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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9성에 대한
조선 시대 지식인의 인식

윤관과 여진정벌


윤관(尹瓘, 1040∼1111)은 고려 숙종 예종대에 주로 활동했던 문신으로서 본관은 파평이다. 삼한공신 신달의 후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윤집형(尹執衡)의 아들이다. 윤관은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어 숙종(肅宗) 즉위 후에는 좌사낭중(左司郎中), 이부상서(吏部尙書),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 등 여러 요직에서 활동하였다.

현종(顯宗) 대에 거란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고려는 서북방면 진출을 포기하고 동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고려가 동여진을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부터였는데 이로 인해 여진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숙종대에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완안부 여진이 등장함으로서 동북방의 영역을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즉 완안부와의 갈등이 숙종·예종대의 여진정벌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윤관 영정〉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종 2년에 윤관은 별무반을 편성하여 완안부 여진을 소탕하였다. 이때 윤관은 이 지역을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9성을 설치하여 동북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인을 축출하고 남도 주민을 이주시켰다. 이로써 고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질서의 수립 뿐 아니라 영토확장을 통한 농경지 획득이라는 경제적인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무력항쟁을 계속하는 한편, 9성만 돌려준다면 자손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간청했다. 여진의 공세와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인한 불만이 제기되면서 고려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어 예종은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윤관의 여진정벌은 9성을 설치했다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으나 17만이라는 군사가 동원됨으로서 많은 인원과 물자가 소요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자 윤관은 패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1110년(예종 5)에 복직되었다.

윤관이 9성 수축 과정에서 기존 거주하던 여진인을 축출하고 남쪽의 고려민을 사민시킨 사건은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여진인조차 반감을 가지고 완안부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윤관은 그들이 고려국의 백성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서 고려와 여진과의 분쟁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여진정벌 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그러나 9성을 돌려줌으로서 고려는 동북지방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건국이래 추진해 온 고구려 고토회복이란 과업수행을 통한 북진정책도 좌절되고 말았다. 또한 9성 반환은 대외적으로는 완안부 세력의 발흥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진추장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 것은 고려가 9성을 철수한 지 불과 6년만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관이 9성을 반납한지 2년 만에 죽었다는 사실은 9성 반환에 대한 분노와 울화를 참지못해 병이 생긴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에 따라 예종 후반기는 9성의 설치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윤관 또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관원들의 입장에서는 윤관세력의 대두를 견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9성을 계기로 다시 전쟁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9성을 반환한지 불과 6년 후, 여진이 더욱 강성해져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게 형제관계에 이어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고려정부는 9성 반환이 실책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윤관과 9성에 대한 재평가는 고려 말에 이르러서 이루어졌다. 북원을 패퇴시킨 명이 철령위 설치 방침을 전달하자 고려는 이에 반발하여 함주에서 공험진까지는 윤관이 9성을 쌓은 고려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요동정벌을 계획했다.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했지만 윤관의 9성은 동북지역이 고려의 것이었음을 주장할 때 고려가 내세울 수 있는 주요한 명제였다.




윤관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평가


조선시대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은 태종(太宗)부터 보인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과 권근(權近, 1352~1409)으로 하여금 윤관 비의 존재를 규명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남만주의 건주 지역에 사는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하여 건주위를 설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세종(世宗) 때는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을 파견하여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을 모두 평정하고 4군을 완성하였으며, 김종서(金宗瑞, 1383~1453)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6진을 개척하였다. 4군과 6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세종은 윤관으로 인해 동북지방의 경계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면서 공험진(公嶮鎭)의 위치 규명과 비문을 조사하게 하였다.

김종서는 윤관이 여진족을 포용한 것이 아니라 섬멸의 대상으로 보았고, 그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9성 반환에 이르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9성을 쌓음으로서 우리와 여진족 간의 경계를 분명히 한 것은 윤관의 공이라고 하면서 윤관에 빗대어 6진4군 개척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단종(端宗) 대에는 고려왕조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단종은 고려국왕과 더불어 고려의 공신·충신·명장 등을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배현경(裵玄慶, ?~936), 신숭겸(申崇謙, ?~927), 유금필(庾黔弼, ?~941), 서희(徐熙, 942~998), 강감찬(姜邯贊, 948~1031),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등과 함께 윤관이 포함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윤관의 업적이 조선이 여진족과 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성종(成宗) 대에는 명이 여진의 건주위 정벌을 계획하며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는데, 윤관의 9성은 출병에 반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당시 금이 우리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윤관이 9성을 쌓은 선춘령으로 경계로 삼아 고려를 침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위(曺偉, 1454~1503)는 윤관의 9성 반납은 군수가 부족하여 여진족을 이길 수가 없었던 이유를 들어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여진족을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조선 중기의 관원들도 그들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윤관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조선 후기에도 계속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견해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선조(宣祖)는 무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으로 과거의 명장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였다. 고려 시대 인물로는 최영(崔瑛, ?~?)과 강감찬, 박서(朴犀, ?~?), 정세운(鄭世雲, ?~1362)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고구려에 대한 재인식으로 북방 영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9성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 되었다.

