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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달과 바다를 건너다, 해월헌(海月軒)

바다에서


낮 동안에 있었던 나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오면 ‘파도 소리 ASMR’을 검색한다. 고요한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 없이 요동치던 내 마음이 고요해진다. 해변을 향해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시끄러운 일상의 소리를 잠재운다.

초여름의 어느 날, ‘파도 소리 ASMR’만으로는 번잡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영덕에 갔다. 차창 밖의 해송(海松)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주차하기 무섭게 나는 어린아이처럼 뛰었다. 하지만 살랑이던 바닷바람은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바닷바람은 뺨을 때리는 것도 모자라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만들었다.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만져 줄 줄 알았던 바닷바람의 짓궂은 장난에 나도 악을 쓰며 대거리를 했다. 가슴 속에 차오른 울분이 파도 소리에 묻혀 거품과 함께 흩날렸다.

인정사정없는 바닷바람 탓인지 눈부신 바다의 윤슬 탓인지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바다를 향해 섰다. 발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바람과 파도에 몸이 휘청거렸다. 인력(引力)이 가장 큰 보름날, 달이 바다를 끌어당기듯 바다가 나를 잡아당겼다. 이대로 계속 서 있으면 바다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아 황급히 눈을 뜨고 해변으로 올라왔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한 귀퉁이를 바닷속에 던져두고 ‘바다뷰’ 카페를 찾아 울진으로 차를 몰았다.


〈울진 망양정 앞 바다〉


창가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소금빵을 먹으며 두고 온 바다를 바라봤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그지없이 평화롭다. 좀 전까지 바닷바람에 어질했던 것을 잊고 이런 풍광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카페 사장님을 부러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588년 10월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울진군 기성면에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다. 33세의 나이에 바다뷰 정자라니, 옛사람 황여일이 부럽다.


〈울진 해월헌〉




잔물결 위에 서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하여 지구에서 달을 전혀 볼 수 없는 시점을 ‘삭’이라 한다.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도 삭을 만나면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린다.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삭’과 같다.

1556년(명종 11) 10월 21일 황여일은 평해(平海) 사동리(沙洞里)에서 장예원 판결사에 추증된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평해,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이다.

8세부터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1524~1605)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황응청은 평생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인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산해는 "어찌하여 산수가 아름답고 기름지며 넓은 곳을 택해 살지 않고, 지세가 낮고 비좁으며 토양이 척박한 곳에 사는가?"라고 황응청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자라고 이곳에서 늙었소. 시내가 비록 맑지는 못하나 내가 아이 적에 때로 낚시하던 곳이고 산이 비록 기이하지는 않으나 내가 아이 적에 때로 노닐었던 곳이며, 거처가 비록 누추하나 무릎을 용납할 만하고 밭이 비록 척박하나 경작하여 먹고 지낼 만하오. 채소 뿌리와 나물국이 내 입에는 달고 낡은 옷과 짧은 갈옷이 내 몸에는 편하여, 남에게 구함이 없이 내 스스로 만족하니, 그저 이렇게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좋소. 달리 어디로 가겠소.”

이산해,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정명촌기(正明村記)」


자신의 고향과 일상을 사랑하며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던 황응청에게 황여일은 자랑스러운 조카였다. 황여일은 13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독파했으며 14세인 1569년(선조 2) 간성(杆城)의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다. 황여일은 죽서루를 지나며 벽에 「제진주죽서루(題眞珠竹西樓)」 시를 써 놓았는데, 당시 강릉의 지방관이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 수소문해 저자인 황여일을 찾고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75년(선조 8) 20세, 황여일은 의성김씨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의 따님과 혼인하면서 학봉가(鶴峯家)와 인연을 맺었다. 그해 가을에 열린 안동 향시에서 그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가 끝나기 직전에 일필휘지로 「치술령부(鵄述嶺賦)」를 지어 올리고 시험장을 나왔다. 시관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에 놀라 장원으로 발탁했다. 「치술령부」는 신라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지은 글이다.

1577년(선조 10) 22세, 황여일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와 교류하였다. 1585(선조 18)년 30세, 그는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586년(선조 19) 31세, 그는 안동 예안[宣城]에 가서 퇴계 이황의 유고(遺稿)를 편집했다. 이후로도 그는 『퇴계집』의 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88년(선조 21) 33세, 황여일은 평해로 돌아와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 등등 수많은 인사(人士)들이 해월헌에 대한 시와 글을 남겼다. 그중 해월헌 편액과 「해월헌기(海月軒記)」를 쓴 아계 이산해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산해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선조의 의주 파천을 주도했다가 탄핵 되어 평해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평해에서 3년간 지내며 황여일의 부친인 황응징과 중부인 황응청과 교류했다.


