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이 질문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사람의 활동을 통해 구현되는데, 그러한 활동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 활동이다. 직업은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필요조건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직(職)도 없고 업(業)도 없는 삶이라면 온전한 인생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며,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그저 밥만 축내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걱정해야 하지는 않을까? 이처럼 사람은 직업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직업으로 산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업은 ‘직(職)’과 ‘업(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 활동인 ‘생업(生業)’일 뿐만 아니라 보람 있는 사회적 명분의 수행 역할인 ‘직분(職分)’이기도 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처럼, 직업은 일차적으로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생업이다. 생계와 무관한 활동은 봉사나 취미일 뿐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직업은 먹고사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직분을 통해 긍지와 보람을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하는 수단과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직업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자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생업의 생계유지와 직분의 보람에 따라 직업을 크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나누었다. 실제로 맹자(孟子)는 몸뚱이를 써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육체노동자[勞力者]’인 소인(小人)과 마음을 써서 공적 의리를 실천하는 ‘정신노동자[勞心者]’인 군자(君子)로 직업군을 분류하고, 군자는 정치적 교화의 주체로서 사회를 다스리고, 소인은 경제적 부양의 주체로서 군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하였다(『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 맹자는 몸과 마음에 대응하는 소인과 군자라는 주체, 경제와 정치의 영역으로 직업군을 분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이라는 생계 안정의 토대 위에서 ‘항심(恒心)’이라는 정신적 가치의 실현이 이루어진다는 경제적 민생 안정의 토대를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요건의 변화나 사적 이익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익의 사회적 조화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항심을 유지할 수 있는 선비[士大夫]의 사회적 가치도 강조하였다(『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 이를 통해 우리는 생계유지를 위한 생업의 기반인 항산이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항심은 인간다운 가치를 실현하는 문화생활의 충분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 초상화
나아가 직업은 먹고사는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사람들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회적 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율하여 조화를 이루는 정치적 영역을 아우르면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면서 불안정한 직업 활동으로 인해 열악한 처지로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의 기능도 담당했다. 예컨대, 정조(正祖)는 1776년 설날에 내린 윤음(綸音)에서 『맹자』의 사상을 확장하여 “생업을 풍부하게 하고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로서 직업 활동의 지원, 세금의 완화, 교육과 복지의 토대 구축 등의 사회적 기반 조성 등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의 기본적 생계유지와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는 ‘보양(保養)’을 정책 기조로 역설한 바 있다(『일성록(日省錄)』, 정조 2년 무술(戊戌, 1778)년 1월 1일). 조선에서 실행되었던 향약과 계가 상하(上下)가 함께 공동 생존을 위한 상부상조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위에서 공동선을 함께 추구하고 바람직한 호혜적 관계를 구성하려고 했던 것도 호혜적인 직업의 가치사슬 구축에 기여하였다.
이런 호혜적 정신 아래 조선시대에는 민생과 생업을 위해 생필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필수적인 활동과 연관된 기본적인 직업들을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사민(四民)의 체계로 구성하였으며, 이 4종은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의 생산과 전승, 농업 노동, 공업 기술, 상업 유통 등을 담당하였다. 이에 비해 분뇨를 처리하는 사람들이나 기근이나 질병으로 죽은 시신을 묻어주는 매골승(埋骨僧)처럼 사회적으로 꺼리는 일을 수행하는 직업도 있었고,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나 여성들의 머리 타래를 만드는 머리장식 디자이너인 가체장(加髢匠)처럼 문화·예술적 욕망을 채워주는 직업도 있었는데, 이처럼 잡일[雜事]을 담당하는 잡직(雜職)의 직업군은 사민에 비해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으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김홍도, 〈담배썰기〉 중 전기수의 모습(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족, 양반, 중인, 하인, 천민의 사회적 계급에 따라 직업 선택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처럼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직업적 배려도 잊지 않았다. 예컨대, 중인(中人)들은 문과(文科)에 지원할 수 없었으며, 외국어 통역에 종사하는 역관(譯官)이나 병을 치료하는 의원(醫員)처럼 전문 기술직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 선택의 자유 제한의 이면에는 특정한 사람들의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효과도 일부 있었다. 