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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유행을 이끌어간 패션 디자이너,
조선의 여성 장인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K-컬쳐, 조선의 패션


2019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킹덤’이 상영되고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업로드 되자 드라마 속 K-좀비들이나 댄서들이 입은 조선의 복식에 전 세계인이 열광했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조선 복식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오프라인에 이어져 갓을 구매하거나 입고 쓰고 체험하는 열풍으로까지 번졌다. 2019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에드워드 크러칠리(Edward Crutchley)의 쇼에 모델이 조선의 갓을 쓰고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조선의 옷과 모자에 외국인이 관심을 가진 것이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말 외국인에게 조선의 패션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장인들이 있어서이다.


영국 디자이너 크러칠리가 2019년 ‘런던패션위크 AW’때 선보인 한국 ‘갓’ 패션(출처: 중앙일보 2020.11.06.)




조선 왕실의 패션 아이템에 종사한 10종의 여성 장인


조선에서 옷을 꿰매거나 갓을 비롯한 모자를 만들어 유행을 선도한 패션 디자이너는 장인이다. 그들은 신분이 비천하고 학식도 없어 자신들이 만든 공예품에 이름을 새기지 않아, ‘익명의 예술가’로 불리곤 한다. 국가나 왕실을 위해 활동한 장인들은 이름을 남기고 있다. 1601년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300여 년간 국혼이나 국장 등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왕조의궤』는 546종 2,940책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 513권에 500여 종 10만여 명 장인의 이름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의궤』(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장인은 99%가 남성이었고, 여성 장인은 침선비(針線婢), 수비(繡婢), 봉조비(縫造婢), 염모(染母), 수모(首母), 진소장(眞梳匠), 양태장(凉太匠), 모의장(毛衣匠), 복완재작장(服琬裁作匠), 상화장(床花匠)의 10종이다. 500여 장색(匠色) 중 2%에 불과한 여성 장인은 임진왜란 이후 관청제도가 붕괴되었던 17세기 초에 잠깐 등장하다가 17세기 후반 숙종대에 관청제도가 정비되면서 남성 장인으로 대체되었다. 다만 침선비, 수모, 양태장, 모의장은 국가적 수요가 많아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여성 장인은 ‘비(婢)’나 ‘모(母)’의 접미사와 결합된 명칭을 사용하였고, 옷이나 가발 및 모자 등 섬세한 재료로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분야에 종사하였다. 여성 장인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록에서 여성 장인들을 이름으로 주로 불렀다. 1604년 선조의 존호도감에 동원된 침선장 장가시(張加屎)는 예외적으로 성과 이름이 함께 기록되었고, 나머지 함께 동원된 춘이(春伊), 복금(福金), 희춘(希春) 등은 이름만 불렀다. 남성 장인과 함께 징발될 경우에도 남성은 성과 이름이 함께 기록되나 여성 장인은 이름만 불렸다. 1757년 정성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 때 침선장은 정천주(鄭天柱), 박대근(朴大根), 만애(萬愛), 도화(桃花), 소복(蘇福) 5명인데, 남자와 여자 장인을 기록하는 방식에 차이를 보였다.


『[선조]재존호도감의궤([宣祖]再尊號都監儀軌)』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조]재존호도감의궤([宣祖]再尊號都監儀軌)』 중 침선장 기록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것은 잔치 때 꽃을 장식하던 상화장도 마찬가지이다. 1633년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던 영접도감에 예빈시의 남성 화장과 함께 여성 상화장은 돌남(乭南), 명옥(明玉), 내절월(內卩月), 구월(九月), 애춘(愛春)이가 동원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3년 청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 활동한 돌떡(乭德)이나 논월(論月)이도 이름만 기록되었다.