〈해월헌 편액〉


황여일과 이산해의 인연은 앞서 언급한 별시 문과 시험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시험관 좌주(座主)였던 이산해와 과거 응시생이었던 황여일은 만나기는 했으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594년(선조 27) 여름, 형조 정랑이 된 황여일이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왔다가 평해에 있는 이산해를 찾아갔다. 그 인연으로 이산해는 그해 가을, 「해월헌(海月軒)」 시를 짓고, 1603년(선조 36)에 황여일의 요청으로 「해월헌기」를 지었다.

오직 군자는 혼탁한 시속(時俗) 가운데 섞이어도 심지(心志)는 더욱 고결하고, 급박한 환난의 즈음에 처해서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여, 부귀에도 흔들리지 않고 빈천에도 옮겨지지 않으며 위무(威武)에도 굽히지 않는 것이 마치 바다가 그렇게 뒤집히는 거센 파도에도 차거나 준 적이 없고, 달이 저렇게 차고 이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缺損)이 없는 것과 같다. (중략)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高明)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이산해, 『아계유고』 제3권 「해월헌기」


이산해는 ‘해월헌’이라 하는 누정(樓亭) 이름에 주목하여 바다와 달에 내재한 이치를 심도 있게 탐구했다. 그는 바다와 달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했다. 기문의 서두에서 ‘천하 만물 중에 본래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은 드물다고 하며 강철과 돌, 산봉우리와 하천 등 강하고 단단하며 높고 깊은 사물들도 모두 본체를 잃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다는 많은 물을 받아들이고 내어주면서도 그 양이 늘거나 줄지 않고, 달 또한 이지러지거나 차고, 가려지거나 먹히는 때가 있어도 그 빛은 오히려 새로운 느낌을 준다고 하며, 바다와 달은 본체를 잃지 않는 사물이라 했다. 그는 외부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강철과 돌, 산봉우리와 하천에 비유하고, 꾸준한 수양을 통해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군자의 마음을 바다와 달에 비유했다.


〈해월헌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황여일은 잔잔한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평화로운 삶을 산 듯이 보인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역량은 그에게 여러 번의 장원을 안겨주었다. 1776년에 간행된 『해월선생집(海月先生集)』의 교감(校勘)을 맡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해월선생집서(海月先生集序)」에서 ‘황여일의 문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 커서 경계를 알 수 없고, 시 또한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입으로 읊조리면 문장을 이루어서 오산 차전로와 백호 임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라고 그의 문학을 높이 평가했다. 황여일의 학문과 관직 생활이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워 보이는 것은 그의 숨은 노력과 함께 스승 황응청의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황여일은 “지극한 가르침 내가 모방하기 어려운데, 산은 높고 바다는 맑구나[至訓吾難倣 山高與海澄]”라고 하며 스승의 가르침과 경지를 산과 바다에 비유하며 칭송했다.




거센 파도를 넘다


보름달이 뜨면 바다는 다시 거친 항해를 시작하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 황여일은 임진왜란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거침없는 항해를 이어갔다. 전쟁 속에서 그는 나라와 가족이 내내 무사하기를 소망하며, 군자의 마음으로 국난 극복을 위해 애썼다.

뛰어난 문장가인 황여일은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592(선조 25)년 37세, 황여일은 함경도 고산 지역의 역로와 역마, 통행 등을 관리하는 고산도 찰방이 되었다. 왜적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까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수들은 갑옷을 벗었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도망쳤다. 황여일은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 1537~1599)에게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 적이 철령(鐵嶺)을 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권유했지만 유영립은 듣지 않았다. 그때의 일에 대해 『선조실록』은 ‘유영립은 방백(方伯)의 신분으로 적 왜(倭)가 영(嶺)을 넘자 겁먹고 도망쳐 도(道)를 궤멸시켰고, 적에게 잡혀 구금되었다가 도망쳐 국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그를 파직한다’고 기록했다. 이후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황여일은 그의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전공을 세웠다.

1594(선조 27) 39세, 황여일은 명나라 장수 이영춘(李榮春)에게 화전[火戰, 화약으로 만든 총포를 이용한 전투]을 배워 기록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에게 보고했다. 그해 황여일은 도원수 만취당(晩翠堂) 권율(權慄, 1537~1599)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권율은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萬)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文武)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황여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선조에게 주청했다.

