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여름입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시원함을 찾듯 《웹진 담談》에서도 독자들께 시원함을 선사하기 위해 7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 동안 "특선”을 준비했습니다.7월에는 ‘바다’ 8월에는 ‘귀신’ 그리고 9월에는 ‘토속신앙’을 주제로 잡고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시원하고 때론 서늘하게 풀어볼 것입니다. 유난히 더울 것으로 전망되는 올해 여름, 부디 《웹진 담談》이 흥미로운 시원함으로 독자들께 다가가길 기원합니다.

‘바다’

첫 주제는 ‘바다’입니다. 바다는 피서지(避暑地)란 말 그대로 더위를 피할 시원함을 주는 장소입니다. 또한 바다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양한 의미로 기억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추억과 낭만의 장소일 것이며 드라마 만드는 저에게는 주인공 커플의 첫 키스 공식 장소이자 이별한 사랑을 그리는 눈물의 장소로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과연 우리 선조들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웹진 담談》 이번 호의 여섯개 글과 웹툰에서 다루는 바다는 우리의 기억만큼 그리고 실제 바다만큼 다채로운 모습으로 우리 선조의 바다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때론 아름답게 또는 무섭게 그리고 풍요롭고 신비롭게 그리고 시원하게 기억되고 기록되어있는 선조들의 바다를 하나하나 살펴보시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배에 오른 사람들〉에서는 선조들의 바다를 ‘죽음의 바다’로 기억했습니다. 사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행길이 육지가 아닌 바다를 통하게 되자 죽음을 부르는 死행길이 되어버린 절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된 안경(安璥, 1564~?)이 사행길에서 직접 보고 겪은 바다에 대한 경험담을 『가해조천록(駕海朝天錄)』으로 남겼습니다. 덕분에 저는 안경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내몬 공포 그 자체의 바다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제가 사극 드라마를 만들 때 《웹진 담談》과 “스토리테마파크”를 무수히 많이 참고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지점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단연 특출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안경의 기록처럼 개인들의 생생한 기록들 중심으로 데이터베이스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실제 겪고 직접 쓴 기록들은 그 어떤 창작물보다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합니다. 또한 디테일합니다. 이를 참고하는 것은 가상의 존재인 드라마 캐릭터를 더욱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연기 디테일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안경이 겪은 바다의 경험도 그러합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은 한 배에 타지 말라.
혹시 어떤 배가 불행을 겪더라도 다른 배는 도착할 수 있도록 하라.

-『가해조천록』 5월 17일자 중-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무사히 도착하기 위한 광해군의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은 달리 말해 세 명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출발 전부터 그들의 항해는 죽음을 예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결국 풍랑을 만난 사행 선단, 안경은 그가 겪은 재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에서 떨어진 자들과 떠다니는 시체가 서로 섞여 바다에 가득했다.
뱃전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기어올랐다.
급박하고 절박한 와중에 간신히 8~9척 분량의 방물을 옮겼다.

날이 다시 저물자 가달이 무리 지어 포와 화살을 쏘아댔다.
미처 멀리 피하지도 못했는데 큰비가 또 내리고
천둥과 바람까지 바다를 뒤집어놓으니
뱃사람들은 다리만 동동 구르며 속수무책으로 배가 가라앉는 것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해조천록』 6월 5일자 중-