둘째, 여성 장인은 노비를 의미하는 ‘〇〇婢(비)’로 표기되는데, 침선비, 수비, 봉조비가 해당된다. 침선비는 궁중에서 기녀나 의녀로도 활동하며, 신분은 천민 출신으로 국가기관에 소속된 공비(公婢)거나 개인 소유의 사비(私婢)이다. 예컨대 조선 초기 내자시의 노비가 상의원의 침선비가 되었다가 다시 후궁[昭容]의 시비(侍婢)가 되어 궁비(宮婢)가 된 사례가 있다. 침선비도 의녀처럼 각 고을의 나이 어린 관노비 중 3년마다 뽑아 올렸는데, 그중 오빠의 군역을 대신한 경우도 있었다. 간혹 사노비도 있었는데 1757년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을 조성할 때 침선장 선대(善大)는 재상 댁 사노비였다. 수를 놓던 수비는 1608년 선조의 국장도감에 추금(秋今)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나이 든 여성을 통칭하는 ‘〇母(모)’는 염모와 수모가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궁녀, 의녀, 기녀 등 ‘女(녀)’자로 불리는 여성들은 7-15세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입궁한 경우이다. 이에 비해 ‘母(모)’로 불리는 잠모(蠶母), 수모(首母), 유모(乳母) 등은 18세 이상 나이가 많거나 기혼자였다. 1604년 염색을 위해 동원된 염모 ‘난원(蘭元)’이 그중 하나이다.




왕실 여인의 헤어 디자이너와 패션 디자이너


조선의 왕실 여인들은 큰 가발을 얹고 화려한 복식을 입어 여성들의 유행을 선도하였다. 수모는 큰 가발을 올려 머리를 다듬어주던 헤어 디자이너였고, 궁중 복식을 만들던 침선비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10종의 장색 중 이들은 오랫동안 다수가 활동하였다.

먼저 수모는 왕비나 세자빈은 책봉이나 국혼 등 왕실 행사 때 법복(法服) 위에 가발을 얹어 큰머리[假髢]를 만들어주는 장인이다. 수모는 조선 전기부터 각 관청 노비 중 14~15세의 미모가 10명을 선발하여 교육시켜 궁중에서 활동하였다. 수모 중 오래 활동한 장인은 17세기 중후반에 다수 보인다. 금옥(今玉)과 예솔(禮率) 및 옥지(玉只)는 1645년부터 1661년까지 16년간, 강상(江床)과 선업(善業) 및 이례(二禮)는 1677년부터 1690년까지 13년간 활동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왕실 여성처럼 가발을 크게 하여 사치가 사회문제가 되자 1747년 영조는 가체 대신 족두리로 대체토록 하였다. 1788년 정조는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내려 가체를 전면 금지하여 더 이상 수모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백옥떨잠이 장식된 큰머리를 한 순정효황후 사진(출처: 국립고궁박물관)

한편 여성의 머리카락을 간추리는 데 긴요한 참빗을 만든 여성 참빗장[眞梳匠]도 있었다. 1610년 광해군이 사친인 공빈을 공성왕후로 추숭할 때 이생(已生)과 국지(國只), 1641년 현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때 북간(北間)이 그들이다.

다음, 침선비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존친을 위해 어의를 제작하던 장인이다. 그들이 속한 상의원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설치되어 1895년 상의사로, 1905년 상방사로 개칭되며 한말까지 존속되었다. <의궤>에서 침선비는 1601년부터 1911년까지 기록되어 그 존재가 확인된다. 처음 등장하는 침선비는 1601년 의인왕후의 목릉을 조성할 때 동원된 상의원의 춘환(春還)과 사노비인 분향(粉香)이었다. 17세기에 상의원의 갑생(甲生), 취이(翠伊), 취선(翠仙) 등이나 공조의 금옥(今玉)과 단화(丹花)는 대개 22년 정도 활동하였는데, 춘이(春伊, 1604-1645)와 시옥(時玉, 1630-1677)은 41-47년간 활동하였다. 18세기에 침선비는 상의원 소속의 월하매(月下梅), 용분(龍粉)과 공조 소속의 차애(次愛), 취열(翠烈), 취매(翠梅), 서지(西芝) 등이 있으며 그녀들은 23-29년간 활동하였고, 만애(萬愛, 1718-1762)는 44년간 활동하였다. 19세기 침선비는 소속은 병기하지 않았고 금홍(錦紅)과 행화(杏花)는 23-29년간 동원되었지만 금병매(金屛梅, 1795-1837), 월하선(月下仙, 1816-1866), 금강선(錦江仙, 1819-1866)은 40-47년간 활동하였다. 이처럼 장기간 활동한 장인들에 의해 궁중 복식의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상의원 일러스트(출처: 영화 상의원 2014)


조선 선비의 패션 아이템인 갓과 난모의 디자이너


의관 정제(衣冠整齊)를 중시하였던 조선의 성인 남자들은 잠을 잘 때 이외에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갓을 착용하였다. 그만큼 갓은 선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고유한 표상물이다. 이처럼 세계인이 열광하는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은 갓을 비롯한 모자이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은 머리를 간추려 상투를 틀고 망건을 동여맨 후 탕건을 받쳐 쓰고 모자를 썼다.

