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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의 언문일기

양줏골 정생의 서당에 가을이 왔다. 정생이 헛기침하면서 서탁을 장죽(長竹)으로 탁탁 쳤다. 장죽에서 튄 담뱃불에 앞자리에 앉은 학동이 깜짝 놀라 서책을 옆으로 치우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정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점잔을 빼며 말했다.

”가을은 모든 것을 준비하는 때이니라. 가을이 깊어지니 말이 살찐다는 말이 있는데, 무슨 의미겠느냐?”


(출처: 픽사베이)


학동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생이 노려보자 재동이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말이 살찌니, 잡아먹을 준비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야, 이 녀석아! 말을 잡아먹으려고 키우냐?”

재동이가 얼른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처박았다. 정생의 눈길이 이번엔 병구에게 향했다.

”가을엔 먹을 게 많으니까 말도 살이 찌겠죠?”

”그게 준비한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정생의 핀잔에 병구는 깨달음이 온 듯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두들겼다.

”말이 먹을 것을 준비해야 말을 살찌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번엔 정생이 자기 이마를 두들겼다.

”가을이 깊어지니 말이 살찐다는 것은 추고마비(秋高馬肥)가을의 좋은 날씨를 가리키는 ‘천고마비’라는 말은 ‘추고마비’에서 변해서 된 말이다.라 쓴다. 이 말은 가을이 되면 흉노의 말들이 살이 찌고 그러면 흉노가 말을 타고 침략해 오니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생이 장죽을 다시 탁탁 치며 말했다.

”모두 이 네 글자를 쓴다. 추고마비.”

병구는 첫 글자인 추(秋)부터 틀려서 초(秒) 자를 써 놓았다. 어떤 학동은 목화(木火)를 붙여서 써놓았는데, 물론 이런 글자는 세상 천지에 없다.

”이놈아, 나무 밑에 불이 난 뛰어날 걸(杰)은 있지만 나무 옆에 불이 난 글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재동이는 이들보다는 좀 나아서 추고마(秋高馬)까지는 어찌어찌 썼는데 비(肥)를 쓰지 못하고 멀떠구니 비(肶)를 써놓았다.



”에라이, 멀떠구니 같은 놈아!”

재동이 머리에 장죽이 떨어지자 재동이가 투덜댔다.

”추고마비! ‘비’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재동이는 정생이 옆에 써놓은 비(肥)의 오른쪽 한자 파(巴)를 가리켰다.

”저 글자는 ‘파’라고 읽지 않습니까?”

”그렇지.”

재동이는 이번에는 자기가 써놓은 비(肶)의 오른쪽 한자 비(比)를 가리켰다.

”이 글자는 ‘비’라고 읽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재동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쓰신 건 ‘추고마파’, 제가 쓴 건 ‘추고마비’ 아니겠습니까!”

딱!

”네 놈이 말한 건 형성문자니라. 음으로 쓰는 것과 뜻으로 쓰는 것이 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하지만 살찔 비(肥)는 살 육(肉)과 꼬리 파(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회의문자인 것이니라.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

재동이가 아직도 억울한 듯이 말했다.

”아니, 스승님! 여기 어디에 고기 육(肉)이 있습니까? 달 월(月) 밖에 없지 않습니까?”

딱!



”달 월(月)과 육달 월(⺼)자는 모양이 같아 보이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느냐, 안 했느냐?”

재동이가 이제야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 하셨습니다.”

공연히 아는 척 하다가 머리에 혹만 세 개 달고 말았다.

병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고기 육(肉)과 육달 월(⺼)은 같은 글자입니까?”



정생은 큰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래서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하는 거겠지.

”물 수(水)와 삼수 변(氵)도 같은 글자이고 불 화도 화(火)와 화(灬)로 모양이 변한다고 했느냐, 안 했느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같은 글자가 옆에 있냐, 위에 있냐, 아래에 있냐에 따라 모양이 자꾸 변합니까?”

