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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흔드는 빌런

한국은 1910년 이전에 간행된 전통기록물(고서, 고문서 등)과 그것을 인쇄하는데 사용된 인쇄도구(활자, 목판) 등이 현재까지도 국내외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어서, 이를 통하여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인쇄문화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1910년 이전 간행된 전통기록물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고,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 소장되어 전하지만 고려시대 청주 흥덕사에서 인출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 하권도 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대장경과 경판 및 조선시대 주조된 금속활자와 금속활자본 그리고 목판에 글자를 새겨 간행된 목판본 등이 현재까지도 전존하고 있다. 이중에 대장경의 경판[합천 해인사]과 목판 가운데 유교책판[한국국학진흥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이 되기도 하였다.

전통기록물의 간행은 국가적으로 잘 정비된 인쇄기구와 제도 등 인쇄문화가 전반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목판에 판각을 하거나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목판본, 금속활자본 등으로 간행이 가능한 것이다. 현재까지 일부 전통기록물과 인쇄도구가 잘 보존되어 전하고 있지만 그것이 고려와 조선시대 간행되고 생산된 전부는 아니다. 이는 왕명(王命), 병화(兵火), 충훼(蟲毁), 곰팡이, 정치적‧사상적인 문제로 인하여 전통기록물과 인쇄도구가 소실 및 훼손이 되기도 한 것이다. 다음은 전통기록물과 인쇄도구의 소실 및 훼손과 관련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본 것이다.

먼저 병화에 의한 전통기록물의 훼손을 보면, 고려시대 목판인쇄술이 집약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판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은 이후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왔는데, 1232년 몽고군의 침입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간행본과 경판 일부만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1592년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전기 간행되거나 생산된 고문헌과 고려시대부터 축적된 서책이 홍문관(弘文館)의 소실과 함께 모조리 불에 타 멸실되었고, 춘추관(春秋館)에 있던 각 조(朝)의 실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또한 모두 불에 타 버렸다. 현재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3)까지의 기록만 전하고 있으며,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는 전하지 않고 있다.

한편 화재로 인한 피해는 서적뿐만 아니라 인쇄도구에도 미쳐서, 임진왜란의 병화로 지방의 책판이 잿더미가 된 사실을 1613년 박희현(朴希賢)이 속찬(續撰)한 훈련도감자본(訓鍊都監字本) 「고사촬요(攷事撮要)」의 발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고, 1857년 주자소(鑄字所)에 화재로 당시 주자소에 보관하고 있던 15만여 자의 금속활자가 불에 타서 녹아버렸다. 최근에 주자소 화재 당시 화재 피해를 입은 일부의 금속활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금속활자는 조선 후기인 1777년에 평양감사(平壤監司) 서명응(徐命膺)이 정조(正祖)의 명을 받아 주조(鑄造)한 정유자(丁酉字)로 추정된다. 본 금속활자를 통하여 조선 후기 금속활자의 주조 형태, 인쇄술, 과학적 성분분석 등 조선 후기 금속활자 인쇄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에 중요한 원형자료이지만 당시 부주의로 인하여 원형 상태가 훼손된 점이 아쉽다.


<화재 피해를 입은 금속활자>


조선시대 들어서 당쟁 및 주자학에 반하는 사상 등으로 인하여 문집과 저술 그리고 그 목판이 분서(焚書)되거나 훼판(毁板)되는 사례가 확인이 된다. 먼저 조선 전기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과 그 목판이 정치적 사건으로 1498년 문집이 소각되고 목판은 훼판되었다. 이는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의 훈구파(勳舊派)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아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주축인 사림파(士林派)를 공격한 정치적 사건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이로 인하여 김종직은 사후(死後)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그의 문집과 책판이 소각(燒却) 및 훼판되어 시문의 상당부분이 일실되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 4년(1498) 7월 17일 기사>


*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정종보(鄭宗輔)에게 유시하기를,“도내에서 개간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 판본을 즉시 훼판(毁板)하여 불태우라.” 하였다. 예조에 전교하기를, “중외의 사람 중 혹 김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일이 있으면 즉시 수납(輸納)하게 하고, 수납하지 않는 자는 중히 논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당쟁으로 인하여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문집과 목판이 분서 ‧ 훼판 되었다. 이현일의 문집인 「갈암집」은 19세기 초에 처음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현일이 숙종조(肅宗朝) 당쟁[갑술환국]으로 신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그의 문집과 목판이 분서 ‧ 훼판 당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 19세기 초에 간행된 문집과 그 책판의 전모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전통기록물이 훼손당하기도 하였지만, 사상적인 이유로 전통기록물이 불태워진 사례도 있다. 그 예로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규정되어 탄압받은「설공찬전(薛公瓚傳)」이 있다. 유교적 이념의 자장이 강했던 조선시대「설공찬전」은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서, 유교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후세계 등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王命)으로 모조리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위에서 든 사례 이외에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남명집(南冥集)」, 조선 중기의 학자 이언적(李彦迪)과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 최석정(崔錫鼎)의 「예기유편(禮記類編)」,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의 「노서유고(魯西遺稿)」와 「명재유고(明齋遺稿)」 등이 정치‧사상적인 이유로 문집과 목판이 분서 ‧ 훼판되기도 하였다.

