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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 전쟁 - 정주와 유목의 충돌

인간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들 간의 다툼의 역사이다. 학자 간의 학문적 대립이 될 수도 있고, 상인들끼리의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한 경쟁일 수도 있으며, 나라 사이의 영토 등을 두고 벌어지는 무력 충돌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라 사이의 다툼은 상대국이 원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바람에 다툼이 커지거나 오래가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례의 하나가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곳에 정착한 상태에서 농사를 지어 생활을 이어가는 고려와 달리, 거란은 이동을 계속하며 가축을 키우는 유목 형태의 문화를 영위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나라 간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간극을 초래했고 그 결과 전쟁이라는 무력 충돌로 나타나기도 했다.




유목민의 특성과 기마


유목은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로,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넓은 지역을 계절에 따라 이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삶을 이른다. 따라서 한 곳에 정착해 생활하는 농경민과는 구별되는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이동 생활’·‘목축경제’·‘기마술’이다.

이 가운데 ‘이동 생활’은 인간이 풀을 직접 소비할 수 없으므로, 풀을 소화할 수 있는 가축들에게 필요한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생활을 말한다. 동물이 먹을 수 있는 여린 풀은 봄에는 남쪽에서 싹트다가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유목민들의 삶이란 풀 생육의 이동 방향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톤유쿠크 비문」에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도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이동 생활은 생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이동 생활에서는 항상 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마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톤유쿠크의 비석 (출처: 매일경제 2016.10.10)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은 양이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봄에 양이 출산을 하면, 풀이 자라는 여름에 살을 찌웠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도축을 하거나, 내년도 생산을 위해 임신을 시키는 순서로 관리를 하였다. 유목민들이 주로 겨울에 전쟁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순환시스템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는 때는 겨울이었다. 방목지의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은 생존을 위해 초원 바깥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교환을 했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약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 송나라의 이강(李綱)이라는 인물의 “신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이전의 맹약을 질책할 것이 두렵습니다(『정강전신록(靖康傳信錄)』).”라는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강전신록(靖康傳信錄)』 (출처: 국립제주박물관)


이강의 언급은 이른바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천고마비라는 단어는 하늘이 높아지는 청명한 가을이 오면, 독서하거나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찐다는 이강의 말은 유목민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농경 민족에게 유목민의 침입을 조심하라고 던지는 경고의 문구였던 것이다.

전쟁과 관련한 『요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거란은 출병은 음력으로 9월을 넘기지 않고 군사를 돌이키는 것은 12월을 넘기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생활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거란이 고려를 치기 위해서는 자연 해자, 즉 방어막 역할을 하는 압록강을 건너야만 하는 것도 겨울을 선택한 이유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길목은 평안도 의주(義州)였는데, 외부 세력이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의주 앞쪽의 압록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런데 압록강 유역은 대부분 옥토나 점옥토 또는 점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땅이 얼어 단단해지기 전에는 도로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아울러 의주 부근은 바다와 가까워 조수간만의 영향도 받았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중 〈의주부(義州府)〉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 이유 때문에 강을 건너는 것도 하루에 2회 정도로 제한을 받았으며, 건널 수 있는 인원도 하루 평균 500명 내지 6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이 지키는 강을 건넌다는 것은 적의 공격에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이나마 압록강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수량이 적은 시기인 갈수기나 얼음이 어는 결빙기를 택하는 것이 유리했음은 당연하다. 유목민의 장점인 속도전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이 겨울을 선택해 고려를 공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은 기병을 이용해 빠르게 적을 공격하는 속도전을 선호했다. 이는 거란이 유목을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요사(遼史)』 「식화지(食貨志)」에, “거란의 옛 습속을 보면, 부유함은 말로 판단하고 강한 것은 병력으로 판단한다. 들판에 말을 놓아기르고 백성을 병력으로 이용한다. 일이 있으면 전쟁을 하는데, 강건한 병사들이 명령을 내리면 바로 모인다.”거나 “유사시에는 공격하는 전투를 임무로 삼고 한가하면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기록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란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자체가 군사 집단이었고 평상시의 유목 생활 자체가 군사 훈련의 하나였던 셈이다.

거란의 원정 형태는 군주인 카안이 직접 지휘를 하는 친정·도통을 임명하여 군사작전을 치르는 원정 그리고 도통을 임명하지 않는 원정으로 구분된다. 전투부대는 5백〜7백 명의 1대가 기본 단위이며, 실제 전투는 10대로 구성된 5천〜7천 명의 1도(道)가 주축을 이루었다. 성종대 부터 현종 대까지 그동안 1차부터 3차로 이해한 전쟁에 동원된 거란군은 5만에서 40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그 원정군의 대부분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거란은 기병을 이용한 속도전에 고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우위가 드러난 전쟁은 1010년의 강조(康兆)가 사로잡힌 통주성 전투에서였다. 강조(康兆, ?~1010)는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1부대는 동주(銅州) 또는 통주(通州)와 가까운 산에 진을 쳤으며, 1부대는 동주성에 붙여 진을 치고 자신은 삼수(三水)에 영을 세워 지휘를 했다. 고려는 거란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삼수채와 같이 강을 이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이다.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7회, 거란의 기병을 막는 고려군 (출처: KBS)