풍랑을 만난 것뿐만이 아닙니다. 후금에 투항한 명나라 사람들인 ‘가달’의 공격까지 받은 그들의 모습은 처참하기까지 한데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온전한 배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우다 보니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식량을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고, 역풍이 불어 돛은 부러졌으며, 풍토병이 들어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힘들었는데요. 이제 바다는 겨울입니다. 일행은 결국 바다 위에서 큰 파도와 더불어 눈보라까지 맞이합니다. 겨울 바다, 거대한 파도 위에서 맞는 눈보라. 그들이 느꼈을 추위와 공포는 상상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결국 안경은 죽음을 직감하고 ‘절명사(絶命辭)’를 짓기 시작하는데요. 과연 안경과 사행단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바다 생존기가 고스란히 담긴 안경의 글을 통해서 그 결과를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다 거인의 보살핌〉에서는 ‘삼봉도’라 불리던 울릉도에 경차관으로 다녀온 박종원이 겪은 이야기를 통해 ‘무시무시한 바다’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염원과 민간 신앙들을 생생히 담고 있는데요. 그의 경험담은 말 그대로 ‘판타지 모험 드라마’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박종원이 폭풍우에서 만난 ‘이상한 짐승’은 새 같은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몸뚱이에는 날개가 붙어있으며 네 발에는 발굽이 그리고 뱀의 꼬리가 달려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그것을 비렴이라고 불렀고 바람을 부리는 신이라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비렴이 날뛰자 이번에는 바닷속에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거인이 나타나 비렴을 냅다 후려치니 비바람이 멈추었습니다. 비렴은 왜 비바람을 치게 했고 거인은 또 왜 비렴을 물리쳐 박종원 일행을 살려주었을까요? 그것보다 이 이야기는 진짜 있었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바다에 서투른 박종원의 눈에만 보인 환상이었을까요? 그리고 뱃사람들은 왜 항해 전에 그 수많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만 했을까요? 판타지 드라마 같은 박종원의 바다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물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달과 바다를 건너다, 해월헌(海月軒)〉에서는 한 천재 문장가가 지은 정자인 해월헌(海月軒)을 통해 바다와 인간 그리고 그의 인생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어쩌면 바다와 닮은 모습의 삶을 살았던 황여일. 그는 잔잔한 바다를 닮은 소박한 고향에서 자라나, 임진왜란이라는 경량을 겪고, 명나라 사행길이라는 큰 파도를 넘으며, 전후 복구를 책임지는 지방관으로서 바다의 황혼 같은 말년을 보냈습니다.

바다가 그렇게 뒤집히는 거센 파도에도 차거나 준 적이 없고, 달이 저렇게 차고 이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缺損)이 없는 것과 같다. (중략)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高明)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이산해, 『아계유고』 제3권 「해월헌기」


해월헌. 황여일이 만든 정자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온 삶을 빗대어 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다와 같은 군자의 삶을 산 황여일, 그의 인생이라는 파도에서 인간사의 높고 낮은 파고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제주, 콘텐츠의 바람을 타고 바다를 건너다.〉에서는 바다 그 자체인 제주가 콘텐츠의 배경지가 아닌 콘텐츠 그 자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귀중한 모습들을 다양하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독선생전 –그대의 바다 편〉은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 중 청국인이 조선에 표류한 내용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삽시간에 퍼진 표류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던 당시 한양 사람들. 과연 그들은 청국인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요? 웹툰으로 궁금증을 풀어보시길 바랍니다. 〈바다로!〉에서는 그냥 바다가 아니라 피로 낭자한 붉은 피바다의 모습을 언어와 비언어의 이중창으로 독특하게 연출한 작품 《맥베스》를 소개했습니다.

《웹진 담談》 이번 호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바다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을 가진 바다처럼 그들의 기록과 기억은 다채로웠습니다.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기억 속의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합니다.




편집자 소개

김한솔
2004년 KBS에 입사한 공채 30기 PD.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등 드라마를 만들었다. 현재는 KBS에서 독립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시대 특수부대 관련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2017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7년 뉴욕 TV & 필름 페스티벌 작품상 금상, 201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16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그리메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유구국도(琉球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11월 3일~11월 9일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년 5월 4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풍랑을 만나 정신이 아득해지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8월 17일

1632년 8월 17일, 홍호(洪鎬)는 명나라로 향하는 배안에 있었다. 새벽에 광록도를 출발하여 용당을 지날 때였다. 정사의 배와 여타 사행단의 배 두 척도 홍호의 배 뒤를 따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줄기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더니, 새까만 구름이 마치 물에 먹을 풀어놓은 듯하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참혹하고 맹렬해서 홍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뱃사람이 바쁘게 중앙의 돛대에서 돛을 내리고는 뱃머리의 거적을 걷으려는데, 바람이 바다를 말아 올려서 놀란 파도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성난 바람소리가 땅이 꺼지는 소리보다 장렬하게 울렸다. 배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신속히 대척하여 경우 풍랑을 피해 배를 지켜내고 다른 탈은 없었다.

