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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시대, 교육의 위치를 묻는다

이태영


드라마 학교와 스카이캐슬


‘학교’라는 드라마 시리즈가 있었다. 신인배우 등용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제성을 담보한 드라마 시리즈였고, 나 역시 그 시리즈를 좋아했다. 그야말로 세기말이었던 1999년에 시작한 학교 시리즈는 2002년 ‘학교 4’를 끝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시점에 학교 2013, 학교 2015(후아유), 학교 2017까지 이어진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2010년 넘어 만들어진 '학교'는 제대로 본 적 없다.


KBS 드라마 학교 2017 (출처:네이버포스트_드라마2017학교)


그리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한 ‘스카이캐슬’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챙겨보았다. 종편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스카이캐슬’은 매회 진행되는 스토리가 방송되자 마자 기사화되어 포털 사이트 전면을 장식하는 드라마였다.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력도 호평일색으로 말 그대로 화제작이었다. (심지어 다소 실망스러운 결론 부분에 이르기까지 화제작으로써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내용적으로 한국의 입시 제도와 교육문제 등을 다루니 언론에서도 이 같은 내용들을 시사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연결하기도 하였다. 종종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용한 사회적 맥락과 서사들이 시사 프로그램으로 번져가곤 하는데, 이 역시 화제작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출처:네이버 포스트_[이슈+]‘스카이 캐슬’로 본 블랙코미디스릴러)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학교문제와 교육문제, 입시문제 등을 고발하는 드라마는 이미 학교 시리즈 전후로 왕왕 있었다. 교실 붕괴, 왕따문제, 입시경쟁과 대학서열 문제는 학교 시리즈에서도 주요 소재였다. 2000년 방송된 ‘학교 3’에서 배우 박광현과 조인성이 연기한 역할은 '비버리'라는 부잣집 자녀들의 모임에 속한 고등학생이었고, 예고를 배경으로 삼은 ‘학교 4’에서도 빈부 격차와 교실공동체 붕괴는 드라마의 주요 소재 중 하나였다. 그 스케일과 배경, 스토리의 전개방식과 주요 행위자들이 다르긴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모티브가 되는 문제의식은 스카이캐슬과 학교 시리즈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스카이캐슬’을 흥미롭게 시청했지만, 스카이캐슬을 소재로 한국의 교육문제를 조명하려는 듯한 기사들을 볼 때면,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을 고발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드라마가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나의 경우엔 청소년기에 접한 학교 시리즈로부터 지금까지 잘 학습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놀라울 정도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교실붕괴'니, '입시경쟁'이니, '왕따'니 하는 것이 미디어에서 드라마로 다뤄질 때는 꽤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회자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스카이캐슬에서 고발되는 그 현실들은 결국 서울대 출신의 강사들이 모인 학원을 홍보하는 광고가 드라마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것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증발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드라마가 꾸준히 현실을 고발하는 동안 소재가 되는 현실 역시 꾸준히 더 안 좋아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제는 그것을 생산하는 이도, 소비하는 이도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의식을 소재삼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긴 최악의 결말이 우리가 소비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컨텐츠가 새로운 사회나 교육을 담보하거나 적어도 다른 상상의 계기를 만드는데 큰 관심이 없다는 심증을 확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스카이캐슬’의 결말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판단이 있을 수 있으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는 않으려 한다.)

교실은 변할 수 있을까? 교육이 개인과 사회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드라마 ‘스카이캐슬’과 한국의 교육현실을 연결하여 비판하는 어떤 기사를 읽다가, 20년 전에 재미있게 봤던 학교 시리즈를 복기하게 되니 아주 아찔해진다. 이른바 '진보교육감'들이 다수 당선되고, 혁신학교도 많아지고, 자유학기제도 세계 유례없이 전면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왜 드라마가 고발하는 현실은 점점 더 파국이 되는걸까?

