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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바다로!


바다로 간 여성들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흰 모래사장 대신 흰 타일이, 푸른 바닷물 대신 붉은 피의 바다가, 즐거운 함성 대신 사나운 침묵이 존재한다. 백상 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던 연출가 김미란이 각색하고 연출한 정육점을 배경으로 한 《맥베스》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정육점을 배경으로 만든 프로덕션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 모두를 여성으로 구성한 것도 처음이 아니다.


〈《Rose Rage》의 요크 공작의 죽음 장면〉 (출처: Michael Brosilow, 시카고 셰익스피어 컴퍼니 )


2002년, 영국 연출가 에드워드 홀이 시카고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만든 《Rose Rage》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3부작을 각색해 1·2부 각 두 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1부와 2부 사이에는 45분의 식사 시간이 준비될 정도였다. 《헨리 6세》 3부작은 헨리 5세의 이른 죽음 이후 이어지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지나 에드워드 4세가 등극하기까지의 길고 긴 죽음의 리스트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악인 가운데 한 명인 리처드 3세가 3부에서 등장해 뚜렷한 존재감을 남긴다. 이야기 속에 어떤 정치적인 배경이 있든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갔든 이 이야기는 형제와 친척을 죽고 죽여 왕위에 오르는 저주받은 집안의 이야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드워드 홀은 이 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무대 둘레에 정육점의 꼬챙이를 걸고 고기 대신 시체를 걸었고, 정면의 크고 흰 타일 재질의 바닥에는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에드워드 홀은 실제 돼지 내장을 무대 위에 펼쳤다. 이백 석 남짓한 오프-브로드웨이 규모의 Duke On 42nd St Theatre 에는 실제로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비릿함이 감도는 듯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을 정도로 작품은 본격적인 정육점이었다. 이 학살극 사이에 저녁 시간을 배려해 넣은 것이야말로 고약한 유머 감각 같지만, 관객들은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될 2부를 앞두고 생략된 죽음은 없는지 체크하기도 하며 그보다 더 즐거운 저녁 시간도 없을 듯이 식사를 마쳤다.


〈필리다 로이드가 연출한 《Julius Caesar》〉 (출처: All ARTS)


여성만으로 구성된 작품도 처음이 아니다. 영국의 돈마 웨어하우스에서는 2012년에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여성 감옥 배경으로 각색해 등장인물 전원을 여성으로 바꿔 공연해 찬사를 받았다. 이 파격적인 연출은 영화 《맘마 미아!》를 연출한 필리다 로이드다.

국립극장 기획공연 연극 ‘맥베스’ 〈출처: Youtube 국립극장〉   더보기




그런데 이번에 공연된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이 모든 면-정육점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다-을 다 갖추었고 거기에 파격적인 각색까지 합세했다. 여섯 명의 배우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수많은 대사를 객석에 던진다. 그들은 모두 농인이고 그들의 대사인 수화를 모르는 청인 관객은 대사를 분위기로만 짐작해야 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에너지는 그들의 대사를 한 마디도 모른다 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넘쳐 흘렀다. 게다가 청인 관객의 귀에는 네 명의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가 귀에 와서 꽂힌다. 전면 3면을 감싼 스크린에는 가사가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가사의 일러스트가 때로는 비명을 지르고 때로는 죽일 듯이 공격적이다. 소리를 하는 김소진·김율희·이승희·추다혜는 익숙한 판소리 내용을 슬쩍 얹기도 하면서 때로는 완전히 날것같은 단어들을 능숙하게 장단에 얹어 나른다. 내용은 처음부터 싹 다 죽는다.


“페어플레이는 반칙이고, 반칙은 페어플레이다.”


를 가장 먼저 보여주며 시작되는 극은 싹 다 죽고 살아남은 정육점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가족의 장례식날 막, 리, B, M 모두 부모를 잃는다. 사촌이고 자매이고 간에 그들의 부모는 장례식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다 싹 다 죽었고, 살아남은 어른은 그들의 큰엄마인 King 뿐이다. 킹은 정육점을 이어받아 운영하며 조카들을 부린다. 이 정육점의 특이점은 살을 파는 정육점이 아니라 머리를 파는 정육점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들어와 머리가 남아나는 짐승은 없다. 사람을 포함해서.

돼지의 몸에서 머리를 분리해 잘 삶아 파는 게 이 정육점의 일이다. 막과 리는 능숙하게 칼을 다루고 그중에서도 가장 칼을 잘 다루는 이는 막이다. 이 《맥베스》는 오로지 욕망만이 무섭도록 넘실거린다. 원작의 설정 중에 남아있는 것은 막이 왕을 죽인다는 가장 큰 줄기다. 연극은 원작 속 16개의 독백 장면을 선별해 16개의 장면으로 구성했지만 이 작품도 마치 공연 속의 정육점처럼 몸통을 버리고 머리만 선명하게 남겼다.