1597년(선조 30) 6월 6일,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 황여일은 이제 막 초계에 도착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게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렸다. 6월 10일 저녁, 황여일은 권율의 막하(幕下)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된 이순신을 찾았다. 그날의 만남에 대해 이순신은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이야기하자 감탄해 마지않았다. 또 그는 산성에 험준한 요새를 쌓지 않았다고 한탄하며, 당장 토벌과 방비의 대책이 허술한 데 대해서 말하면서 밤이 깊은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했다. 그 후 황여일은 이순신의 안부를 묻고 도원수 권율과의 일을 전달하는 등 여러 차례 이순신과 소통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황 종사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라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두 달간 이어진 이들의 짧은 만남은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元均, 1540~1597)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해 8월,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끝이 났다. 이순신은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대파했으나,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왜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황여일과 이순신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은 7년 동안 지속되던 임진왜란이 마무리 되어가던 중 예기치 못한 ‘무고(誣告) 사건’에 휘말렸다.

‘왜노(倭奴)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천조(天朝)를 침략함으로써 요하(遼河) 동쪽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기에, 신은 놀라움과 괴이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해동기략(海東紀略)』은 조선이 왜(倭)와 교제한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중략) 해마다 왜선(倭船)을 통하여 무역(貿易)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혹은 조선의 쌀과 콩을 받기도 하였으며 (중략)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중국을 가볍게 업신여긴 지가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선조실록』 104권,
「찬획 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의 주본(奏本) 내용의 진위를 밝히도록 지시하다」


명나라 찬획 주사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고구려 옛 땅인 요동을 되찾으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 상소로 양호(楊鎬)와 마귀(麻貴), 형개(邢玠) 등이 탄핵당했다. 이보다 앞서 정응태는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 우첨도어사(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인 명나라 장수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는데, 조선의 분음(汾陰) 최천건(崔天健, 1538~1617)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등이 양호를 변호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정응태가 조선을 명 황제에게 무고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 놓인 조선은 정응태의 무고를 벗기 위해 7월과 8월, 10월 세 차례에 걸쳐 명에 사신을 보냈다.

1598년(선조 31) 10월 21일에 명나라로 사행을 떠난 정사(正使)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서장관 황여일은 1599년(선조 32) 4월 25일 사행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 사신단은 명나라에서 정한 사행길을 따라 해로가 아닌 요동과 산해관을 거치는 육로를 통해 이동했다. 서장관 황여일은 변무 사행의 과정을 기록한 『은사록(銀槎錄)』을 남겼다.

靑石盤盤白日陰     굽이굽이 청석령은 한낮에도 어둡고
層氷矗矗雪霜深     층층이 쌓인 얼음 눈과 서리가 두껍네
逢人盡道摧車地     사람 만나 수레 부순 땅을 실컷 말하니
笑我還催叱馭心     우스워라 다시 마부 꾸짖는 마음 일어나네
許國此身甘蹈火     나라 위한 이 몸 기꺼이 불 속에 뛰어들어
燒城讒舌痛銷金     성을 불태우는 참설 통렬하게 금을 녹이네
何須問識山靈未     어찌 알았으랴, 산령이 이문하지 않았음을
踏遍中華免陸沉     중화를 두루 다녀 육침을 면하였네


『은사록』에 실려 있는 「청석령(靑石嶺)」은 12월 11일, 사행단이 고개가 좁아 험하고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청석령을 지나며 쓴 작품이다. 황여일은 수레를 부술 만큼 험난한 청석령이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가겠다는 충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정응태가 함부로 놀린 참설을 제거하겠다는 황여일의 굳은 마음이 ‘감도화(甘蹈火)’에 함축적으로 녹아있다.

황여일은 종사관과 서장관이 되어 임진왜란의 거센 파도를 넘었다.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웠고, 정응태의 무고를 변무(辨誣)하여 명나라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 꽉 찬 그의 삶은 만월(滿月)처럼 빛났다.




평온의 바다를 건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했던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여전히 빛을 내는 하현달처럼 사람과의 관계든 일이든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진 적이 있는 사람은 저물어 가는 모습도 아름답다. 황여일의 남은 삶은 평온했을까, 아니면 폭풍 속이었을까?