그런데 그 난리였던 ‘스카이캐슬’도 이제 그 캐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남은 것은 출연한 배우들의 다음 행보와 드라마가 지적하는 현실을 강화할 것만 같은 광고들 뿐이다. 고작 3개월 전 종영한 드라마가 만들어낸 사회적 이슈가 그 사이 가장 먼저 증발해 버린 것을 직시하니 막막함이 커진다.


‘교육’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


직업이 활동가인 나는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장면을 종종 마주한다. 그 자리에서 문제가 되는 해당 이슈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해결방법으로 '교육'을 선택하는 장면 말이다. 우리가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이, 청소년 시기부터 학교교육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을 해야한다든지, 공정하고 정당한 노동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어린이, 청소년 시기부터 노조 조직과 노동권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결론. 때로는 나도 그 토론에 참여해 비슷한 논조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명분으로 여러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고, 그런 사업들이 모두 성과가 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런 류의 해법('교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어떤 면에서는 장기적인 안목 같고, 어떤 면에서는 해결을 자꾸 뒤로 미루는 것 같은)은 늘 옳은 이야기이지만, 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난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중심의 서열화된 교육 시스템이 현장의 본진을 장악하고 있고, 그것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주변화된 프로그램으로써의 노동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이 실제 노동친화적인 시민,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는 경로를 안내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스카이캐슬’의 인기가 시작되기 얼마 전인 지난 해 가을 신문 사회면은 ‘숙명여고 쌍둥이 시험지 유출사건’으로 도배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문제, 특히 입시를 중심으로 사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대하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 규칙을 위배하고, ‘특권’을(부친이 교사) 활용한 부정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탄은 대단했다. 물론 명백한 부정이 발생한 상황은 누구도 비호할 수 없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해당 사건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교육 시스템 전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이 설정한 ‘공정한 경쟁’의 환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확대된 점이다. 그런 면에서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의견이 있다'는 식의 올해 초 있었던 대통령의 발언은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교육시스템의 본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헤럴드경제 2018.11.12._기사_숙명여고 쌍둥이 결과)


강조하자면, 지금 상황에서 주변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교육시스템의 본진을 변혁할 사회적 토론 내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내는 것일테다. 그렇지 않다면, 늘 그래왔듯이 교육개혁은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다. 때가 되면 등장하는 내신비리 사건과 불수능 공정성 논란이 고작 내신중심이 더 공정한지, 수능이 더 공정한지 수준의 논의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그러한 징후들이 어떻게 사회적 성찰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대학”에서 “공무원”으로, 각자 도생을 요구하는 사회와 교육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다. 대학이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의 상징적인 공간이자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서 역할을 한 해방이후의 시간들이 있었고, 그 축적된 시간과 경험은 ‘대학의 서열화’를 긍정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명확한 신념이 있다면 그건 급격한 근대화를 통해 형성된 ‘공정한 경쟁과 노력을 통한 위계적(혹은 차별적) 지위의 획득’에 대한 신념일 것이고, 이 신념은 90년대 후반 이후 벌어진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의 생활세계 침탈 과정에서 더 견고해졌다. 그리하여 적어도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에서의 ‘대학’ 졸업장은 ‘절대로 남을 돌보지 말라’는 신자유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최전선에서 각자 도생하기 위한 최소조건으로 여겨졌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대학진학율이 그러한 현상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교육과 연구, 봉사를 기능으로 하는 고등교육은 그 본연의 기능을 잃은 채,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했다는 내외의 비판에 직면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최근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바로 한국의 대학진학율이 눈에 띄게 줄고 있는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학 진학률은 2015년도 70.8%, 2016년도 69.8%, 2017년도 68.9%로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추세이며 이는 10년 전에 비해 10%p 이상 하락한 수치이다. 반대로 증가하고 있는 수치로는 고졸자의 취업률이 있다. 2011년 25.9%에 불과했던 고졸자 취업률은 2017년 50.6%까지 증가했다. 두배 가까운 증가다. 이 변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이 교육개혁의 슬로건이 될 정도로 대학 진학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한국의 공교육이 다른 목표를 설정한 것일까? 그 사이에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이 학력과 학벌에 권력을 부여했던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이 개선된 것일까? 단언컨데, 그건 일단 아닌 것 같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졸업장이 더 이상 취업의 보증수표가 못되자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_사회심리학자 김태형의 「트라우마 한국사회(2013)」에서
(출처: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분석자료집)