〈김미란 연출 《맥베스》의 전체 출연진〉 (출처: 국립극장)


막 역의 박지영은 2022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 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으로 여자 연기상 후보에 올랐던 배우다. 장난꾸러기처럼 등장해서 사람의 목을 딴 이후 무섭게 변해가는 연기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박지영을 비롯한 농인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어디에도 신파는 커녕 상냥함조차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배역들은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망령에 씌어 우선 찌르고 보는 그런 인물들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어떻게 각색해도 서양의 냄새를 제거하기 어렵지만 이번 《맥베스》는 다르다. 피바다 속에서 서양의 냄새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피비린내 속에서 나는 서쪽의 향기는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남은 알파벳과 F로 시작되는 서양 욕뿐이다. 《심청가》를 비롯해 민요는 물론 굿거리장단까지 등장하여 기존의 창극과도 분명히 차별되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데, 특히나 돼지머리를 사러 오는 무당이 등장할 때의 굿 소리는 배역과 상황과 찰떡같이 들러붙는다.

국립극장은 한 해에 한 편씩 무장애 공연을 올려왔는데 이 정도까지 발전한 극을 올리면서 단 며칠만 공연하는 것은 공연의 낭비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번 공연은 그간의 공연과는 달리 무대 위에 두 가지 언어가 공존한다. 둘 다 한국어지만 하나는 입으로, 하나는 손으로 발화된다. 그리고 노래가 멈춘 무대 위에서 손을 움직이는 몸을 볼 때, 청인은 비로소 온전히 소통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다. 아마도 농인은 일상에서 늘상 마주쳤을 그런 상황이다. 소리꾼의 중재가 없는 상태로 무대 위의 수화를 보는 이 짧은 순간은 막과 M이 마지막 대결을 하고 난 뒤에 다가온다.


〈《맥베스》의 한 장면. 좌로부터 B역의 오서진, 막을 맡은 박지영, 리를 연기한 김우경〉 (출처: 국립극장)


음주운전 끝에 술 취한 킹을 치고, 친 김에 킹을 죽이기로 한 막은 자매인 리의 도움을 받아 킹을 살해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B마저 내친김에 죽여버린다. 막은 이미 King의 지시로 사람의 목을 딴 이후 눈빛이 바뀐 이후지만, 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다 친자매처럼 같이 일했던 B마저 죽는 꼴을 보자 제정신을 놓는다. 정신을 놓은 리는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무겁고 끔찍할 것만 같은 극에 유머 감각을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M과 막이 대치하는데 조용하고 내성적인 M은 막과 싸우기를 거부한다. 결국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만 공연이 끝난다는 메시지가 뜨자 이 긴장된 상황에서도 웃음이 올라온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미친 눈알의 소유자 막이 M을 몰아붙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M이 총을 꺼내면서 상황을 순식간에 뒤집는다. 살기 위해 M은 막을 쏘지만 결국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자살하면서 모든 등장인물이 무당 한 명만 빼고 다 죽는 전멸극의 길을 걷는다. 모두의 피가 흐르는 이곳에 등장한 것은 King의 딸이다. 애당초 알콜중독자에 탐욕스러운 King이 수고한 조카들을 싹 다 무시하고 이곳의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딸에게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 사단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King이 누군가. 장례식의 피바람에서 형제자매 모두 죽이고 살아남아 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인물이었다. 장례식의 피바람은 데자뷔처럼 다시 재연되고 그의 딸이 살아남아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정육점을 재건할 것이다.


〈《맥베스》의 한 장면〉 (출처: 국립극장)


배우가 소리꾼과 소통하는 방식은 바닥의 LED 바로 이루어졌다. 관객에게 셋트의 일부로 기능했던 LED가 배우와 소리꾼 사이의 소통기구로 영역을 확대했다. 수화가 등장할 때면 청인은 자막을 보고, 소리꾼이 노래를 부를 때면 농인이 자막을 본다. 사실상 모든 관객이 자막을 즐긴다. 이 프로덕션이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달콤하다. 각자 솔로 공연을 매진시키는 소리꾼 네 명이 무대 가장자리에 붙박혀 흥겨운 리듬에 가끔 흔들리며 노래만 부르는 모습도 처음 보는 모습이고,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인사를 소리꾼만 하고 배우들은 죽은 그대로 머무는 모습도 흔치 않다.