서책과 저술 내용 그리고 목판의 분서 또는 훼판은 저작자가 의도한 저술 내용의 의미 또는 처음 간행한 인쇄본이 훼손되거나 인쇄되지 못한다는 점은, 후대에 이를 간행하는데 있어서 저작자의 저술 내용 등이 당초와 달리 탄압 등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수정하거나 내용 자체를 제외하고 간행되기도 하는데 이는 또 다른 2차 훼손이다.

한편 일제에 의한 기록물의 훼손된 사례도 확인이 된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후기 장령, 돈녕부도정,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항일운동가로 그의 저술은 사후(死後) 문인들과 유림들이 편찬하여 1908년 겨울에 완성된다. 그러나 최익현의 문집에는 일제가 기피하는 부분이 많고 문집이 간행됨으로써 빚어질 항일사상의 고조를 꺼린 까닭에 일제는 당시 인쇄된 전질 중에서 상소편 4권, 서편 6권, 잡저편 2권, 연보 4권, 속집 2권 등을 불온사상이 담긴 것이라 하여 일제 관헌(官憲)에 의해 압수되고 원판은 훼판되었다. 아울러 한국의 전통기록물은 특정시기에 일제에 수탈되거나 매입되어 현재까지 일본의 다수 기관과 개인이 한국의 전통기록물 소장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으로 넘어 간 전통기록물과 목판 등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일부 훼손된 사례도 확인된다.

현재 원주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일본에서 구입해 오거나 일본인 손에 있던 것을 구입한 유물이 있다. 이중에는 조선 후기 판각된 한글소설 목판을 훼판하여 일본식 보석함 및 분첩으로 만들어져 있고, 「오륜행실도」와 한석봉 「천자문」의 목판도 또한 훼손하여 일본식 화로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일본식 보석함은 서로 다른 네 개의 한글소설 목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함양의 이산책판박물관에는 최근 구입한 유물로 조선후기 판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훼손된 「춘추」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벽면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춘추」 목판의 마구리 등을 잘라내고 판면에 니스를 칠해 놓았다.


<보석함>
* 원주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소장


<분첩>
* 원주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소장


<화로>
* 원주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소장


<화로>
* 원주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 박물관 소장


<일반적인 목판 형태>
*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


<훼손된 「춘추」 목판>
* 함양 이산책판박물관 소장


위 목판 가운데 보석함과 분첩으로 훼손된 것은 조선 후기 지방에서 한글소설을 판매하기 위해 판각된[방각본(坊刻本)] 한글소설 목판이다. 이는 조선 후기 지방의 목판 판각술과 그리고 당시 읽혀진 한글소설의 현황 파악, 판각된 한글의 서체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화로로 훼손된 목판 가운데 왼쪽의 「오륜행실도」 목판은 19세기에 교서감(校書監)에서 판각된 것으로 목판 자체가 매우 희귀한 것이다. 목판이 이러한 보석함과 화로 등으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 지방과 중앙의 목판인쇄술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원형 자료의 훼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문서와 고서를 보면, 관리 및 보존에 소홀하여 간혹 지면(紙面)에 물이 배거나 좀 벌레 또는 쥐로 인해 훼손되는 경우가 있고 또한 중요한 고서의 내용이 다른 고서 표지의 배접지로 사용되어 훼손된 사례가 있는데 다음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고서를 보면 물이 배어 들었고 또한 쥐가 지면 및 표지를 갉아먹어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간찰을 보면 좀 벌레가 지면을 갉아먹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좀벌레는 주택가 주변의 어둡고 습한 곳이나 따뜻한 곳에서 서식하며, 종이·풀 등 식물성 섬유를 주로 갉아 먹는다. 이러한 좀벌레 또는 쥐가 고서를 갉아 먹음으로 인해 저술 내용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


<枏溪先生文集>


<寒水齋集>


<김안로(金安老) 간찰>
成均館大學校 博物館, 「槿墨」(上卷), 서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1981. p.46.


