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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통(通)하게 하고, 마음은 안정되게 한의학적 해설을 덧붙여

“마늘을 먹으세요.(吃大蒜)”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汉)에 정체 모를 전염병(코로나-19)이 돌고 초기 방역에 실패하여 사태가 심각해지던 1월 하순 즈음, 중국 정부에서는 SARS 때 활약했던 중의학 전문가들을 우한 지역에 파견하였다. 그 전문가들은 현지 환자들 일부를 진찰하고서 병의 정황을 파악한 뒤 전반적인 진료방안을 도출하였다. 이는 입원 환자들 대상으로 한약을 처방하는 지침이 되었고, 실제 현장에서는 병상에 입원해 있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면서 한약을 병용투여하고 있다.


출처_네이버 지식백과


현장에 파견되었던 통샤오린(仝小林) 원사(院士; 중국 과학기술계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급 호칭)는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 네 가지를 제시하였다. 뜸 치료에 대해 언급을 하였고, 한약재 몇 가지로 만들 수 있는 차 레시피를 소개하였으며,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중성약(中成药; 간편한 제제로 만들어진 한약)을 적은 용량으로 복용하도록 하였다. 그와 더불어 추천한 방법이 마늘을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SARS 때에도 누적된 경험이니 병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모두 복용해도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혹자는 이런 방안을 낮은 의료 수준이라 격하시키기도 하고 가짜뉴스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방을 위한 다른 추천안들도 더불어 신뢰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국가적 차원의 진료방안 도출에 참여했던 중의학계의 고위급 인사가 추천한 방안이기에 그렇게만 취급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 정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참고자료 보기)  더보기

조선의 역병 정책 : 서적의 간행과 반포


잠시 조선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시대에도 역병이 유행했다는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중종 19~20년간에는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대략 7천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유교정치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죽어가게 만드는 역병은 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왕조가 역병에 대응했던 사례 한 가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새로 초록(抄錄)한 ‘벽온방(辟瘟方)’을 정원(政院)에 내리며 전교하였다.
“이 방서(方書)에 약명(藥名)이 매우 많으니, 전례에 따라 언해(諺解)하여 박아 내도록 하라. 다만 박아 내기를 기다리면 늦을 듯하니, 우선 베껴서 역병을 물리치는 약과 함께 함경도·평안도 등에 내려 보내라. 또, 벽온방을 박아 낼 때에 색승지(色承旨)를 시켜 편말(篇末)에 수미(首尾)를 약서(略序)하여 후세에서 어느 때에 지은 것인지를 알게 하라. 전에 《벽온방(辟瘟方)》이 있었으니, 이것은 《속벽온방(續辟瘟方)》이라 이름지어야 하겠다.”

『중종실록(中宗實錄)』52권(중종 20년 1월 23일 기사)에서   더보기

‘벽온방(辟瘟方)’이라는 서적을 간행하여 배포하되 당장 시급하니 필사해서라도 배포토록 했다는 부분에 주목해보자. 실제 간행하여 배포한 것은 100여일 뒤의 일이었기에 당장 필사해서 보낼 만큼 긴요한 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책 따위가 뭐길래 왕명까지 내려가며 반포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하다. 그 의문은 조선의 다른 역병 대책을 살펴볼 때 다소 해소될 것이다.

벽온방 [辟瘟方] : 온역이란 급성열성전염병(急性熱性傳染病)에 가까운 질환으로 오늘날의 전염성질환 또는
급성유행성전염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의서는 그 뒤 여러 가지가 간행되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시대에는 여제(厲祭)와 같은 국가의례를 정기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역병이 돌면 의관을 파견하고 약재를 보냈으며, 구휼대책, 시신 매장 등의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사실 중종 19년 여름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의원(醫員)을 파견하였으나 사망자가 줄기는커녕 피해 지역이 더 넓어졌던 것을 보면 그 정도의 시책으로는 역병을 잠재우기에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역병 대책의 다른 일환으로써 ‘벽온방’을 간행하도록 명한 것으로 보인다.

