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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배에 오른 사람들


1621년 5월 20일, 평안북도 안주(安州)에서 22척의 배가 명의 북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해안에는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한 기생은 정인과의 작별을 위해 뱃사람에게 업혀 배 위에 오르다가 그만 꽃신을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모두들 그 광경에 한바탕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내 술잔을 나누고 눈물을 훔치면서 송별의 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주인공 안경(安璥, 1564~?) 역시 막냇동생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배를 띄워 뭍에서 멀어져갔다.

다른 사행과 달리 1621년의 사행은 비장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안주에 모인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족과 지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사신으로 떠나는 이들이 행여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행은 평균적으로 1년에 3~4차례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왜 1621년의 사행에 대해 유독 긴장하였을까? 그것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 처음으로 바닷길을 통해 명으로 떠나는 사행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621년의 사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이 존재하였다.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도대체 당시 사행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행히도 안경은 『가해조천록(駕海朝天錄)』을 통해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 안경의 시선을 통해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겠다.




그들은 왜 배에 올랐는가?



시작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명의 참전으로 인해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1598년에 마무리 되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후였다. 조선과 명 모두 상황을 수습하기에도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다. 조선과 명의 위기는 만주에 위치한 여진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압록강 너머 존재하였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라는 인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동안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조선과 명은 이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이라는 국가의 건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의 질서를 통제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명의 자신감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전하여 사망한 김응하의 최후의 모습〉
(출처: 『충렬록(忠烈錄)』, 디지털장서각)


명은 후금을 향해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강고한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던 조선과 후금에 의해 수세에 내몰린 해서여진의 여허부 역시 이 전쟁에 동참하였다. 1619년 2월, 명과 조선, 여허로 구성된 연합군은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은 네 부대로 나뉘어 있었고, 합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후금군은 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 부대를 각개 격파하였다. 조선군이 포함된 동로군 역시 부차의 들판에서 패배하였고 조선군 총책임자 강홍립(姜弘立)은 후금에 항복하고 말았다.

사르후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투는 이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후금은 여허부를 병합하여 여진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명이 차지하고 있었던 무순과 심양, 요양 등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요동 전역을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조선과 명은 육로로 교통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상실해 버렸다. 이 일은 생각보다 많은 불편함을 양국에게 안겨주었다. 당장 1620년 명 황제 태창제(泰昌帝)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박이서(朴彛叙)와 유간(柳澗) 등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아직 육로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을 때는 상황이 바뀌었다. 후금에 의해 육로가 막혀 바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은 국초부터 엄격한 해금(海禁)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조선과 명 사이의 바닷길은 자연스레 사장되었다. 그런 바닷길을 200년 넘어 만에 복구하게 되었으니 상황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언제 배를 띄워야 하는지, 어떤 경로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등 배를 띄우기 위해 필수적인 정보들이 부재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사신단의 배는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고, 박이서와 유간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에 표현된 용오름 현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는 1624년 사행 당시 작성된 그림을 후대에 다시 모사한 작품이다.
그림의 말미에는 바닷길로 사행된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이덕형의 발문이 있다.


바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배에 오르면 동일한 위험에 노출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료들은 뇌물을 써서라도 사신에 선발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역설적이게도 후금으로 인해 조선과 명 사이의 긴밀한 연락이 요구되었다. 공동의 위험에 함께 대처하고 정보를 공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바다를 건너야만 했고, 결국 그 한 자리는 안경의 몫이 되었다. 당시의 사행이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은 한 배에 타지 말라.
혹시 어떤 배가 불행을 겪더라도 다른 배는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

