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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빼앗긴 나라 찾으러 노구를 이끌고
이역만리로 떠나다

정명섭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자신이 평생 살았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아파트와 마트, 편의점과 빨래방이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백여 년 전에 타의로 이 땅을 떠나 춥고 황량한 만주로 떠나야 했다는 것은 쉽게 결심하지도, 실행에 옮기기도 어려운 문제였을 게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일가족과 함께 이역만리 만주와 간도로 향하는 일을 감행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울분 하나만 가지고 머나먼 길을 떠난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어찌 보면 허황되고 성마른 결심을 품은 채 말이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이끌 정도로 명망이 있었던 유림 김대락(金大洛)은 1911년 1월,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간도로 향한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고향을 떠나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간도(間島)라는 낯선 지역에 대한 두려움이나 일본 경찰의 감시, 그리고 무엇보다 60대 중반이라는 나이조차 김대락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안동을 떠나 경성에 머물던 그는 남대문 역에서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한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여건 때문에 고생은 조선을 떠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는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는 그의 고집은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는 천신만고 끝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향한다.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찾겠다는 마음과 먼저 떠난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가 쓴 <백하일기(白下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국경 감시가 심해지고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조치가 취해져 강을 건너지 못하고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낭패였다. 손자사위와 서로 바라보며 걱정과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아들을 찾지 못했고, 날은 이미 저물었다. -「도강(渡江) 전날 아들을 찾아」,

<백하일기(白下日記)>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이주한인들 ⓒ독립기념관


간도에 도착한 이후에도 고생은 계속된다. 엄청난 추위에 시달리면서 낯선 곳에 있다는 압박감이 늙고 노쇠한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다른 나라에 별다른 정보도 없이 건너갔으니 얼마나 긴장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설상가상으로 애초에 정착지로 점찍은 통화시 유화현(柳花縣)을 답사하는 것도 중국 관헌들의 방해로 힘들어지고 말았다. 김대락은 백하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낯선 땅에서 겪는 참담한 상황을 지극히 담담하게 남겨 놨다. 하지만 도착 직후 임신 중이던 손자며느리가 출산을 하자 만주 땅을 호령했던 고주몽의 이름을 따서 일몽(馹蒙)이라고 지으면서 몹시 행복해했다. 고단한 망명 생활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김대락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찡해온다. 겨우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그는 낡은 집에 머물면서 한숨을 돌린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08 ~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민회의 후원으로 세워진 민족학교 신흥강습소 때문이었다.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서 항일운동을 지속시키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인재를 키우기 위해 만든 학교로 이동녕(李東寧)과 이회영(李會榮) 등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었다. 김대락은 손자와 조카들이 신흥강습소를 다니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간도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변발을 하고 중국옷을 입는 것을 보고는 우리의 것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고민을 한다. 동료이자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는 이상룡이 중국 관헌을 만나기 위해 중국옷을 입고 변발을 한 것을 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세상이 오면 원래의 모습을 돌아가자는 결의를 다진다. 복고주의적이던 그는 간도에서 마주친 낯선 문명에 대한 거부감도 드러낸다.

백하일기에는 주변의 추천으로 간 예수교 교당에서 참석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처신하기가 곤란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이 겪은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 대체로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했지만 이때는 특별히 후회가 밀려왔다는 표현까지 쓴 것을 보면 단순히 자리가 불편했던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는 예수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가 전통적인 성리학자이자 유림이라는 사실은 백하일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12년 정월, 북경에서 온 신문을 보면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정부가 들어선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면서 맹자가 한 얘기를 읊조린다.

어진 자는 백성과 함께 농사짓고, 손수 밭을 지어 먹는다(賢者與民幷耕而食, 饔飱而治)


만주 서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이 지은 농산물을 추수하는 모습만주 서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이 지은 농산물을 추수하는 모습 ⓒ독립기념관