벽온방’의 간행은 중종대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세종대에도 《벽온방(辟瘟方)》을 언해(諺解)하여 간행하였고 그 전통을 이어 《속벽온방(續辟瘟方)》 역시 언해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당시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라는 방대한 서적에서 역병에 활용할 수 있는 치법을 뽑은 것이다. 즉 당시 활용할 수 있는 최신 의학지식에 기반한 정보를 민간에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엮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서적의 간행과 반포는 당시 시행할 수 있던 상당히 적극적인 수준의 방역 정책이었다 평가할 만하다.


역병의 치료 지식 : 주술부터 전문 의약까지


《속벽온방》에 기재된 지식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실록에 등장하는 《속벽온방》은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이라는 판본으로 온전히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역병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염될 수 있으니 미리 약을 먹어 예방할 것을 권고하면서 치료와 예방에 활용할 수 있는 약들을 수록하고 있다. 심지어 집안에 역병 환자가 생길 경우 그의 옷을 깨끗이 빨고 시루에 찌면 전염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기도 하였다.

《간이벽온방》 전반부에 수록된 소합향원(蘇合香元), 향소산(香蘇散), 십신탕(十神湯),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과 같은 처방은 10여 가지 이내의 한약재로 구성되어 현대에도 활용되는 처방으로서 당시 기준으로는 전문 의약품 정도에 해당하였을 것이다. 사실 한약을 활용한 치료는 현대의 의약품처럼 새로운 병원성 물질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각종 증상들을 해소함으로써 인체가 병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는 데에 비중을 둔다. 따라서 위의 처방들을 분석해보건대, 역병을 앓으면서 나타났을 발열, 호흡기 증상, 발진, 혼수 등의 증상을 완화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_약선도가


그런데 이런 전문 처방들을 수록해놓고선 또 다른 방법들을 연달아 제시하였다. 예컨대 팥을 담갔다가 먹는 방법, 동치미 국물을 마시는 방법, 오신(五辛;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 채소)을 초하룻날 먹는 방법, 솔잎을 술에 타서 먹는 방법 등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음식들을 활용한 방법들을 수록한 것이다. 전문 처방과 비교하면 다소 엉성한 내용이지만 각각의 약성(藥性)을 고려해볼 때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해설하자면 역병에 수반되는 발열, 설사, 소화불량 등의 증상을 완화해줄 수 있는 처치이다. 다만 음식으로 활용되는 소재들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약 만큼의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사진_권민수(한국국학진흥원)


그런데 이밖에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방안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역병을 앓는 집안에 방문할 때 ‘차(次)’자를 손에 쓰고 움켜쥐는 방법, 새벽에 마음속으로 사해신(四海神)의 이름을 21번 생각하는 방법 등이다. 추측컨대 주술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반포된 지식의 수준이라고 놓고 보면 앞의 내용들과 큰 괴리가 있다. 하지만 국가의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던 시기이기에 이런 내용들조차 당시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심적으로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신앙적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요컨대 이러한 책 속의 지식 중 의료인들을 위한 전문 지식, 민간에서 대처할 수 있는 간단한 방안, 주술적 행위들은 각각을 필요로 하는 독자층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문 지식으로 대비되는 처방들은 약재 수급이 부족할 경우 활용성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차선의 간단한 방안들이 더 널리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왕명으로 내려온 서적의 지식이기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신뢰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소통과 공포 : 흘러가게 둘 것인가 틀어막을 것인가


조선시대에 왕명으로 간행된 ‘벽온방’은 《간이벽온방》 외에도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벽역신방(辟疫神方)》, 《벽온신방(辟瘟新方)》 등 다수의 서적이 전해지고 있다. 각각의 서적을 살펴보면 겹치는 방안들도 있고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한 방안들도 있다. 앞서 언급한 전문 처방들을 비롯하여 각종 벽온방에 활용된 전문 처방들의 계통을 살펴보면 체표로 땀을 내보내는 약, 내부의 불균형을 조화하는 약, 대소변이 막힌 것을 내려 보내는 약, 탁하게 뭉친 것을 흩어주는 약, 울체된 열을 식히는 약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역병의 증상이 단순하지 않은데다가 병정(病程)에 따라 각기 다른 치법을 활용하는 한의학적 입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약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거칠더라도 이 약들을 포괄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어를 꼽자면 ‘소통(疏通)’ 정도가 있겠다.(글의 논지 상 필자가 선택한 단어로서, 실제 임상에서는 소통이라는 원칙으로 단순하게 치료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일러둔다.)