-『가해조천록』 5월 17일자 중-


사신단 내에는 세 명의 사신과 다수의 원역으로 구성된다. 세 명의 사신은 정사와 부사, 서장관의 직책을 맡게 되는데, 광해군은 이 세 명이 한 배에 타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무사히 도착해야 사신의 임무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바다에서 벌어질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명나라 사신들의 귀국 편에 동행하기로 하여 조금은 걱정을 덜게 된 것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바다와 육지,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5월 20일 안주에서 떠난 배는 22척에 이르렀다. 이렇게 많은 선박이 출항하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자 요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한인(漢人, 명나라 백성)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 동맹국이었던 조선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도망친 명나라 백성을 나 몰라라 방치하였다. 괜히 이들을 받아 들였다가 후금과 마찰이 생길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자 후금군은 압록강 너머까지 건너와 한인을 살육하였다. 조선이 결코 안전지대가 아님을 깨달은 한인들은 어떻게든 명나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명나라 사신과 조선 사신이 배편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우르르 안주로 몰려든 것이다. 게다가 후금군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다시 국경을 넘어 사신의 인계를 요구하고 한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사신과 한인들의 마음이 한층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 요동의 난민들이 한데 뒤섞여 쫓기듯 배를 띄우게 되었다.


〈해로 사행길〉 (출처: 국립해양박물관)


항해는 연안 해역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전한 연안 항로를 따른 것이다. 이렇게 최대한 육지에 붙어 가면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도 쉬울 뿐 아니라 물이나 식량과 같은 물자를 확보하기에도 용이하다. 하지만 이 항로도 문제가 있었으니 요동이 더 이상 명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연안 항로가 안전한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바다는 호락호락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6월 4일 지금의 랴오닝 성 다롄시에 속하는 여순 앞바다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미 이 지역도 후금의 영향권 아래 놓였지만 풍랑으로 인해 사신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여순 포구로 들어가 정박하였다. 사신 일행은 후금군의 공격을 염려하여 배를 정박시킨 채 풍랑이 잦아들기를 바랐건만 야속한 하늘은 그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말았다. 한밤중에 광풍이 크게 일면서 포구에 정박해 놓은 배들끼리 부딪히며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밤중이라 시야까지 확보가 안 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명나라 사신 유홍훈(劉鴻訓)의 배도 뒤집어져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뱃사람들이 간신히 구조하였다. 당시 현장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명나라 사신의 처지도 이러한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다음날 날이 밝자 안경을 비롯하여 온전한 선박에 탄 인원들은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의 처절한 기억을 안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배에서 떨어진 자들과 떠다니는 시체가 서로 섞여 바다에 가득했다.
뱃전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기어올랐다.
급박하고 절박한 와중에 간신히 8~9척 분량의 방물을 옮겼다.
날이 다시 저물자 가달이 무리 지어 포와 화살을 쏘아댔다.
미처 멀리 피하지도 못했는데 큰비가 또 내리고
천둥과 바람까지 바다를 뒤집어놓으니
뱃사람들은 다리만 동동 구르며 속수무책으로 배가 가라앉는 것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해조천록』 6월 5일자 중-


바다 위에는 배에서 쏟아진 방물과 문서, 행장 등의 짐들과 시체들이 뒤섞여 떠다녔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배의 파편을 붙잡고 생사의 기로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안경 일행이 부지런히 생존자와 짐들을 건져내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육지로 올라서니 이번에는 가달(假㺚) 무리가 총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접근해 온 것이다.

가달이란 후금에 항복한 명나라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여진인처럼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머리 모양만 보고서도 이들의 위협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위협을 감지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시 배 안으로 도망쳐 상황이 종료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날씨까지도 돕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수습해서 육지에 올려놓은 짐들을 고스란히 가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놀랍게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온전한 배에 나누어 탑승하자 한 배 당 탑승 인원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배는 한층 무거워졌다.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고난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중 여순 포구와 황성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왼쪽 상단 네모: 여순 포구 / 왼쪽 하단 동그라미: 황성도