”그게 뭐가 이상하냐? 너도 누웠을 때, 앉았을 때, 서 있을 때, 달릴 때 모양이 다 다르지 않느냐?”

”그건… 그래도 저는 그저 저 아닙니까?”

”그렇지. 글자도 그저 같은 글자일 뿐이니라.”

병구가 손을 올려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뭔가 이상한데, 딱 뭐가 이상한지 짚어낼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그때 뒤에서 광덕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멀리 25리나 되는 장흥골에서 오는 학동으로 양반가는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착실한 아이였다. 평소 말이 없는 아이인데 뜻밖에 질문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광덕이가 뭐 할 말이 있는가 보구나.”

”스승님, 글자 이야기를 하시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뭐냐?”

”제자가 며칠 전에 길에서 이런 것을 주웠는데 어떤 문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광덕이가 소매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한지였는데 과연 적혀 있는 것이 이상한 문자였다.

정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이를 들여다보자 흥미가 땡긴 학동들도 모두 모여 들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문득 뭔가 깨달은 듯 재동이가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스승님, 이거 일본 문자가 아닐까요? 일본의 간자가 임진년(1592년) 난리를 다시 꾸미고자 침투했다가 흘린 것이 분명합니다!”


히라가나 표(출처: 네이버)


정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 문자는 아니다. 내가 동래에 갔을 때 일본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문자 모양이 이와 다르다.”

그러자 이번에는 병구가 말했다.

”절에서 만드는 불경에 쓰는 범어(梵語)가 아닐까요? 천축국(인도)에서는 우리와 다른 글자를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정생이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접장이 입을 열었다.

”이거 생긴 게 언문과 비슷한 점도 좀 보입니다. 세종께서 언문을 만들 때 몽골의 파사파(八思巴) 문자를 참고했다고 하던데 이것이 혹시 그 문자는 아닐까요?”

정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파사파 문자는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이 라마승 파사파에게 명하여 만든 것인데 언문과 다소 유사한 점이 없진 않으나, 명나라 태조께서 엄히 금한 문자인지라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날 리는 없을 것이야.”


몽고자운(蒙古字韻)(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광덕이 말했다.

”세상에는 한문 말고도 글자가 많이 있는 모양입니다. 또 어떤 글자가 있습니까?”

종이 위의 글자와는 상관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정생이 박학을 자랑할 기회였다. 정생이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문자를 쓰는 일이 일상화 된 오늘에는 잘들 모르지만, 문자가 없어도 기억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던 아주 먼 옛날에는 줄에 매듭을 지어 기억해야 할 일들을 표시했는데 이를 ‘결승(結繩)’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삼황오제 중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던 창힐(蒼頡)이라는 이가 짐승과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문자를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바로 한자의 시초니라.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내자 하늘은 오곡을 내려 축하했고, 용과 귀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문자는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큰 힘을 준 것이다.”

재동이가 물었다.

”한자가 있는데 세종 임금님은 어찌하여 언문을 또 만드신 겁니까?”

”사람이 도리를 알아야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한문은 어려워서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가 없는 법이니, 백성들이 도리를 깨우칠 수 있기 쉬운 글자로 언문을 만드신 것이다. 한문은 십 년을 배워도 문리를 깨우치기 어렵지만, 언문은 하루 이틀만 배워도 써먹을 수 있으니 편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니라.”

병구가 물었다.

”그럼 뭣 때문에 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야 합니까?”

”중화의 전통이 오랑캐에 짓밟혀 끊어져 우리가 그 정통을 이어 받은 지 이미 기 백 년이 되었다. 우리가 한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공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느냐? 성현의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한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병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저희가 한문 공부를 하면, 한문 구절을 읽은 뒤에 우리말로 새기지 않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우리말로 새긴 뒤에 그것을 공부하면 성현의 도리를 쉽게 배우고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허, 그런 불경한 말을! 거란의 요나라도 자기 문자를 만들어 진서(한자)를 무시했다가 멸망했고 일본도 자기 문자를 가지고 있다 보니 성현의 도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끝내는 그 끝이 좋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언문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사대부는 한문을 놓지 않고 있어서 소중화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잊어서는 아니 된다.”