병을 앓더라도 땀이 잘 나고 소화가 잘 되고 대소변이 잘 나가서 체내의 기운이 울체되지 않으면 피해가 최소화되면서 시일이 지난 뒤에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증상의 완화를 통해 병을 극복한다는 원칙과 같은 맥락이며, 현대에 한약으로 감기를 비롯한 각종 감염병을 치료할 때에도 대체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다.

이와 반대되는 병리를 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공포’이다. 한의학에서는 감정이 인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시각이 밑바탕에 있고, 다양한 감정이 인체에 일으키는 영향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공포’라는 감정이 심해지면 인체의 원천이 되는 기운이 물러나고 위아래가 막힘으로써 기운이 잘 다니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한다.(恐則精却, 却則上焦閉, 閉則氣還, 還則下焦脹, 故氣不行矣.) 비유하자면 외부의 적을 두려워한 왕이 성 깊숙이 숨고 모든 문을 닫아버렸더니 그로 인해 백성들이 들고 나지 못해 괴롭게 된다는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미지의 위협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인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통과는 정 반대의 대응이 된다. ‘소통’하여 이 국면을 완만하게 넘어가도록 하는 치법에 수긍한다면 이 ‘공포’는 없애거나 완화해야 할 대표적인 감정인 셈이다.

‘벽온방’의 간행과 반포는 의료 인력과 물자가 닿지 못하는 곳에 중앙의 의료 지식이 닿게 한 것이다. 임금이 역병을 두려워하여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행정적 조치 또한 중앙과 지방의 ‘소통’이라 볼 수 있겠다. 비록 그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행정적 ‘소통’을 통해 백성들 스스로 인체의 기운을 ‘소통’시키는 방안을 활용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소통’을 방해하는 ‘공포’를 안정시킨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한 지역의 ‘마늘을 먹으라’는 권고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병상이 부족해서 집에서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외출도 극히 제한되고 각종 약품의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권위 있는 전문가가 제안한 활용성 높은 방안은 한 줄기의 빛과 같았을 것이다. 사실 마늘에는 차갑고 습한 요인으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병을 치료하고 소화를 돕는 효능이 있다.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는데다가 약재보다는 식재료에 가깝기 때문에 약으로써의 효과를 기대할 정도는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소통’의 맥락에서 보면 코로나-19의 초기에 속이 답답한 증상이 나타날 경우 그것을 완화시켜줌으로써 병을 완만하게 앓도록 보조해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별다른 수단이 없어 공포에 떨던 사람들에게는 이 전문가의 견해와 약리적 효과가 더욱 시너지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마무리하며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새로운 감염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진 만큼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민간요법을 추천하는 것은 결코 완결한 해결책일 수 없고, 우한과 같은 특수상황에서나 예외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뿐이다. 현 시점에서 방역과 위생이 최선의 대책임은 틀림이 없다. 다만 예방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과 세계 각국에서 이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는 현상이 대중들에게는 불안과 공포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그 불안과 공포를 완화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방역 당국과 지자체가 조선의 역병 대책에 드러난 ‘소통’‘공포의 안정화’라는 원칙에서 지혜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병을 전적으로 막거나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약 치료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려보길 고대해본다.

참고자료 : http://akomnews.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38497    더보기




집필자 소개

글_김상현
김상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 瘟疫學의 탄생과 특징 -동아시아 의학사의 관점으로 본->으로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한의학연구원에 재직중이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고문헌 및 한의학 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주로 한의 고문헌 번역과 이론 관련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오?”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동생을 살린 미담이 전해지다”

박한광, 박득녕, 박주대, 박면진,
박희수, 박영래, 저상일월,
1922-05-15~

1922년 5월 15일, 박면진은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소식을 들었다. 경주의 각산 마을에 박종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 화상을 입고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 박종필이란 사람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아우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괴이한 사고와 인륜을 저버린 이야기들만 가득한 세상이었는데, 그야말로 인륜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한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박면진 뿐만이 아니었는지, 벌써 사람들은 시를 지어 이 박종필이란 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박면진은 소리 내어 이 시를 암송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개자추는
허벅지를 베어서
임금님의 굶주린 배를 채워드렸고
지금의 박종필은
살을 깎아
앉은뱅이 아우를 일으켰네
그 임금과 신하에게는
의리가 소중하였고
이 형과 아우에게는
우애가 돈독하였네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말하지 마라
저 하늘처럼
끝없이 빛나리라