간신히 다시 배를 띄워 여순은 벗어났지만 고달픈 상황은 계속 연출되었다. 배 안에 식량이 부족하니 자주 배를 육지에 정박시켜 물과 식량을 확보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가달과 후금군이 총포를 쏘며 공격해 왔다. 그래도 점차 후금의 영역에서 벗어나며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제 황성도(皇城島)라는 곳에만 도달하면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이번에도 쉬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역풍으로 인해 배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안경과 역관 박경룡(朴景龍), 이해수(李海壽) 등이 이끄는 선박 3척은 그만 황성도로 가는 경로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밤새 떠돌다 도착한 곳은 여순 앞바다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나마 안경은 비교적 안전한 포구에서 호의적인 중국인을 만나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경룡은 결국 후금군에 사로잡혀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순 앞바다에서 상황을 수습한 안경은 다시 배를 띄우려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뱃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이미 배가 너무 많이 파손된 데다가 바람도 순조롭지 않으니 지금 배를 띄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역풍이 계속 불어왔기 때문에 안경이 강제로 뱃사람들을 닦달한들 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안경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임금에게 명을 받아 표문을 받들고 천자를 뵈려 하는데
요동의 길이 막히고 바다는 끝이 없습니다.
돛은 기울고 노는 부러지고 폭풍우와 풍토병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어찌 홀로 고생스럽다 여기겠습니까?
원컨대 신령의 힘을 빌려주셔서 큰 하천을 건널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정성을 다하여 신령께 고하노니 부디 긍휼이 여기옵소서.

-『가해조천록』 6월 15일자 중-


기도가 효험을 발휘한 것일까. 다행히 동풍이 불기 시작하고 앞서 황성도로 들어갔던 사신들이 후미에서 이탈한 안경 등에 대한 정보를 알린 덕분에 명나라의 호위선도 당도하였다. 결국 배를 띄운 지 한 달 만인 6월 19일 등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인 바닷길을 통과하였으니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을까?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중 등주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바다와 맞닿은 등주의 외성을 그린 것이다.
성의 바깥쪽에 가장 화려한 건물이 봉래각(蓬萊閣)으로, 중국의 4대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었네



등주에 도착해서 안경 일행을 맞이한 것은 환대가 아니라 심문이었다. 명 태조 주원장이 해금령을 내렸는데 어째서 배를 타고 왔느냐는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던 안경 일행의 입장에서는 야속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행하였던 명나라 사신들이 잘 변호해 준 덕분에 바다를 건넌 일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의 괴롭힘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경 일행이 어느 곳을 가든 관원들은 노골적으로 인정(人情: 뇌물)을 요구하였다. 심지어 인정 요구는 북경에 도착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홍려시(鴻臚寺: 명나라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이 와서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보단(報單: 조선 사신의 도착을 보고하는 단자)을 바치고
홍려시에 주문(奏文: 조선 국왕이 명 황제에게 바치는 외교문서)을 바치려면
여러 곳에 인정을 크고 작게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가해조천록』 7월 30일자 중-


이처럼 황제가 기거하는 북경에서도 부정부패가 빈번하게 벌어지니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몇 차례나 북경을 방문하였던 역관 기섬(奇暹)은 명나라 관원들의 뇌물 요구가 이전보다 100배는 심해졌다며 걱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가뜩이나 바다에서 많은 짐을 잃어버렸으니 뇌물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후금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상황이었다. 명나라 내부의 부패를 목도한 조선 사신들의 입장에서는 훗날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바닷길만큼이나 좌절을 느낀 순간들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등주에서 북경을 왕복하는 사이에 자신을 환대한 지방의 유생과 조선의 사정을 이해해 준 천계제(天啓帝)의 태도가 그나마 위안거리가 될 뿐이었다.




마침내 여기서 목숨이 끊어지는구나



놀랍게도 안경 일행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예정된 어려움이 한 차례 남아있었다. 바로 귀국길이었다. 당연히 올 때도 바닷길로 왔으니 돌아갈 때도 바닷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은 앞서와 같이, 아니 앞서보다 더 심한 고난을 안경 일행에게 선사할 예정이었다.