대신 최근 들어 역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대졸 백수보다 ‘공딩(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고교생)’이 훨씬 낫죠!”와 같은 기사 제목들이다. 오랜 기간 지속된 고용 없는 성장, 그리고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어버린 저성장 국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상실된 상태에서 사회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은 경험이 없는 청소년, 청년세대는 각자 도생의 길에 자신의 생존경로를 설정했다. 그리하여 대학 입시의 자리를 공무원 시험이 대체했을 뿐이다. 그리고 스카이캐슬로 대표되는 일부 명문대학 외에는 더 이상 대학졸업장이 그 경로에 안정적인 대답이 되지 않자 안정적인 삶의 상징인 공무원을 일찌감치 준비하는 흐름이 가시화되는 모양새다.


교육현장이 분리될 수 없는 질문,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몇 년 뒤, 우리는 다시 스카이캐슬과 같이 한국의 교육 문제, 학교 문제를 소재 삼은 대중문화 컨텐츠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아마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드라마가 지금의 문제적 상황으로부터 반걸음이라도 더 나아간 상황을 그려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계속 교육문제를 학교의 문제나 대학의 문제, 입시의 문제로 국한해서 규정한다면 말이다.

스카이캐슬은 학교에 존재하는 성이 아니다. 성은 사회에 존재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그 성의 성벽이 더 견고해지고, 그 성을 향한 사회적 욕망이 계속 확장되는데, 그 성이 낮아지거나 붕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역시 해법은 성이 위치한 그 자리,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으로 밖에 풀릴 수 없다.

한국에서도 민주시민교육과 관련된 연구에서 어김없이 인용되는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있다. 이 협약은 1)강제성 금지, 2)논쟁원칙, 3)정치적 행위능력 강화를 3대 원칙으로 언급한다. 특히, 저 원칙들 중 사회와 정치에서 논쟁적인 사안은 교육의 영역에서도 논쟁적이어야 한다는 [논쟁원칙]은 우리 사회 모든 교육 현장(의무교육과 고등교육, 그리고 평생학습까지)에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 보인다. 논쟁 없는 교실, 논쟁 없는 공동체가 우리에겐 익숙해졌지만, 논쟁이 없으면 어떤 교실이든, 어떤 공동체든 보수화된다는 것이 그간의 경험이다. 예컨대, 4차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산업전환의 시대에 일의 문제와 분배의 원칙은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현재 논쟁 중에 있다면, 교육 현장에서 역시 이 같은 문제는 논쟁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험이 배우는 이의 ‘정치적 행위능력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정치적 행위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교육의 최대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서울교육소식_2017.02.14._포스트_서울시교육청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국제 심포지엄)


현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한 미래를 마주한 시대일 것이다. 위기라고 언급되는 사안들 하나하나의 치명성 역시 강력하다. 불안함이 상수가 되어버린 시대, 교육은 어떤 기능을 해야 할지 사회적인 토론이 시급하다. 모두를 생존경쟁에 몰아넣는 지금의 시스템을 긍정하고, 그 시스템 안에서 더 공정한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 교육의 해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회가 우리 모두가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지 더 적극적으로 묻고, 그 질문 안에서 교육의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집필자 소개

이태영
이태영
대안대학 풀뿌리사회지기학교 교무지기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8-24~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백곡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꾸준함의 중요성을 배우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0-12-24 ~