김대락 역시 군주제가 유지되는 것이 자신의 희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유학자로 살아온 그로서는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봉건제의 몰락을 지켜보며 허망하고 허탈했을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김대락은 신흥강습소와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의 운영에 온 힘을 기울인다. 안동에서 알아주는 양반 집안이었지만 유하현에서는 가족들이 머물 집조차 제대로 짓지 못할 정도로 곤궁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저항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앞서 간도로 온 이회영을 만나 회포를 풀고 앞날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츰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여성들에게도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고향땅을 등지고 떠날 정도로 꼬장꼬장한 성격에 환갑을 넘긴 나이를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다. 사실 김대락은 완고하게 전통을 고수하자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다. 간도로 떠나기 전인 1907년 고향인 안동에서 혁신유림 활동을 펼친 류인식(柳寅植)을 후원해서 신식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곳에서 교사와 교감을 지낸 김동삼의 애국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해서 자신의 사랑채를 교실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협동학교는 안동 유림들에게 큰 비난을 받고 의병들에게도 습격을 당하는 상황이었지만 김대락은 개의치 않고 도움을 준 것이다.


협동학교로 사용된 김대락의 사랑채협동학교로 사용된 김대락의 사랑채 ⓒ문화재청


1907년도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1907년도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


비록 군주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교라는 낯선 종교에 거부감을 느끼긴 했지만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이다. 김대락은 내친 김에 손녀에게 한문을 가르쳤는데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습득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했다. 일평생을 임금이 있고 유교가 생활의 전부였던 시대를 살았던 그가 느지막한 나이에 공화정을 이해하고, 여성의 교육에 눈을 떴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새로운 시대 어딘가에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조국이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김대락, 군주제 종식을 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01-02 ~

분노와 좌절의 한글 시, 분통가


김대락은 안동 출신의 양반답게 자유자재로 시를 썼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한글로 가사를 짓기도 했다. 백하일기에는 그가 쓴 분통가가 남아있다. 글자 그대로 일본의 침략에 망한 조선의 운명에 분노를 느끼며 쓴 것이다. 186행에 이르는 긴 내용에는 글자 그대로 일본의 침략에 관한 분노와 좌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일 앞부분에는 김대락이 생각하는 침략의 부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금주고 그 술 가져다가 조상 제향한단 말인가
집세주고 텃세주고 그 터전에 산단 말인가
독약 같은 은사금을 재물이라 받으란 말인가


어쩌면 김대락은 이런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기 위해 고향 안동을 떠나 머나먼 간도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의 가혹한 삶에 무릎 꿇지 않고 계속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분통가를 지은 그의 마음은 신흥강습소를 다니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그리고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 되는 이상룡에게 이어졌으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자리를 버리고 일가족과 함께 간도로 온 이회영과 이동녕에게 전해졌다. 백하일기에는 김대락이 겪었던 고난에 찬 간도에서의 삶과 애환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런 역경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독립운동가의 길이 보인다.


분통가를 짓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09-27 ~

멀고 먼 타국에서 꿈꾸던 세상


1911년에 시작된 김대락의 간도 망명생활은 1914년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망명을 했을 때 이미 60대 후반이었고, 삼화현에 자리 잡기까지 온갖 고생을 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사실 김대락은 간도로 망명한 이후 이회영이나 이동녕, 이상룡처럼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적은 없다. 단지 자식과 손자들을 신흥강습소로 보내고 동료들과 교류를 하고 젊은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간도행이나 마지막 삶이 실패했다거나 어리석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지배를 거부한 채 차갑고 낯선 땅으로 일가족과 함께 떠났고, 새로운 터전을 꾸렸다. 그곳에서 자식과 손자들을 신흥강습소로 보내서 민족의식을 잃지 않게 만들었으며, 독립운동가로 만들었다. 실제 1920년대 활동한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도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환갑을 한참 넘긴 나이에 성마르고 고집 센 성정을 가지고 간도로 떠난 김대락과 이회영, 이상룡과 이동녕을 기억한다. 그리고 김대락이 멀고 먼 타국에서 꿈꾸던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김대락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만들어진 것이리라.