첫째 왕실용 갓은 공조와 상의원의 장인들이 제작하지만 거의 모든 남자들이 갓을 써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갓은 조선 초기부터 분업화되었다. 대우 꼭대기를 말총으로 만드는 총모자장, 대나무로 넓은 차양을 만드는 양태장, 양자를 모아 갓으로 만드는 입자장으로 분화되었다. 갓은 집 한 채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였지만 유행에 민감하였다. 어떤 때는 대우가 높고 차양이 좁았다가, 또 어떤 때는 대우는 낮고 차양은 넓은 갓이 유행하여 1칸의 방에 남성 3명이 앉으면 갓의 넓은 양태가 서로 부딪혀 앉을 수 없을 정도였다.


김준근, 〈갓장이〉(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갓을 만드는 여러 장색 중 여성은 양태를 제작하였다. 임란 이후 여성 양태장은 1627년 소현세자의 국혼 때 차출된 돌떡(乭德)이와 종옥(終玉)이 있었고, 1645년 소현세자의 빈궁도감(嬪宮都監)에 동원된 개이(介伊), 금이(今伊), 예이(禮伊), 소야지(小也之) 등이 이었다. 1659년 효종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는 기지지(起持只), 개금(介金), 애선(愛善), 1661년 효종의 부묘도감(祔廟都監)에는 5명의 양태장 중 2명의 여성장인인 금월(今月), 말개(唜介)가, 1677년 현종의 부묘도감에 효양(孝養), 귀업(貴業), 1681년 인경왕후의 빈전도감과 1684년 명성왕후의 빈전도감에 어둔이(於屯伊), 개춘(開春), 업선(業善), 1702년 인현왕후의 빈전도감에 사금(四今), 자근열(者斤熱), 소업(小業)이 동원되었다. 더욱이 어둔이는 1681년과 1684년 두 차례의 도감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여성 양태장은 1627년부터 1702년까지 동원되었고, 이후에는 남성 장인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왕실 행사와 관련된 기록이고, 조선 시대 내내 갓은 수요가 많아 대나무로 차양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특히 제주도의 민간 양태장이 만드는 ‘제양(濟凉)’과 통제영의 수군영에 속한 남성 장인들이 만드는 ‘통양(統凉)’이 전국에서 유명하였다. 분업화된 갓의 제작 전통은 한말까지 이어져 기산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에는 여자 장인 둘이 마주 앉아 양태를 겯는 장면이 다수 그려져 있다. 그밖에도 기산은 갓을 비롯하여 망건이나 탕건, 사방관 등 다종다양한 모자를 만드는 장인의 풍속화를 그렸는데 그중 상당수가 여성 장인이었다.


김준근, 〈망건장이〉(출처: 독일 MARKK)

둘째 모의장은 겨울철 난모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선비들의 갓 사랑은 대단하여 계절에 상관없이 갓을 썼다. 그러나 갓은 겨울철 추위에 취약하여 따뜻한 털모자[暖帽]를 쓴 위에 갓을 쓰는 게 유행하였다. 난모의 수요가 급증하자 이것을 제작하는 장인은 형태나 용도에 따라 모의장을 비롯하여 이엄장(耳掩匠), 모관장(毛冠匠), 휘항장(揮項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많은 숫자가 활동하였다.