1800년 12월 24일, 맑은 날씨였다. 오늘은 명동에 사는 백곡 할아버지가 류의목의 할아버지를 보러 왔다. 류의목이 인사를 올리자, 백곡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요즘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어떠한 책을 읽고 있는지 등등을 물으셨다. 류의목이 대답하자, 백곡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리곤 류의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일을 할때는 그치지 말고 꾸준히 해야 성취가 있는 법이니라. 예전 계미년에 온 고을에 천연두가 번진 일이 있었다. 내가 천연두를 피하여 정동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마을을 터놓고 이야기할 벗도 하나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였는데, 무엇인가라도 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버들 수십 묶음을 얻어 새벽에 일어나 저물때까지 자리를 짰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서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를 다 만들 수 있었지. 이후에 이와 같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중에는 제법 속도도 붙었지. 이리하여 꽤 많은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마침 식량이 다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만든 자리를 장에 가서 내다 팔아서 쌀과 보리를 얻었는데, 이 식량이 꽤 많아서 천연두가 가시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오히려 남는 것이 있을 정도였지. 또 그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서 삼을 꼬는데, 내가 보니 밤새 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삼을 꼬다 남은 자투리가 버려지고 빠진 것들이 꽤 많았다. 이리하여 내가 아침 나절에 일어나서 버려지고 빠진 것들을 줍기를 여러 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돌아갈 무렵에 모은 양을 보니 열 묶음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베틀로 중포를 짜니 세 필이나 되었다. 일이란 모두 이와 같아서, 하루하루 할 때는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꾸준히 해가다 보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다’ 라고 감탄하셨다.

“공부를 게을리하다 할아버지께 지팡이로 맞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9-17 ~

1801년 9월 17일, 맑은 날이었다. 오늘 류의목은 『서경』 문후지명을 읽었다. 밤에 법산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 무척 반가웠다. 보통 밤시간에는 독서를 하며 공부하였는데, 오늘은 책 앞에 앉지 못하고 칼로 감을 깎으며 법산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평소부터 익살이 많던 법산 아저씨인지라, 이야기를 듣다가 곧 웃고 떠들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평소 할아버지는 이 시간이 되면 늘 밤을 틈타 몰래 엿들으며 류의목이 공부를 하는지 여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문틈으로 류의목의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자, 문 밖으로 류의목을 부르더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매질을 하였다. 아울러 법산 아저씨를 향해 크게 책망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엄준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이 웃고 떠들며 하는 말이 서경에 있는 내용이냐?’ 라며 심하게 질책하셨다. 질책을 받는 동안 법산 아저씨는 방안의 벽 모퉁이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떨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명을 들을 뿐이었다.
한참 훈계를 하신 할아버지가 떠나시자, 비로소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은 다시 자리에 낮을 수 있었다. 한참 혼인 난 후라 바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였다. 법산 아저씨는 류의목에게 매우 미안해 하였는데, 실상 류의목 역시 같이 재미나게 어울렸던 터라 법산 아저씨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법산 아저씨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내가 내일 어찌 사람들을 보겠는가’ 라며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였다. 류의목은 비록 할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큰 일은 없을 거라 법산 아저씨를 위로하였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공부 시간에 잡담을 나누는 본인에게 큰 실망을 느끼며 밀려드는 자책감에 민망하였다.

“6살 아이가 성리학을 묻다”

朱子大全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장흥효, 경당일기, 1624-01-07 ~

1624년 1월 7일, 제자들이 몇 년째 자신을 찾아오면서 혼자 하는 공부를 넘어 함께 하는 공부로 발전하였다. 무릇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든 것을 혼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고 하여도 읽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주석서를 내었고 주자는 그것을 자기 관점으로 다시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
장흥효도 나름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황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점을 제자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사달(四達)이라고 불리는 이제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와서 묻기를 “땅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라고 하기에 그는 “하늘에 붙어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단순하게 땅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질문 자체가 놀라웠던 것이다.
아이는 장흥효의 답변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늘은 어디 붙어있습니까?” 장흥효는 “땅에 붙어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일기에 총명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외손자인 이휘일로 이황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불리는 이현일의 형이 된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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