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문자의 나라 조선의 문해력

문해력(文解力)?


‘문해력(文解力)’.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과거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문맹(文盲)’이라고 하였다. 최근 들어 의무교육의 시행으로 문맹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글을 읽고 이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문해력이 중요해졌다. 각종 매체에서도 문해력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신의 문해력〕, 2021(출처: EBS)


올해(2021년) 3월 교육방송(EBS)에서는 문해력과 관련된 〔당신의 문해력〕을 6부작으로 방영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프로그램 방영 전에 성인을 대상으로 문해력의 수준을 테스트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풀도록 하였다. 다음은 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상품 광고 중에는 소비자의 (    )을/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상품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드러내지 않는 ‘티저 광고’가 있다. 티저(teaser)는 ‘감질나게 하다. 애를 태우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tease에서 나온 말이다.

(    )안에 들어갈 말로 적절한 것은?                     답 : 호기심

주어진 지문을 꼼꼼하게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성인 883명을 대상으로 한 성인 문해력 테스트 결과 11점(만점)은 0.5%였고, 2문제를 맞히지 못한 사람도 6%였다. 설문에 참여한 사람 중 50%에 해당하는 사람이 7문제 이상을 맞혔다. 필자는 그중 8문제를 맞혔다. 테스트에 제시된 문제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의 50%에 해당하는 사람이 5문제 이상을 풀지 못하였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시행된 문해력 관련 설문조사도 흥미로웠다. ‘글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72.6%의 응답자가 ‘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문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무려 87.9%의 응답자가 필요하다고 답변하였다. 물론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문해력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 국민의 문해력 수준은 어떨까?


우리 국민의 문해력 수준은 어떨까?


얼마 전 국가문해교육센터에서는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를 발표하였다. 18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문해능력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 능력 및 활용단계에 따라 4단계(수준 1 ~ 수준 4)로 구분하였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해 능력이 부족하여 교육이 필요한 대상은 수준 1~3이다. 이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만 18세 이상의 성인 가운데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가 어려운 비문해 성인(수준 1)은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체 성인의 약 4.5%에 해당하는 국민이 기본적인 읽기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공공 및 경제생활 등 복잡한 일상생활에 활용이 미흡한 수준까지 포함하면 약 889만 명이나 된다. 18~29세 연령의 경우도 4.6%가 문해 교육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청소년들의 문해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EBS에서 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문해력을 평가한 결과 중3의 적정수준에 미치지 못한 아이들의 비율이 27%였으며, 이 중 11%는 초등학생 수준의 문해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다. OECD의 ‘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보고서김나영, 「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교육정책포럼』 제338호, 교육정책네트워크, 2021. https://blog.naver.com/edpolicy/222496831847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읽기 영역에서는 OECD의 37개 회원국 중 5위에 해당하지만,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역량을 측정하는 문항의 경우 OECD의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25.6%의 정답률을 보였다. 위의 두 사례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을 잘 설명해준다.


현대인의 과반수, “문해력 부족으로 업무상 어려움 느꼈다”(출처: 전자신문, 2021.09.14)


국민은 자신의 문해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설문조사가 최근에 발표되었다.「현대인의 과반수, “문해력 부족으로 업무상 어려움 느꼈다”」, 전자신문, 2021.09.14. https://www.etnews.com/20210914000045 설문조사의 결과 비교적 내용이 길고 전문용어가 많은 비즈니스 문서를 읽을 때 어려움을 느끼는 응답자가 절반(‘대부분 느낀다’ 6.3%, ‘종종 느낀다’ 44.5%)이 넘었다. 이 중 ‘자신의 문해력이 학창시절 보다 낮아졌다’고 보는 응답자는 무려 89%로 열 명 중 아홉 명이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평가하였다. 그럼 왜 낮아졌을까. 제일 많은 답변은 ‘메신저, SNS활용으로 단조로워진 언어생활’(95.4%)었고, ‘독서 부족’(93%), ‘유튜브 영상 시청 증가’(82.1%), ‘장문의 글읽기가 힘듦’(67.7%), ‘한문공부 부족’(36.7%)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읽고 쓰는 기본적인 언어생활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어 문해력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정보 습득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문해력의 감소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문자의 시대였던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조선시대는 문해력은 둘째치고 문맹율이 굉장히 높았다. 공용 언어인 한문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언문 즉,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문해력을 논의할 수 있는 집단은 지식인 집단인 양반들이었다. 조선시대에 기본적으로 문해력은 양반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이었지만 그렇지 못해 문제가 된 경우가 있었다.