1601년(선조 34) 46세, 황여일은 예천 군수를 제수받았는데, 이때부터 주로 외직을 역임했다. 1606년(선조 39) 51세, 명 황제는 황손(皇孫)의 탄생을 기념하여 조선에 조칙을 내렸다. 정사(正使)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예과 좌급사(禮科左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조칙을 갖고 왔다. 이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使臣) 일행을 접대했는데, 이때 황여일은 이들과 함께 한강을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1615년(광해 7) 60세에 황여일은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당시 동래는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주거 안정을 급선무로 여겨 전쟁에 불타 버린 곳을 깨끗이 씻어내고, 지붕을 이었다. 또한 학문하는 선비를 찾아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고 훈도(訓導)를 맡겼다. 백성들의 집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경비는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충당했다.

1618년(광해 10) 63세, 황여일은 동래 부사에서 체직되어 고향인 평해로 귀향했다. 그는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부르며 약 33년간의 관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9월, 통정대부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전경〉


1622년(광해 14) 4월 2일, 황여일은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라 하며, ‘집을 잘 돌보는 것이 내가 깊이 기원하는 바다’라는 유훈을 남기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운명하였으니, 향년 67세였다. 이후 황여일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에 증직(贈職) 되었다.

전쟁 후, 지방관으로 사는 삶은 녹록지 않다. 무너진 담장을 고치고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쓴 지방관 황여일의 삶을 단 몇 줄로 요약한 것이 죄스럽다. 그저 관직에서 물러난 그가 만귀헌이라 고쳐 부르고 머물렀던 ‘해월헌’에서 평온했기를, 그믐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바다와 달 같이


황여일은 과거 급제 후 예문관 검열, 봉교, 사헌부 감찰, 형조와 병조의 정랑, 승문원 교리 등 중앙 관직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이후 예천 군수, 영천 군수, 창원 부사, 동래 부사 등 경상도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등 내·외직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으며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문학지사로 참여하는 등 외교 사절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가 머물렀던 ‘해월헌’은 그가 떠난 후에도 조선의 ‘핫플레이스’였다. 독립운동가였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은 ‘듣자하니 당년에 고래가 어망에 들었으니, 긴 밤 봉황 우는 듯한 퉁소 소리를 견디기 어렵다오[聞說當年鯨入網 不堪遙夜鳳吹簫]’라고 하며 300년 전 국난의 시기를 보낸 황여일을 기억했다.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물러났음을 ‘고래가 그물에 들었다’로 표현하여 일제강점기에 놓인 지금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대문〉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제주에서 추쇄경차관으로 재직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하다 어느 섬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최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 우리는 낯선 섬에 놓여있는 최부가 아닐까? 우리는 인생의 키를 잡고 항해하지만 때때로 파도에 휩쓸려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곤 한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쓰러져 절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군자의 마음으로 살진 못해도 가득 차거나 줄어든 적이 없는 바다와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는 달처럼 우리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더보기
3.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더보기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5.김동완 지음, 『경북의 팔경구곡』, 한국국학진흥원, 2023.
6.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임진년 아침이 밝아 오다, 난중일기』, 서해문집, 2020.
7. 권희선, 「海月軒 黃汝一의 『銀槎錄』 硏究」, 『東方漢文學』, 동방한문학회, 2015.
8. 이남면, 「경북 울진의 해월헌 시문에 대한 연구」, 『大東漢文學』, 대동한문학회, 2021.
9. 이성형, 「海月 黃汝一의 修學期 漢詩에 대한 考察」, 『Journal of Korean Culture』, 고려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술확산연구소, 2017.
10. 김동완, 「[조선충절실록]14. 절세의 문장으로 명황제를 설득한 문장가 황여일(黃汝一)」, 경북일보, 2023년 10월 23일 월요일 기사.
11. 권진호, 유튜브 ‘[유교현판이야기]14편, 울진 해월헌’, 한국국학진흥원, 2018년. (https://www.youtube.com/watch?v=uxoJkWbgA-Y) 더보기
“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유구국도(琉球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년 11월 3일~11월 9일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년 5월 4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풍랑을 만나 정신이 아득해지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8월 17일

1632년 8월 17일, 홍호(洪鎬)는 명나라로 향하는 배안에 있었다. 새벽에 광록도를 출발하여 용당을 지날 때였다. 정사의 배와 여타 사행단의 배 두 척도 홍호의 배 뒤를 따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줄기 거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더니, 새까만 구름이 마치 물에 먹을 풀어놓은 듯하고 빗줄기가 장대처럼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참혹하고 맹렬해서 홍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뱃사람이 바쁘게 중앙의 돛대에서 돛을 내리고는 뱃머리의 거적을 걷으려는데, 바람이 바다를 말아 올려서 놀란 파도가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성난 바람소리가 땅이 꺼지는 소리보다 장렬하게 울렸다. 배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신속히 대척하여 경우 풍랑을 피해 배를 지켜내고 다른 탈은 없었다.