귀국을 위해 조선 사신 일행이 다시 등주를 방문하자 안찰사(按察使) 도랑선(陶朗先)은 출항을 만류하였다. 이미 겨울에 접어들었으니 봄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경 일행은 천자의 칙서를 수령하였는데 일정을 지체할 수 없다며 출항을 강행하였다. 아마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마조(媽祖) 조각상〉 (출처: 국립해양과기박물관[대만])
안경은 항해를 앞두거나 항해 도중에 자주 제문을 짓고 제를 올려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다. 당시 안경이 제를 올렸던 대상에는 해상을 관장하는 바다의 수호신 천비낭랑(天妃娘娘)도 존재하였는데 천비낭랑은 마조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천비나 마조 숭배는 민간 신앙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안경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귀국 길에는 자주 천비에 대한 제를 올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바다를 체험한 안경의 인식이 변화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10월 7일 안경 일행은 배에 올랐다. 항해 초반에는 비교적 순탄한 듯 보였다. 하지만 10월 18일 석성도(石城島)를 눈앞에 두고 풍랑이 일어 돛이 찢기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표류가 시작되었다. 표류를 거듭하던 안경 일행은 해양도(海洋島)라는 섬에 정박한다. 다행히 이곳은 물자도 풍부하고 사람들도 호의적이었다. 이곳에서 몸을 추스른 안경 일행은 섬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출항을 단행한다. 10월 21일 순풍을 타고 배를 띄웠지만 곧 폭풍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결국 이름도 없는 작은 섬에 배를 정박시키고 폭풍이 잦아들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호전되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졌다. 눈과 바람이 휘몰아쳐 도저히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배 안의 물자는 바닥나기 시작했고,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0월 29일 마침내 양식이 떨어졌고 모든 희망이 꺼져버렸다. 안경은 죽음을 직감하고 ‘절명사(絶命辭)’를 지었다.

날개가 없이도 하늘을 날아오르고
비늘이 없어도 물속에 잠겨 뛰노니
거친 파도 포효하며 우리 배를 삼켜서
하늘이 우릴 버렸는데 어딜 갈 수 있겠는가
굴원(屈原: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 중국의 옛 시인)을 따라 구천에서 노닐 것인데
고국의 소식은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

-『가해조천록』 10월 29일자 중-


11월 2일 모처럼 날씨가 맑았다. 식량이 떨어진 선원들은 바위 주변에 붙어있는 해초를 뜯어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마지막으로 배라도 한 번 띄워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섬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돌풍이 불어 닥쳤고 배는 암석에 부딪혀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삶에 집착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체념하였다. 11월 4일 안경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임금이 있는 동쪽을 향해 4배를 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목 놓아 통곡하였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서풍이 불어와 그들의 배를 동쪽으로 이끌기 시작하였다. 11월 7일 안경 일행은 기적적으로 조선 땅 철산에 도착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경 일행이 철산에 도착하자 철산은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생환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포구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생환자를 반겼다. 모두가 생환의 기쁨을 나누는 바로 그 순간, 한 명의 아낙네가 통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는 1620년 유간을 따라 사행을 떠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안경 일행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 사정을 들은 모든 사람은 돌아앉아 숨죽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아낙의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안경 일행 중에서도 박경룡처럼 후금의 포로가 된 이도 있었고, 바다의 제물이 된 많은 이들이 있었다. 안경 역시 수차례 생사의 기로를 거쳐 간신히 생환하였지만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경험을 통해 안경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이 나버리기 때문에 정확한 심정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자손들은 영원히 문관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보아 자손들이 자신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본문의 모든 일자는 음력.)




집필자 소개

이명제
동국대학교에서 17세기 한‧중 관계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 및 논문으로는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달콤 살벌한 한‧중 관계사』(공저),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 「외교문서를 통해 본 도르곤 섭정기 조·청 외교」 등이 있다. 한·중 관계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를 새롭게 이해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유구국도(琉球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11월 3일~11월 9일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년 5월 4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풍랑을 만나 정신이 아득해지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8월 17일

1632년 8월 17일, 홍호(洪鎬)는 명나라로 향하는 배안에 있었다. 새벽에 광록도를 출발하여 용당을 지날 때였다. 정사의 배와 여타 사행단의 배 두 척도 홍호의 배 뒤를 따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줄기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더니, 새까만 구름이 마치 물에 먹을 풀어놓은 듯하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참혹하고 맹렬해서 홍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뱃사람이 바쁘게 중앙의 돛대에서 돛을 내리고는 뱃머리의 거적을 걷으려는데, 바람이 바다를 말아 올려서 놀란 파도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성난 바람소리가 땅이 꺼지는 소리보다 장렬하게 울렸다. 배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신속히 대척하여 경우 풍랑을 피해 배를 지켜내고 다른 탈은 없었다.

