 덕여의 이야기를 듣자니, 그가 여러 사람을 맞이하여 보는 것이 아주 소홀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감사의 본성이 고지식하여 인정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이니, 용서할 만한 일이다.
1622년 5월 19일, 황익기(黃益奇) 등 40여 명이 도내에 통문을 돌렸다. 감사 김지남이 통치를 잘 했다는 내용의 정문(呈文)을 비변사(備邊司)에 올려 몇 년간 감사직을 지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였다. 신임감사 김지남은 무능부패했던 지난 감사 정조(鄭造)와는 달리, 다스림에 청렴하고 검소해서 폐단을 없애는데 온 힘을 쓰니 모든 도민이 기뻐하던 차였다. 그런데 장차 자리를 오래 보존할 수 없는 형편이 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감사가 그 자리에 오래도록 있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선산 사람들이 통문을 낸 것이다.

“서울에서 온 비밀 통문 - 선왕을 모함한 글을 역사에서 삭제하고자 하다”

미상, 무경일록, 1800-01-10
1800년 1월 10일, 장의 류도문(柳道文)이 들어왔다. 들어올 때 비밀리에 서울의 노론이 저쪽 사람들에게 보낸 통문을 구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원통합니다. 신임년의 변고를 어찌 거론할 수 있습니까? 우리 영조대왕께서는 신성한 모습으로, 경종의 대를 이어 종묘사직의 중책을 이으셨으며, 대왕대비의 애통한 전교를 받으셨습니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전해 받은 것과 같이 왕위를 전수받으셨으니, 의리의 광명정대함은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있는 것보다 더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일종의 효경(梟獍)과 같은 무리들이 영조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원수처럼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였습니다. 그들이 겨냥했던 것은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충성스럽고 훌륭한 신하들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역모를 꾀했다는 뜻이다). 아, 모함하는 추잡한 글이 역사책에 실렸으나, 아직도 삭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또 중국에 들어가 오랑캐의 역사에 실려 머지않아 신빙성 있는 글이 될 것이니, 일이 급하고 애통하게 되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들은 비록 초야의 우둔한 자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원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장차 일제히 한 목소리로 소를 올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왜곡하고 모함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청나라의 역사 또한 바로잡고자 합니다….”

“기우만의 창의(倡義) 통문을 받아보다”

이병수, 금성정의록, 1896-01-15 ~
1895년 1월 15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이병수(李炳壽)는 전라도 장성의 참봉인 기우만(奇宇萬)이 1896년 1월 보낸 통문(通文)을 받게 되었다. 기우만이 보낸 통문을 급히 뜯어 읽어 내려가던 이병수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통곡 밖에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임금은 방금 별관에 옮겨 계시니 분이 치밀어 차라리 죽고 싶다. 신하로서 어찌 편안히 침상에 누워 있겠느냐?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면서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마음만 흥분할 뿐이지 임금의 치욕을 보고 있구려.
지금 왜놈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옛날이나 똑 같은 우리의 원수로세. 임진년(壬辰年) 일을 차마 말하랴. 전감(前鑑)이 멀지 않고 악독한 성질을 아직도 지녔으니 후환을 족히 증명하겠다. 이웃의 예를 닦는다고 핑계하고 기밀을 노리니 폐간(肺肝)이 빤히 드려다 보이고, 마침내 역적을 두호하여 앞잡이를 삼으니 심장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놈들이 이리떼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간흉들의 앞잡이마저 있단 말인가? 부강(富强)이란 말은 바로 임금을 속이는 감언이요, 개화란 것은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전조다.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못할 짓이 없으니 삼강오륜이 끊어지고, 의복을 변경하고 머리를 깎되 거리낌이 없으니 문명 야만이 한이로구나. 양사(兩司) 종공(宗工)은 업신여김을 막아내지 못하니 조정에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고, 외방 부백(府伯)은 그릇된 명을 받들어 머리 깎기를 독촉하니 나라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 하랴.

“단발령에 맞서 호계서원에서 안동 유림들에게 통문을 내다”

미상, 을병수득록, 1895-12-01
1895년 12월 초1일이었다. 호계서원에서는 당시의 정국에 대한 극명한 우려와 함께 윤리와 강상이 무너지는 변고가 있다면 죽음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2월 초6일 안동부 향교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내용의 통문을 내었다. 이 통문에는 기본적으로 죽음이 최악의 상황이지만 윤리와 강상이 변화하는 형국을 맞아 몸을 던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리론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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