방한모인 풍차(風遮)를 착용한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1633년 영접도감(迎接都監)에는 22명의 경공장과 7명의 개성부 모의장 등 총 29명이 동원되었는데, 그중 소금이(小金伊), 연분(年分), 만복(萬福), 내은세(內隱世) 등 여성 장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들어 양반의 숫자가 증가하자 겨울철 추위에 약한 갓의 특성을 보완하여 추위를 막으며 정수리 부분을 뚫어 상투를 빼낸 이엄(耳掩), 휘항(揮項), 풍차(風遮) 등 여러 종류를 다양하게 착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수요가 늘자 장인들은 각종 국역(國役)에 동원되지 않는 기간에 사적인 생산을 하여 한양의 육의전 중 이엄전(耳掩廛) 등에서 전문적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또 청나라와의 사행무역(使行貿易)을 통해 18세기 후반 관모제(官帽制)를 시행하여 1년 예산의 1/3로 66만개의 모자를 수입하기도 했다. 당시 상의원 소속의 오랫동안 활동한 모의장은 대부분 남성으로 박계강(朴繼江), 정시흥(鄭時興) 및 김석연(金石連) 등이었고, 김강이(金江伊, 1713~1726)만 여성 장인이었다. 김강이는 모의장이자 이엄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내려 성인남자들이 상투를 자르게 되면서 남자용 난모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고 대신 여자나 어린아이용 난모로 국한되면서 모의장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을 것이다.




전통공예의 기술을 전승하고 있는 21세기 무형문화재 여성 장인


조선의 여성장인은 10장색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근현대기를 거치면서 의생활의 변화나 산업화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이래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 수공예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이에 국가에서는 1964년 전통공예를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하기 시작하였고, 양태와 총모자를 제작하는 여성장인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성의 전유물이던 분야까지 점차 여성 장인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매듭장 정봉섭 장인(출처: 문화재청)

입사장 홍정실 장인(출처: 문화재청)

예컨대 아버지가 작업하던 기술을 딸이나 여성 제자가 전수 받은 경우가 있다. 매듭장 중 정연수 보유자의 사후 그의 부인 최은순을 거쳐 딸인 정봉섭과 여제자인 김희진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채상장은 아버지 서한규에서 딸 서신정 보유자로, 입사장은 스승 이학응에서 여제자 홍정실 보유자로 전수되었다. 더욱이 21세기 들어 전통 공예 분야에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많이 진입하면서 여성 장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그들에 의해 전통 기술이 전승되는 경향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집필자 소개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저자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나오고,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1999년 「조선왕조 왕실공예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장인의 기술을 영상과 책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였으며, 2003년부터 현재까지 한서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의 왕실문화재와 왕릉 및 장인과 무형문화재 등을 주로 연구·집필하고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 문화관광부의 영정초상위원, 문화재청의 수리기술위원이자 무형문화재전문위원이며, 충청남도·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위원이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 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 ~ 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가뭄, 비를 기다리는 버드나무와 눈먼 무당의 기우제”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국가 운영의 가장 큰 변수였다. 1614년 봄에도 가뭄은 찾아왔다. 기다리는 봄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타들어 갔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농사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우제를 연달아 지냈다. 눈이 먼 무당이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쳤고, 방방곡곡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게 하였다.

4월 4일, 드디어 비가 내려 모두가 기뻐하였다. 빗줄기가 마치 삼대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랫동안, 고루 내리지 않았고, 닷새 후 방방곡곡엔 다시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다시 향을 사르며 버드나무를 꽂고, 아이와 눈먼 무당이 서교(西郊)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철 장인이 수리용 쇠못을 만들어주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626년 7월 15일, 을유. 맑음. 권별은 한익길의 집에 갔다가 곧바로 쇠못을 보고 오후에 올라왔다. 초간에 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왔다.

1626년 7월 25일, 을미. 맑음. 권별은 귀래곡 철장(鐵匠)의 집에 가서 못 90여 개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초간에 갔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6일, 병신. 맑음. 서까래가 부족하여 수심에 가서 서까래 네 바리를 얻어 와서 곧바로 초간(草澗)으로 갔다. 임이섭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8일, 무술. 초간에 갔다. 목수 진상이 와서 어제부터 연못의 방죽을 고쳐서 쌓고 있다. 여균·이망이 와서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일, 임인. 맑음. 초간에 가서 제방 고치는 일을 마치고 물을 끌어댔다. 달보·경보·원백·여유가 와서 보고 갔다.

“기와장이가 닷새에 걸쳐 새 지붕을 덮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한 달에 걸쳐 사당 건물에 단청을 입히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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