글을 모르는 자가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1633년 안동 선비 김령(金坽)은 상주로 과거를 보러 갔던 생질 김설(金偰)에게서 과거 시험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시험관은 김효건(金孝建), 참시관은 고성 현령인 최욱(崔煜), 유곡 찰방 이흥발(李興浡)이었다. 문제는 김효건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글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흥발은 글을 외울 줄만 알고, 문리(文理)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최욱 역시 글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험을 주관하는 이들조차 글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시험의 결과를 어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계암일록(溪巖日錄)』 6)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영남의 제1인’으로 평가받던 김령의 눈에 세 사람의 학문이 못 미칠 수도 있었지만, 세 사람의 문해력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특히 과거에 합격한 관리를 보고 글을 몰랐다고 평가하였으니 지나친 듯하다. 이흥발을 두고 문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는데, ‘문리의 이해’가 요즘으로 치면 문해력이다. 후세에 문해력이 부족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으니, 세 사람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조정의 관리들마저 글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의 상황은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당시에도 문해력이 부족한 경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에게 글을 제대로 이해하느냐는 자신의 평판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조선 선비들에게 글공부는 매우 중요하였다. 새해 첫날의 덕담도 공부하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하와일록(河窩日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선비 류의목(柳懿睦)은 새해 첫날 집안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갔는데, 덕담과 함께 꾸중을 들었다. 숙부들이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라고 격려하면서도,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꾸중하였다. 종이와 먹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하지 않았던 류의목에게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하와일록(河窩日錄)』)


새해 첫날부터 글 짓는 공부 안하다고 혼났으니 류의목의 마음이 어땠을까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글을 짓고, 쓰는 일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읽고, 이해하고, 쓰는 과정을 두루 했다. 이는 자녀 교육에도 해당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자녀 교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자식의 글공부를 위해서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금난수(琴蘭秀)는 막내아들의 글공부를 위해 『강목』을 베껴 써서 주었으며, 조선말의 학자인 남붕(南鵬)의 집안에서는 아들 남원모(南元模)가 직접 쓴 『천자문』을 가지고 그의 아들과 손자가 대를 이어가며 공부하기도 하였다. 자녀 교육을 위해 직접 책을 베끼고, 대를 이어서 그 책을 가지고 공부하였으니 시대를 막론하고 자녀 교육에는 진심인 조선의 선비들이었다.

남붕의 증손자 진시가 6살 때 무더위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남붕은 어린 증손자를 감독하고 권면해서 공부를 방기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글씨 쓰기와 우리나라 현인들의 문자를 읽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손자의 글씨 쓰는 솜씨가 나아지자 자랑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돈 형의 생신에 선물로 손자의 글씨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6살 손자에게 ‘축수(祝壽)’를 쓰게 하니, 어린아이가 조그마한 손으로 붓을 쥐고 정성을 다해 베껴 썼다. 남붕은 어린아이가 쓴 글의 필획이 매우 굳세어 장래에 희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흐뭇해하였다.(『해주일록(海洲日錄)』)


(출처: 픽사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앞서 남원모가 직접 쓴 『천자문』을 가지고 공부한 그의 손자 남진시이다. 아들이 직접 쓴 『천자문』을 가지고 공부하던 증손자의 글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남붕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남붕의 집안뿐만 아니라 조선의 양반 집에서는 읽고, 쓰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요즘으로 치면 문해력 강화 교육이 이루어졌다. 글을 읽고, 짓고, 쓰는 과정을 통해 문해력을 증진시켰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문해력이 필요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교육의 대상은 점점 확대되었고, 여성에게 글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물론 조선시대 일부 양반 여성과 기생들이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으나, 대다수 여성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한문을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었다. 이에 글을 익혀 세상을 살 수 있도록 공부를 시키자는 것이었다. 김대락(金大洛)은 『백하일기(白下日記)』에서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과 10여 년 전에 서울에 여학당이 세워지자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고 안동의 양반들이 탄식한 것과 비교하면 놀랄만한 진전이다. 김대락은 안동 내앞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한일병합 이후 이상룡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간도에서 이주민들의 경제적 문제와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2년 만주의 긴 겨울밤이 시작되던 11월의 밤. 김대락은 떠나온 조선의 잘못된 교육풍습을 떠올린다. 조선은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심해 조상의 이름도 한자로 구별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태반이었는데, 김대락은 이를 탄식하였다. 조선은 여자들이 한문과 한글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 없어 여자들에게는 진서, 즉 한문이 아닌 한글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집안의 여자들도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생각에 한문을 배우지 않았다.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았던 당시 조선의 풍습에 대해 김대락은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를 모두 잘하는지 문자를 아는지로 구별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녀딸에게 중요한 글자 천자를 직접 써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손녀가 재주가 있어 가르침을 잘 기억하여 김대락을 기쁘게 하였다. 김대락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 바뀐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손녀딸을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실천에 옮겼다.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글을 이해하는 능력, 곧 문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요즘 문해력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인 『중용』에는 공부하는 방법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을 거론하였다. 즉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별하고, 그 뒤에 독실하게 행하라는 것이다.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이 5가지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중용』의 글처럼 책을 읽는다면 문해력은 자연스럽게 향상되지 않을까.

문해력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며칠 전 추석을 앞두고 한학을 하시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몇 잔의 술이 오가고 난 뒤 선생님께서 노기 띤 목소리로 세태를 탄식하셨다. 요즘 신문을 읽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서 신문을 읽기 위해서는 사전이나 검색을 해야 할 정도라며 걱정을 하셨다. 줄임말이나 외래어가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다수 신문이 글자를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득해진 현실이다. 문해력이 중요해진 만큼 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집필자 소개

맹영일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한국한문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글쓰기센터에서 초빙교수로 글쓰기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