작품이 시작될 때 등장했던 문구 “페어플레이는 반칙이고, 반칙은 페어플레이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짐승우리일지도 모른다. 잔인한 욕망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공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배우들을, 그리고 이 작품을 다시 만나고 싶다. 일 년에 단 한 번의 무장애 공연이 아니라 여러 번의 공연을 보고 싶다. 그래야 한다. 피바다를 건너 생명의 바다로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유구국도(琉球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11월 3일~11월 9일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년 5월 4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풍랑을 만나 정신이 아득해지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8월 17일

1632년 8월 17일, 홍호(洪鎬)는 명나라로 향하는 배안에 있었다. 새벽에 광록도를 출발하여 용당을 지날 때였다. 정사의 배와 여타 사행단의 배 두 척도 홍호의 배 뒤를 따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줄기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더니, 새까만 구름이 마치 물에 먹을 풀어놓은 듯하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참혹하고 맹렬해서 홍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뱃사람이 바쁘게 중앙의 돛대에서 돛을 내리고는 뱃머리의 거적을 걷으려는데, 바람이 바다를 말아 올려서 놀란 파도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성난 바람소리가 땅이 꺼지는 소리보다 장렬하게 울렸다. 배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신속히 대척하여 경우 풍랑을 피해 배를 지켜내고 다른 탈은 없었다.

배를 돌려 바람을 따라 30리쯤 가니, 비가 그치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바람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돛을 올리고 다시 길을 가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곧장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삼계도, 해성도란 섬 사이에서 바라보니, 사행단의 두 배는 이미 목적지인 평도에 정박하였고, 뒤따라오던 배들 중 하나도 인근 삼계도에 닻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호는 제수를 준비하여 앞서 거우도와 장산도에서처럼 바다의 용왕에게 제를 올렸다. 애초 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못난 이들의 무식한 처사라 여겼는데, 직접 바다의 풍랑을 겪어보고는 허겁지겁 재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밥이 될 뻔하였단 생각이 들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났다.

“출항하기 전 배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7월 16일

1632년 7월 16일, 홍호(洪鎬)가 탄 배가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출항을 시작하였다.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이에 대한 시호를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홍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신단은 모두 6개의 배에 나누어 탔는데, 홍호는 3호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제 거친 바다를 헤치고 명나라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를 출발하기 전 밤중에 항해 개시를 고하며 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제는 바다의 신과 용왕님에게 제를 올렸다. 제문은 사신단의 일행에 속한 이장배란 자가 지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강과 하천이 돌아가는 곳으로
제사 받는 순번에서도 으뜸에 있으시네
정성으로 현황(玄黃)을 받들어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니
충성과 신뢰에 의지하여
밝은 신에게 이로써 기원하노니
영험한 복을 밝히시어
파도를 거두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가는 길에 편안토록 하소서
시종일관 도와주시길
보잘것없는 제물과 술을 올리니
밝게 임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드넓은 바다는
용왕님의 댁일지니
오가는 배들은
모두 용왕님의 도움을 입은 것
나라님의 예물을 보호하여 가나니
음으로 양으로 도우시길 비옵니다
상어와 악어를 물리쳐 주옵시고
수코래 암코래를 쫓아 주옵소서
아득하고 드넓은 바닷길을 건너가노니
하루도 안돼 천리를 가게끔 하옵소서
감히 조촐한 상을 마련하였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홍호는 제를 지내는 동안 과연 바다신과 용왕님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는 뱃사람들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그가 수십년 동안 공부한 학문에서는 용왕님이나 대해신(大海神) 같은 존재는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다. 바닷길로 사행을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제에 불쑥 끼어들게 되니 다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호보다 상관인 정사나 부사 역시 아무말 없이 제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무사히 사행을 갔다 올 수 있다면 까짓 근본이 없는 믿음이나마 제 한번 지내는 것이 어디 어렵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 제를 지내고 출발해서인지 항해 첫날 날씨는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렀다. 홍호는 처음 만날 명나라의 문물과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하다”

남연군의 묘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渚上日月)』, 미상

1868년 4월, 박득녕은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서양인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였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군기와 양곡을 약취하여 갔다고 한다. 서로 전쟁하는 사이어도 적장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들은 과연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 듯하였다.

이후에 이들 오랑캐들이 운현궁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당신이 산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 무덤을 파려고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뒷날을 기약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서한을 본 대원군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영종도 순찰사가 남연군 도굴단에 참가했던 괴수 두 명을 붙잡아서 참살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큰 경사라 칭찬하였는데, 도굴단의 대표는 서양 오랑캐이거늘 하수인 한 둘을 참살했다 하여 경사라 칭하다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윤 5월이 되자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번에 일어난 덕산군의 참변은 비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 해적을 섬멸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등용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원군의 조치였다. 박득녕은 과연 이러한 전교가 저들 서양 오랑캐를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 서양인들이 점점 조선에서 방종하는 것은 참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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