작가 소개

정명섭
정명섭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서른 즈음, 갑자기 커피에 매료되어 바리스타의 길을 걸었다. 그 후 다시 글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을지문덕과 온달처럼 섬광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인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가 들려주는 잔혹하고 은밀한 뒷얘기들을 사랑한다. 역사추리소설『적패』, 단편 추리소설 시리즈인 『불의 살인』, 『빛의 살인』, 『혈의 살인』, 『조선 백성 실록 』, 『조선의 명탐정들』등이 있다.
“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 망명 열차에 오르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06 ~
1911년 1월 6일, 날씨는 추웠지만 맑았다. 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金大洛)은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열흘 동안 서울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는 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 손자들과 조카, 심지어 자신의 집에 노비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해방시켰던 몇몇 노비들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식솔들을 이끌고 강제로 일본땅이 된 조선을 떠나려 한다.
망명길, 그것은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기 위한 길이다. 그 길을 위해 김대락은 식솔들을 이끌고 여관을 나섰다. 김대락과 그 부인처럼 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력거를 탔다. 여관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남대문 밖 정거장에 갈 수 있었다. 김대락은 조국을 떠나는 길에 어떠한 미련도 없었지만, 서울의 지인(知人) 판서 조종필(趙鐘弼)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만이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김대락은 회한으로 가득 찬 채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출발하여 수색과 일산, 임진강을 건너 장단과 개성을 지났고, 오후에는 평양을 지났다. 열차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득히 넓은 모래사장과 햇빛이 은은히 얼비치는 산세를 본 김대락은 이곳은 반드시 명승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교각을 주로 지나던 기차는 이제는 굴을 여러 차례씩 지나게 되었다. 금방 지색이 달라진 것이다. 열차가 굴을 들랑날랑 거리자 김대락은 어디가 어딘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기차가 평안북도로 접어든 것이다.
밤 8시 열차는 의주 백마역(白馬驛)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사방은 온통 깜깜하였다. 일행은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을 찾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불빛만 보고 촌가에 들어가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른 다음 돈까지 주어가면 간절히 애걸하여 머물 만 한 곳을 찾았다. 객관을 찾아 들어가 늦은 저녁식사 후 몇 시간이 흐르지 않아 새벽닭이 울었다.

“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15 ~ 1911-01-24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낮선 땅에서 적적하고 궁색하게 지내던 김대락의 거처 동편 방에는 참판을 지냈던 정원하와 주사를 지냈던 이건승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대락은 그들을 만나자마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푸근하였다. 김대락은 정원하, 이건승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단란한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1월 20일 마을에 학교를 세우자던 정원하와 이건승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대락은 여러 날 그들과 벗처럼 지내다 보니 서운함이 끝이 없다. 그들이 거처를 옮긴 뒤 김대락은 쓸쓸히 집을 지키게 되었다. 게다가 23일은 큰 눈까지 내려 찬 기운이 엄습하여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김대락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외증손자의 이름에 고구려의 혼을 담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2-26 ~ 1911-02-27
오늘은 김대락의 외증손자가 태어난 지 엿새가 지났다. 이 때문에 손녀의 본댁에서 김대락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이 무릎을 맞대고 다정하게 모여 있으니, 이역 땅 중국에서 아이 때문에 웃음꽃을 피우며 근심을 잊고 쓸쓸함을 달랠 수 있었다. 외증손자의 이름을 일몽(馹蒙)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전에 천리마에 대한 태몽 등의 조짐이 있었고, 또 바로 이곳은 고구려의 고주몽(高朱蒙)이 창업한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외손자의 이름을 바꾸어 기몽(麒蒙)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주몽이 하늘에 조회하던 날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다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하현에 학교(신흥강습소)를 열다”

중국 길림성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김대락, 백하일기,
1911-04-23 ~ 1911-05-25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변발을 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6-01 ~
1911년 6월 1일, 중국 이도구(二道溝)로 온 김대락은 따라오지 못한 가족들 소식 때문에 영춘(永春)원으로 갔다. 그는 영춘원에서 처남인 이상룡의 집에 우선 머물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상룡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6월 5일, 이상룡은 만리구(萬里溝) 순경국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상룡의 복장은 조선 선비의 복장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관청에 가야 하는데, 복장이 거슬렸다. 조선의 복장은 아무래도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이상룡은 어쩔 수 없이 복색을 바꾸기로 하였다.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었다.
김대락의 눈에 비친 이상룡의 모습은 탄식 그 자체였다. 이미 넉넉한 선비의 모습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김대락과 이상룡은 모두 이 일이 마음 내켜 하는 일이 아님은 알았다. 그러나 망명하여 중국에서 살고, 일본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은 분명하였다.
김대락은 이상룡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
“변발은 와신상담의 일환이오. 그러나 삼천 리 먼 곳으로 와서 나이가 이미 예순인데도 머리를 아이처럼 깎았소. 새 세상을 이루거든 다시 옛 시절 그 모습으로 바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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