<좀 벌레>


2017년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인 지봉스님이 조선 후기에 간행된 고서 표지의 배접지로 사용된 종이가 1577년에 민간에서 인쇄한 ‘조보(朝報)’임을 확인하여 발굴하였다. 조보는 요즘으로 보면 일간 신문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발굴된 조보는 16세기 후반에 민간에서 상업 목적으로 목활자(일부 금속활자 혼용)를 이용하여 발행한 것으로, 정축(丁丑, 1577) ‘11월 초6일’ ‧ ‘11월 15일’ ‧ ‘11월 19일’ ‧ ‘11월 23일’ ‧ ‘11월 24일’자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보의 발굴로 인해 그동안 「선조실록」 등에 기록으로만 전해져 온 것이 실물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 조보는 ‘국가 기밀 누설’ 등의 이유로 선조의 명에 의하여 발행된 지 3개월 만에 폐간되었고, 관련자 30여명이 유배되었다.


<1577년 민간인쇄 조보>
*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소장


<1577년 민간인쇄 조보>
*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소장


새롭게 발견된 조보는 1577년 11월 조정에서 논의된 주요 사안을 인출 및 발행한 것으로 이제까지 실록에 기록으로만 알려진 것인데, 잔편의 실물이 발견됨에 따라 세계 최초로 민간에서 상업 목적으로 목활자를 이용하여 발행한 일간 신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는 중국 명나라 숭정 11년(1638)에 목활자를 사용하여 ‘저보(邸報)’를 발행한 것이나, 1650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금속활자를 채용하여 발행한 ‘Einkommende Zeitung’보다 60~70여년 앞선 것으로 세계 언론사에 있어서도 그 가치나 의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서지학 분야에 있어서는 목활자를 사용하여 발행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판매한 점에서 비쳐볼 때, 조선시대 상업출판의 시기를 17세기에서 16세기 후반으로 앞당길 수 있으며 아울러 금속활자를 일부 사용하여 인출한 점에서 당시 민간의 활자 인쇄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보의 내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서 표지의 배접지로 사용되어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훼손되어 잔편(殘片)으로 발견된 점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통기록물의 훼손과 관련하여 초‧중등 교과과정에서 한 번 들었을 법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분서(焚書)’는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유가(儒家) 서적을 주 대상으로 하여 불태운 것이다. 이처럼 왕명이나 정치적인 이유 그리고 위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충훼나 화재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 등으로 고문헌이 훼손되고 있다. 이러한 고문헌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선조들이 남긴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 전통기록물과 목판 등이 훼손된 사례를 살펴보았다. 현재까지도 많은 고문헌들이 방치되어 습기와 충훼, 화재 그리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훼손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전통기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고문헌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관리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이 쌓이면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고문헌들이 좀 더 온전하게 관리 및 보존되어 후속세대들에게 전해지게 될 것이고, 아울러 이를 다양한 디지털 문화콘텐츠의 원형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서울: 천년의상상, 2013.
  • 金斗鍾, 「韓國古印刷技術史」, 서울: 탐구당, 1974.
  • 남권희, 「지식정보의 소통과 한국 금속활자 발달사」 ; 조선시대, 대구: 경북대학교출판부, 2018.
  • 成均館大學校 博物館, 「槿墨」(上卷). 서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1981.
  • 千惠鳳, 「韓國典籍印刷史」, 서울: 汎友社, 2012.

[참고사이트]



집필자 소개

글 : 안정주
안정주
전통 판각가
이산책판박물관, 대장경문화학교 홍보실장
* * 자문 및 자료 : 권오덕



“구걸하는 친구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다”

오희문, 쇄미록, 1599-04-28

1599년 4월 28일, 오늘 남씨 집으로 시집간 누이의 종 덕룡이가 평강현 관아에서 왔다. 윤겸이의 편지를 보니, 남씨 집 누이가 여러 물건을 보내달라고 청해서 몇몇 물품을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요즘에 친구들의 구걸하는 편지가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여기에 응할 수가 없어서 모두 그대로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해 왔다. 반드시 이를 두고 노여워하거나 원망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라, 몹시 민망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얼마 전 쇄마차사원으로 공무를 수행하던 중에 나라의 말 3필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비록 백성들의 말을 거두어 보내서 숫자를 맞추기는 했으나, 아마 파면당할 것이라 지금 파면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윤겸의 말대로 만일 파면이라도 당하면 오희문 일가 식구들은 반드시 굶주려서 오래지 않아 모두 쓰러질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걱정하면 무엇 하겠는가. 관아의 상황도 저축이 아예 없어 뚜렷한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시원하게 파면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겸이 과거에 급제하고 또 난리 통에 지방 수령직을 맡아 일가 식구들의 생계가 해결되었다 생각하고 좋아한 것이 엊그제 같았다. 그러나 거듭 지인들의 부탁에 시달리고, 상급자가 미워하여 각종 괴로운 공무에 수시로 동원되니, 과연 사람 일은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오희문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청탁을 받았던가. 오희문은 새삼 아들 윤겸이 안쓰러워져 한숨을 쉬었다.