예컨대,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지니게 되었던 세종(世宗) 대왕이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을 위한 관현맹인(管絃盲人) 제도를 마련하고 시각장애인을 선발하여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등을 담당했던 서운관(書雲觀)에서 교육시켜 운명을 점치는 전문직으로 선발했던 명과학(命課學) 제도를 운영한 사례 등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직업적 배려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러한 직업의 구분이 선천적 신분과 연계되어 상하의 사회적 차별 질서를 구축한 점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문제가 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유교적 가르침을 우주와 인간을 포괄하는 보편적 지식 체계인 ‘대도(大道)’로 설정하여 대도를 익히는 직업군을 최상위로 삼았으며, 농사, 군사, 의료, 지술, 점복 등 특정 영역에서 현실적 효용성이 있는 특수 전문 지식을 ‘소도(小道)’로서 대도의 아래에 두었다. 이는 특수한 전문 직업군보다 보편적 인문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더 높은 대접을 받았던 상황은 요새 의대와 공대를 중심으로 하는 이과가 문과를 압도하는 상황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전문지식과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직업관의 변화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예컨대, 박세당(朴世堂)은 정신 노동하는 양반과 육체 노동하는 상민의 차별을 타파하고 벼슬에 나아가면 관리이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농부라고 역설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사농일치(士農一致)’의 실천을 보여주었다. 이는 군자와 소인, 양반과 야인의 구분이 사회적 명분에 따른 기능적 분화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양반과 일반 백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황에 따라 상호 이동이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중환(李重煥)도 『택리지(擇里志)』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능력과 상황에 따라 직업의 이동과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유수원(柳壽垣)도 『우서(迂書)』에서 불평등한 직업의 세습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실질적인 노력과 성과에 따른 사회적 인정과 보상과 함께 직업 선택의 자유와 자율적 활동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민의 상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사민일치(四民一致)’의 이상을 통해 직업간 차별을 철폐하고 직업의 효과적 분업과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직업 생태계의 가치사슬(value chain)을 구축하려고 했다.
서계 박세당 초상(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보편적이고 종합적인 선비의 사회 운영 능력을 숭상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직업에서는 개별적이고 전문적인 소인의 실무 능력이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다. 르네상스적 교양인이 아니라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스펙을 쌓기 위해 노오오~력!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기착취를 했던 결과는 ‘열정 페이(pay)’와 ‘헬(Hell) 조선’의 쓰린 맛을 보게 되었고, 현재의 MZ세대들은 일과 생활의 균형과 조화를 꿈꾸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추구하거나, 돈 받은 만큼만 일하고 그 이상의 초과근무는 사양하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을 실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생계유지의 ‘생존’을 넘어서 자아실현의 ‘생활’을 통해 일하는 보람이나 미래의 전망을 꿈꾸지 못한 결과다. 그러다 보니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정글에서 자기를 챙기느라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와 사회적 배려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받는 만큼만 일할래요”… MZ 직장인들 ‘조용한 사직’의 이유는?
(출처: KBS뉴스 2022.09.14. https://www.youtube.com/)
이러한 변화는 오래된 미래를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첫째, 직업은 경제적 생존의 바탕 위에서 일하는 보람은 물론 개인적 취향의 향유나 자아실현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논어(論語)』, 「옹야(雍也)」).”고 했던 공자(孔子)의 표현처럼, 미래의 직업은 전문적 지식과 기술의 습득과 구현을 넘어서서 개인적 취향의 향유와 자아실현의 즐거움과 유기적으로 연계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할 것이다. 둘째, 미래의 직업에서는 근대가 강화했던 분석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그러한 개별 지식들을 꿰뚫고 연결하는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지혜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는 소인의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넘어서서 군자의 창의적인 종합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제4차 산업혁명의 기술 혁신에 따른 일자리의 안정성 약화와 직업 생태계의 격변은 조선시대 ‘보양’의 전통이 선보였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안전망 기능을 고려한 직업의 사회적 가치사슬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요컨대, 직업의 세계는 생업의 생계유지와 직분의 가치 실현을 아우르면서 보람과 즐거움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균형 있는 행복의 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격변하는 직업 생태계의 현재적 맥락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통해 오래된 미래를 전망하는 성찰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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