공험진은 윤관이 동북 변경 갈라전 지역에 성을 쌓고 비를 세워 경계로 삼은 곳이다. 『高麗史』 지리지는 공험진의 선춘령이 입비(立碑) 지점이라고 하였다. 『世宗實錄地理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은 선춘령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공험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9성 범위는 홍원-이성 사이, 선춘령은 마천-마운령, 立碑處는 마운령으로 보았다. 유형원 신경준 한진서 정약용은 9성은 길주 이남이며 공험진의 입비처도 길주 이내에 있다고 하였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9성이 길주, 공험진은 明川의 永平山 古城이라고 명시했다.

9성의 두만강 이북설은 허목 등 17세기 후반 지식인에게서 시작하여 이익(李瀷, 1681~1763), 이종휘(李種徽, 1731~1797)에게 계승되어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선춘령이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같은 9성 위치 비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1712년(숙종 38) 청과 조약을 맺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후 지내게 된 백두산 제(祭)와 관련이 있었다. 영조(英祖)는 백두산을 왕실의 발상지로 인식하고 적당한 위치에 제단을 설치해 망사(望祀)를 지내게 했다. 이는 북방지역과 영역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어 영토의식의 확대를 가져왔다.


백두산정계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여기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익의 견해를 살펴보자. 이익은 윤관의 비가 두만강 북쪽 7백리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윤관이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조선시대 김종서가 영역을 축소시켜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하였으며 백두산 정계비 또한 국경선을 고정시켜 예전에 비해 북방영역이 축소되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이익은 두만강 북쪽에 윤관 비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미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지금은 우리 영토인 폐사군(廢四郡)도 외적의 침범으로 모두 사민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모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고 하여 청과의 분쟁을 더욱 우려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면서 윤관이 다시 부각되었다. 러시아는 1858년(철종 9) 청과 아이훈 조약을 통해 흑룡강 이북의 영토를 획득하였으며, 이어 1860년(철종 11)에는 북경조약으로 우수리강 이북 연해주 지방을 획득하면서 조선과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시기 부동항을 물색하였는데, 그 중에는 함경남도 영흥만이 유력한 대상지였다. 조선 정부는 동북지역을 개척했던 윤관 등을 부각시켜 내부단속을 통해 당시 조선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매개체로 활용했다.




북방 진출의 명분


윤관에 대한 평가는 동북 지역 개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 예종 대에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설치했으나 결과적으로 9성이 반환됨으로써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종 대에 가서 금의 고려에 대한 군신 관계 요구는 9성 반환에 대한 반성을 가져와 그는 예종의 묘정에 배향될 수 있었다. 이후 9성에 대한 재평가는 고려 말에 거론되었다.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고려는 윤관이 9성을 쌓은 고려의 영토임을 강조하며 요동 정벌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결국 9성은 동북 지역이 고려의 것이었음을 주장할 때 내세울 수 있는 주요한 명제였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에 4군과 6진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윤관의 9성이 국경 획정(劃定)의 나침반으로 사용되었다. 성종 대에 명이 여진의 건주위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자 양성지는 금이 고려를 침입하지 않은 것은 윤관이 9성을 쌓은 선춘령이 경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출병을 반대하였으며, 조위 또한 9성을 반납한 것은 윤관 탓이 아니라 군수품이 부족하여 여진족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를 들어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여진족을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윤관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9성 위치 비정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부터 북방영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영토 의식의 확대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9성의 경계선을 한백겸, 한진서, 정약용, 김정호 등은 길주 이남으로 보았다. 반면 허목, 이익, 이종휘는 두만강 이북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두만강 이북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구려·발해 이래 윤관의 9성 영역은 고려가 북방으로 진출한 가장 넓은 영역이었다. 이것이 조선 시대에 와서 북방진출 의지와 더불어 윤관이 영토개척의 화두로서 계속 거론되는 이유였다. 윤관과 9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맥락 속에서 계승 변용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집필자 소개

이정신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고려대학교에서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 천민항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고려 무신정권기 농민천민항쟁연구』, 『고려 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고려 시대의 특수행정구역 소 연구』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고려 시대 경주민의 항쟁과 제사」, 「충선왕의 요동회복의지와 고려왕 심왕의 분리임명」, 「고려 후기의 역관」, 「고려 후기 입성론과 국왕의 역할」, 「공민왕의 죽음과 국내외정세」 외 다수가 있다.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 (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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