배를 돌려 바람을 따라 30리쯤 가니, 비가 그치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바람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돛을 올리고 다시 길을 가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곧장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삼계도, 해성도란 섬 사이에서 바라보니, 사행단의 두 배는 이미 목적지인 평도에 정박하였고, 뒤따라오던 배들 중 하나도 인근 삼계도에 닻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호는 제수를 준비하여 앞서 거우도와 장산도에서처럼 바다의 용왕에게 제를 올렸다. 애초 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못난 이들의 무식한 처사라 여겼는데, 직접 바다의 풍랑을 겪어보고는 허겁지겁 재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밥이 될 뻔하였단 생각이 들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났다.

“출항하기 전 배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7월 16일

1632년 7월 16일, 홍호(洪鎬)가 탄 배가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출항을 시작하였다.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이에 대한 시호를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홍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신단은 모두 6개의 배에 나누어 탔는데, 홍호는 3호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제 거친 바다를 헤치고 명나라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를 출발하기 전 밤중에 항해 개시를 고하며 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제는 바다의 신과 용왕님에게 제를 올렸다. 제문은 사신단의 일행에 속한 이장배란 자가 지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강과 하천이 돌아가는 곳으로
제사 받는 순번에서도 으뜸에 있으시네
정성으로 현황(玄黃)을 받들어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니
충성과 신뢰에 의지하여
밝은 신에게 이로써 기원하노니
영험한 복을 밝히시어
파도를 거두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가는 길에 편안토록 하소서
시종일관 도와주시길
보잘것없는 제물과 술을 올리니
밝게 임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드넓은 바다는
용왕님의 댁일지니
오가는 배들은
모두 용왕님의 도움을 입은 것
나라님의 예물을 보호하여 가나니
음으로 양으로 도우시길 비옵니다
상어와 악어를 물리쳐 주옵시고
수코래 암코래를 쫓아 주옵소서
아득하고 드넓은 바닷길을 건너가노니
하루도 안돼 천리를 가게끔 하옵소서
감히 조촐한 상을 마련하였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홍호는 제를 지내는 동안 과연 바다신과 용왕님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는 뱃사람들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그가 수십년 동안 공부한 학문에서는 용왕님이나 대해신(大海神) 같은 존재는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다. 바닷길로 사행을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제에 불쑥 끼어들게 되니 다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호보다 상관인 정사나 부사 역시 아무말 없이 제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무사히 사행을 갔다 올 수 있다면 까짓 근본이 없는 믿음이나마 제 한번 지내는 것이 어디 어렵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 제를 지내고 출발해서인지 항해 첫날 날씨는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렀다. 홍호는 처음 만날 명나라의 문물과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하다”

남연군의 묘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渚上日月)』, 미상

1868년 4월, 박득녕은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서양인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였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군기와 양곡을 약취하여 갔다고 한다. 서로 전쟁하는 사이어도 적장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들은 과연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 듯하였다.

이후에 이들 오랑캐들이 운현궁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당신이 산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 무덤을 파려고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뒷날을 기약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서한을 본 대원군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영종도 순찰사가 남연군 도굴단에 참가했던 괴수 두 명을 붙잡아서 참살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큰 경사라 칭찬하였는데, 도굴단의 대표는 서양 오랑캐이거늘 하수인 한 둘을 참살했다 하여 경사라 칭하다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윤 5월이 되자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번에 일어난 덕산군의 참변은 비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 해적을 섬멸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등용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원군의 조치였다. 박득녕은 과연 이러한 전교가 저들 서양 오랑캐를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 서양인들이 점점 조선에서 방종하는 것은 참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