배를 돌려 바람을 따라 30리쯤 가니, 비가 그치고 구름은 흩어졌으며 바람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돛을 올리고 다시 길을 가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곧장 맑게 개는 것이 아닌가. 삼계도, 해성도란 섬 사이에서 바라보니, 사행단의 두 배는 이미 목적지인 평도에 정박하였고, 뒤따라오던 배들 중 하나도 인근 삼계도에 닻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호는 제수를 준비하여 앞서 거우도와 장산도에서처럼 바다의 용왕에게 제를 올렸다. 애초 재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는 못난 이들의 무식한 처사라 여겼는데, 직접 바다의 풍랑을 겪어보고는 허겁지겁 재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밥이 될 뻔하였단 생각이 들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났다.

“출항하기 전 배와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홍호, 『조천일기』, 1632년 7월 16일

1632년 7월 16일, 홍호(洪鎬)가 탄 배가 드디어 명나라를 향해 출항을 시작하였다.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원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 이에 대한 시호를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홍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신단은 모두 6개의 배에 나누어 탔는데, 홍호는 3호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제 거친 바다를 헤치고 명나라까지 긴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배를 출발하기 전 밤중에 항해 개시를 고하며 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어제는 바다의 신과 용왕님에게 제를 올렸다. 제문은 사신단의 일행에 속한 이장배란 자가 지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강과 하천이 돌아가는 곳으로
제사 받는 순번에서도 으뜸에 있으시네
정성으로 현황(玄黃)을 받들어
저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니
충성과 신뢰에 의지하여
밝은 신에게 이로써 기원하노니
영험한 복을 밝히시어
파도를 거두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가는 길에 편안토록 하소서
시종일관 도와주시길
보잘것없는 제물과 술을 올리니
밝게 임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드넓은 바다는
용왕님의 댁일지니
오가는 배들은
모두 용왕님의 도움을 입은 것
나라님의 예물을 보호하여 가나니
음으로 양으로 도우시길 비옵니다
상어와 악어를 물리쳐 주옵시고
수코래 암코래를 쫓아 주옵소서
아득하고 드넓은 바닷길을 건너가노니
하루도 안돼 천리를 가게끔 하옵소서
감히 조촐한 상을 마련하였사오니
흠향하여 주옵소서.

홍호는 제를 지내는 동안 과연 바다신과 용왕님이란 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리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는 뱃사람들이 다소 신기해 보였다. 그가 수십년 동안 공부한 학문에서는 용왕님이나 대해신(大海神) 같은 존재는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다. 바닷길로 사행을 가게 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제에 불쑥 끼어들게 되니 다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홍호보다 상관인 정사나 부사 역시 아무말 없이 제를 지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무사히 사행을 갔다 올 수 있다면 까짓 근본이 없는 믿음이나마 제 한번 지내는 것이 어디 어렵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막 제를 지내고 출발해서인지 항해 첫날 날씨는 맑고 바다는 더없이 푸르렀다. 홍호는 처음 만날 명나라의 문물과 풍경을 생각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하다”

남연군의 묘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渚上日月)』, 미상

1868년 4월, 박득녕은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을 접했다. 서양인들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날 충청남도 덕산에 상륙하여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였는데,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다만 군기와 양곡을 약취하여 갔다고 한다. 서로 전쟁하는 사이어도 적장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들은 과연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 듯하였다.

이후에 이들 오랑캐들이 운현궁에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당신이 산 사람을 살해한 것보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아버지 무덤을 파려고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뒷날을 기약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서한을 본 대원군의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영종도 순찰사가 남연군 도굴단에 참가했던 괴수 두 명을 붙잡아서 참살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큰 경사라 칭찬하였는데, 도굴단의 대표는 서양 오랑캐이거늘 하수인 한 둘을 참살했다 하여 경사라 칭하다니,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윤 5월이 되자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번에 일어난 덕산군의 참변은 비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 해적을 섬멸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등용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원군의 조치였다. 박득녕은 과연 이러한 전교가 저들 서양 오랑캐를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 서양인들이 점점 조선에서 방종하는 것은 참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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