“아들 윤함의 처가댁이 도둑을 맞다”

오희문, 쇄미록, 1600-03-18

1600년 3월 18일, 오늘 오희문은 황해도에 살고 있는 아들 윤함의 편지를 받았다. 윤함 집의 식구들은 무탈하게 잘 지내고 아무런 일도 없다고 한다. 다만 오직 한 명밖에 없는 종 논금이가 최근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장차 집안의 생계를 어떻게 꾸려갈지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아내의 집에서 기르던 소 2마리와 말 1마리를 도둑맞았다고 한다. 해주 고을은 부역이 너무 번거로운데다가 가계는 완전히 파산해 버려서 수습할 여력이 없다고 한다. 아마 장차 유리걸식 하게 될 것이라 한다. 윤함이 황해도로 가서 살게 된 것은 처가댁 때문이었는데, 이제 처가댁 가산이 탕진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모두 윤함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모양이었다. 집안 사정이 이러하여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는 별시는 참가도 못하였다고 한다. 종도 없고, 말마저 도둑맞았으니 올라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편지를 읽은 오희문은 괴로운 심정을 참을 수 없었다. 오희문 집의 곤궁함이 극에 달하여, 타향을 떠돌며 일정한 거처가 없어서 아들로 하여금 아직도 처가에 머물러 있게 하고 끝내는 유리걸식 하게 만들 모양이었으니 근심스럽고도 민망한 일이었다. 어서 집안을 일으켜 아들 윤함의 식구들도 옮겨와 살도록 해야겠으나 방법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흉흉한 민심-푸른 보리밭은 풍년을 노래했으나, 수확한 보리를 초적에게 빼앗기다”

김령, 계암일록, 1624-06-01

1624년 6월 1일, 김령은 아침에 아들 김요형을 시켜 사당에 보리를 올렸다. 이 해 예안현의 보리밭은 작황이 매우 좋았다. 종들을 보내 수확했는데, 초적(草賊)이 훔쳐간 것이 절반이 넘어 거의 4, 5섬 쯤 되었다. 이는 근래에 없던 일로, 백성들의 풍속이 더욱 각박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진 백성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모두 관속(官屬)과 완악한(=성질이 사나운) 무뢰배들이었다.

“조선을 배신한 승려 성택의 이야기”

오희문 쇄미록 1592-08-26

1592년 8월 26일, 일전에 의병장 고경명이 전사할 당시 한 중이 의병으로 들어오고자 하여 그에게 물 긷고 밥 짓는 일을 책임 지웠다고 한다. 그런데 싸움에 나가는 날에 이르러서 이 중이 왜적과 내통하여 의병대장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의병들이 크게 패하였다. 또 용담, 금산 두 고을에 도망하여 숨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중이 적과 내통하여 적의 무리를 인도하여 여러 산을 수색하고 인민을 살해하며 재물을 노략질하였다고 한다. 또 보성군수가 9일 동안의 싸움을 할 당시, 이 중이 보성군수를 살해하고 그가 차고 있는 대장의 도장을 빼앗으려 계획하였다고 한다. 실로 그 흉악함이 왜적보다 몇 배 더 심하다고 할 만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겨 그를 죽여 그 고기를 먹고자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성군수가 우연히 이 중을 사로잡아 문초하였는데, 앞의 일이 모두 탄로 나서 방어사에게 압송되었다고 한다. 이 중의 말에 의하면 금산에 주둔한 왜적은 먹을 것이 이미 다 떨어져서 날벼를 베어 먹고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이 중의 이름은 성택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적 30명을 죽여도 이 중 하나를 죽인 공에 못 미친다고 하였다. 그런 배신자를 잡아들였으니 통쾌하고 또 통쾌한 일이었다.

“탐욕스러운 풍기군수, 백성의 삶을 손아귀에 움켜쥐다”

김령, 계암일록, 1622-05-21

풍기군수(豊基郡守) 이잠(李埁). 그는 타고나길 어리석고 비루하였다. 대북(大北)파에 붙어 아첨하며, 대북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항상 팔을 휘두르며 나서서 참여하였다. 군수가 되고나서는 부정하게 재물을 거둔 일이 천만의 말로도 형용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민간의 장정을 징발하여 자신의 집을 짓고, 백성들이 세금으로 내는 무명베를 공공연히 그의 집으로 거두어간 것이 몇 번이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 게다가 관부(官府)의 온갖 물건들을 민간에서 거두어들여 일일이 그의 수중에 움켜쥐었다. 이런 염치없고 양심 없는 작자가 수령이 되어 앉아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령은 통탄스러웠다. 가까운 경내에 찾아보려 해도 이토록 흉악한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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