정생이 윽박지르기는 했지만 사실 그 자신도 평소 그런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헛기침을 한 뒤 말을 돌렸다.

”이 글자를 보니 한문은 숫자만 있는 것 같다. 무슨 암호문 같기는 한데…”

접장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럼 이거 혹시 정북창(鄭北窓)이 남긴 예언은 아닐까요? 정북창은 스승님의 조상 아닙니까?”

물론 아니었다.

명종 때 신통력이 광대하다고 명성을 떨친 정북창은 본명은 정렴으로 온양 정씨였고, 정생은 경주 정씨로 관련이 없었다. 다만 정북창은 양주 진건골에 살았었고 워낙 유명한 터에 거기서 한참이나 먼 곳에 사는 정생까지도 종종 그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는데, 정생이 굳이 정정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호오, 정북창의 예언서라… 그럴 듯하구나.”

정생이 종이를 접어서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정북창의 예언서라면 국가의 안위와 관련되는 큰일일지 모른다. 이 종이는 내가 며칠 궁리를 해보겠다. 놓고 가라.”

정생은 혹시나 보물이 묻힌 곳을 가리키는 쪽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자 잘 된 덕에 팔자를 고칠지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랑채로 들어서던 정생은, 방 청소를 하고 있던 여종 버들네가 그 쪽지를 들여다보는 것을 알았다.

”무슨 짓이냐? 서탁의 물건을 함부로 보고 있다니.”

”아이구머니나, 죄송합니다. 이 쪽지가 궁에서 사용되는 것인데 어찌 이곳에 있나 싶어서 잠깐 들여다보았습니다요. 용서해 주시와요.”

정생의 안색이 확 변했다.

”뭐라? 궁에서 사용되는 것이라고? 그럼 너는 이게 뭔지 안단 말이냐?”

드디어 금은보화를 얻게 될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럼요. 쇤네의 조카가 무수리로 궁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알아봤죠. 이건 궁녀들끼리 주고받는 문서랍니다.”

어라? 정북창의 예언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 그런가? 그럼 그게 무슨 말인지도 아는가?”

”그러문입쇼. 이렇게 쓰여 있네요. ‘홍망구소, 중망계, 백다식’이라고요.”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읽는단 말이냐?”

”ㄱ, ㄴ, ㄷ, ㄹ 순서대로 일, 이, 삼, 사로 쓰는 겁니다요. 여기 첫 글자는 십사(十四)이니 ㅎ자가 되고 밑에는 ㅗ가 있고 그 밑에 팔(八)은 o이니 이 글자는 ‘홍’이 되는 것입니다.”

정생은 그 글자가 십사(十四)와 육(六)인 줄 알았다. 이제 보니 ㅗ 밑에 팔(八)이 붙아서 육(六)처럼 보였던 것이다. 거기서 잘못 보지만 않았어도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버들네가 해주는 말로 봐도 암호문 같이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정생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홍망구소니 뭐니 하는 건 무슨 말인가?”

버들네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홍망구소는 붉은색 둥그런 약과이고, 중망계는 네모난 유밀과, 백다식은 하얀색 다식입니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자들이죠.”

그 말에 정생은 광덕이가 온릉 옆에 산다는 생각이 났다. 온릉은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의 능이다. 이제 곧 추석이니 차례 상 준비하던 궁녀가 적어놓은 쪽지가 어쩌다 떨어져서 광덕이 손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정생은 객쩍게 방에서 물러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일장춘몽이 이런 것이겠구나.”

왠지 모르게 언문이 원망스러운 정생이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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