“권문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7-07-01~1587-08-09

1587년 7월 1일, 권문해는 관아에 나아가 일을 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3년 전 맞이한 두 번째 부인 함양 박씨가 몹시 아팠기 때문이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독기가 몰려 구부렸다 폈다 하지를 못하였다. 이날은 아내에게 냉약(冷藥)을 쓰고, 또 침을 써서 터뜨렸다. 권문해는 다음날에도 관아에 나아가 잠시 공부를 수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곁을 지켰다. 그 다음날도 권문해는 오한과 발열과 함께 고통을 참아내는 아내 옆을 지키며 간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아내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가는 권문해는 칠곡에 사는 품관 이함(李諴)이 부종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청해오도록 하였다.
7월 12일, 이함이 궁중에서 파견된 약재 검사관 이운영과 함께 왔다. 이함과 이운영은 아내의 병을 습사(濕邪)로 인하여 온몸이 붓는 것 같다며, 부종에 효험이 있다는 곳을 찾아 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권문해는 아내를 데리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서도 말하길 ‘혈종이 아니고 습종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함양 박씨의 무릎에 침을 놓아 피를 빼고, 대강활산(大羌活散)을 지어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내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찌르는 듯 한 통증을 참는 아내를 보는 권문해의 마음도 찢어졌다. 권문해는 수소문한 끝에 문경에 사는 내금위 진곤(陣崑)이 부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내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

김광계, 매원일기, 1626-10-18

1626년 10월 18일, 김광계는 밤까지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누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바깥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드리더니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와 누구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는 곧이어 중문까지 열어젖혔다. 김광계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침입자는 곧장 김광계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김광계는 한참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오랜 친구 이지형이었다. 본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즐기고 술자리도 가지며 절친하게 사귀던 사이였으나, 1623년 이지형이 그만 풍증(風症)이라 불리는 정신질환 증세를 나타내면서 왕래가 끊긴 지 이미 몇 년째였다. 정신질환의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 시기 정신질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가족에 의해 감금되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형 역시 집안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었는데 어쩌다 틈을 타 탈출해서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 친구의 집까지 용케 찾아왔던 것이다.

“김령을 만나 서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16-05-07~1616-05-10

1616년 5월 7일, 전염병을 피해 가족들을 천남(川南)으로 피신시켜 놓고 김광계는 며칠 전 능동재사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막내아우 이직(以直)이 설사 증세까지 생겼다고 해서 몹시 걱정을 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로 가 보았다. 그러나 마을은 전염병 기운이 여전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노산(蘆山) 재종조부 집에 가서 약재를 얻어 들여보내기만 한 후 답답한 마음에 그길로 설월당(雪月堂)으로 향했다. 김령 재종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재종숙 김령은 지난 1월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만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을 챙기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월당에 도착해보니 덕여(德輿) 형 형제와 김참(金墋) 아재, 이일도(李逸道), 임지경(任之敬), 이의적(李義迪)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수재 전치(全偫)도 있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4-06~1616-08-12

1616년 4월 6일, 이행이 정임수와 함께 왔다. 정임수에게서 아들 김적의 천식약인 담박호(痰剝蒿)를 구했는데 찾아서 온 것이다.
5월 15일, 이날 저녁 김택룡이 큰 아들 김숙이 산양으로 출발했다. 동생 김적의 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6월 20일, 아침 무렵 중소(重紹)가 산양(山陽)에서 와서 김택룡은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편지를 보니 아들의 병이 여전해서 김택룡은 걱정이 깊어졌다. 춘궁기가 이어져서 곡식이 모자란 터라 김택룡은 아들 김적에게 곡식을 나누어 보냈다.
7월 24일, 산양에 사는 아들 김적의 병이 중해서 그 집의 노비인 임인이 왔다. 김택룡은 부랴부랴 의원에 부탁해 무명 한 필 반으로 약을 지어 임인이 돌아가는 편에 보냈다. 김택룡이 들으니 산양의 아들 편지가 영주[榮川(영천)]의 산장(山庄)으로 왔다고 하는데, 산장에서 잊어버리고 자신 쪽으로 전해주지 않고 있었다. 김택룡은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 몰라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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