배를 돌려 바람을 따라 30리쯤 가니, 비가 그치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바람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돛을 올리고 다시 길을 가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곧장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삼계도, 해성도란 섬 사이에서 바라보니, 사행단의 두 배는 이미 목적지인 평도에 정박하였고, 뒤따라오던 배들 중 하나도 인근 삼계도에 닻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호는 제수를 준비하여 앞서 거우도와 장산도에서처럼 바다의 용왕에게 제를 올렸다. 애초 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못난 이들의 무식한 처사라 여겼는데, 직접 바다의 풍랑을 겪어보고는 허겁지겁 재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밥이 될 뻔하였단 생각이 들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났다.

“출항하기 전 배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7월 16일

1632년 7월 16일, 홍호(洪鎬)가 탄 배가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출항을 시작하였다.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이에 대한 시호를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홍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신단은 모두 6개의 배에 나누어 탔는데, 홍호는 3호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제 거친 바다를 헤치고 명나라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를 출발하기 전 밤중에 항해 개시를 고하며 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제는 바다의 신과 용왕님에게 제를 올렸다. 제문은 사신단의 일행에 속한 이장배란 자가 지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강과 하천이 돌아가는 곳으로
제사 받는 순번에서도 으뜸에 있으시네
정성으로 현황(玄黃)을 받들어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니
충성과 신뢰에 의지하여
밝은 신에게 이로써 기원하노니
영험한 복을 밝히시어
파도를 거두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가는 길에 편안토록 하소서
시종일관 도와주시길
보잘것없는 제물과 술을 올리니
밝게 임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드넓은 바다는
용왕님의 댁일지니
오가는 배들은
모두 용왕님의 도움을 입은 것
나라님의 예물을 보호하여 가나니
음으로 양으로 도우시길 비옵니다
상어와 악어를 물리쳐 주옵시고
수코래 암코래를 쫓아 주옵소서
아득하고 드넓은 바닷길을 건너가노니
하루도 안돼 천리를 가게끔 하옵소서
감히 조촐한 상을 마련하였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홍호는 제를 지내는 동안 과연 바다신과 용왕님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는 뱃사람들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그가 수십년 동안 공부한 학문에서는 용왕님이나 대해신(大海神) 같은 존재는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다. 바닷길로 사행을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제에 불쑥 끼어들게 되니 다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호보다 상관인 정사나 부사 역시 아무말 없이 제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무사히 사행을 갔다 올 수 있다면 까짓 근본이 없는 믿음이나마 제 한번 지내는 것이 어디 어렵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 제를 지내고 출발해서인지 항해 첫날 날씨는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렀다. 홍호는 처음 만날 명나라의 문물과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하다”

남연군의 묘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渚上日月)』, 미상

1868년 4월, 박득녕은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서양인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였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군기와 양곡을 약취하여 갔다고 한다. 서로 전쟁하는 사이어도 적장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들은 과연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 듯하였다.

이후에 이들 오랑캐들이 운현궁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당신이 산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 무덤을 파려고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뒷날을 기약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서한을 본 대원군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영종도 순찰사가 남연군 도굴단에 참가했던 괴수 두 명을 붙잡아서 참살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큰 경사라 칭찬하였는데, 도굴단의 대표는 서양 오랑캐이거늘 하수인 한 둘을 참살했다 하여 경사라 칭하다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윤 5월이 되자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번에 일어난 덕산군의 참변은 비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 해적을 섬멸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등용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원군의 조치였다. 박득녕은 과연 이러한 전교가 저들 서양 오랑캐를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 서양인들이 점점 조선에서 방종하는 것은 참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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