고려는 검거(劍車) 등을 이용하여 초반 전투에서 거란을 막아내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한 강조가 방심을 한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는데, 당시 강조의 패전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강조가 거란군의 진입이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질지 몰랐다고 하는 사실이다. 『고려사』에는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는 보고를 강조가 믿지 못했다고 기재되어 있을 정도이다. 거란 기마병의 신속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가 승자로 남은 이유


학자에 따라 고려와 거란의 전쟁 횟수에 이견이 있지만, 고려와 거란이 전쟁은 크게 성종(成宗)과 현종(顯宗) 대에 걸쳐 크게 2차례로 구분할 수 있다. 성종 대 양국의 충돌은 993년 10월에 가서 있었는데, 같은 해 윤10월에 가서 서희(徐熙)와의 회담 끝에 거란군이 회군하면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된 반면, 현종 대의 침입은 현종 원년인 1010년 10월에 시작되어, 현종 10년인 1019년 2월까지 대략 10년 동안 이어지는 장기전 양상을 띄었다. 현종 대 전쟁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라는 거란 장수가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했다가 다음 해인 1019년 2월에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 등에 의해 대패를 당하며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가 우리가 잘 아는 구주대첩이다(‘귀주’대첩이라고도 하는데, ‘龜’가 ‘구’와 ‘귀’ 두 가지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龜城’을 ‘구성’이라 발음하는 것을 고려하면, ‘구주’로 부르는게 좀 더 맞을 듯하다).

거란의 기마를 이용한 빠른 속도전을 막기 위해 고려는 들판을 깨끗하게 비우는 청야(淸野)와 더불어 지형지물을 이용한 수성전(守成戰)을 사용하였다. 『요사』를 보면, “고려가 작은 나라이지만 여러 차례 요의 군대에 피해를 입혔으니 이는 험난한 지형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는 언급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가 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거란의 기마병으로부터 승리 여부가 달려 있었던 셈이다. 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전술은 고려 이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것이었으며, 유목민족인 거란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1010년 거란 내에서 전쟁에 관련한 논의를 할 때, 거란의 신하 소적열(蕭敵烈)이 고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성과 보루가 완전하고 굳건하므로 무력 충돌보다는 사신 파견을 통해 죄를 물은 다음에 전쟁을 해도 늦지 않다는 전쟁 불가론을 편 것에서도 확인이 된다.

실제 거란의 우려대로, 거란은 산성 안에 웅거하며 공격을 막아내는 수성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뤘다. 거란이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한 곳 가운데 한 곳이 평안도에 소재하고 있던 흥화진(興化鎭)이었다. 흥화진은 의주를 거쳐 개경으로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란이 빠르게 고려를 공격해 압박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흥화진 성에서의 수성전은 1010년 거란 성종이 친정을 했을 때 빛을 발했다. 흥화진성이 함락되지 않자, 거란은 흥화진의 고려 군대가 거란의 후미를 공격할 것을 우려해 무로대라는 곳에 20만의 군사를 남겨두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즉 거란은 흥화진 성에서 시간을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력을 온전히 집중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에 고려는 거란군의 분산을 통한 전력 약화와 방어를 좀 더 치밀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6회, 처참한 흥화진의 풍경 (출처: KBS)


현종 5년에도 거란은 소적열이라는 장수를 보내와 통주와 흥화진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를 막아선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의 활약으로, 7백여 명의 병사를 죽이고, 도망치다 강물에 빠져 죽은 이들도 매우 많았다. 또 현종 8년(1017)에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이 흥화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9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고려의 장군 견일(堅一)·홍광(洪光)·고의(高義)에 의해 큰 패배를 입어야만 했다. 흥화진 전투는 수성전의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성전과 함께 고려가 중요하게 사용한 전술은 청야(淸野)였다. 청야란 앞서 언급한 대로 들판을 깨끗이 비워두는 것이다. 실제로 싸움을 하기보다는 식량 등의 보급이 이루어질 수 없게 하며 시간을 지연시켜 적의 전력 약화를 꾀하는 전술이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먹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속도전을 해야 하는 거란의 입장에서 말에게 먹일 여물의 부족은 큰 타격이었다. 거란은 기본적으로 타초곡(打草穀)이라 하여 별도 보급을 받지 않고 현지에서 식량과 마초를 공급받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따라서 청야는 거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방어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1010년 현종은 친조를 명분으로 거란의 회군을 요청하는 전략을 펴며, 나주로 피했는데, 이후 고려 군대는 청야전술을 쓰며 험한 지형의 성에 웅거해 버티기에 돌입했다. 결국 거란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또 1018년에는 소배압이 신은현(新恩縣), 즉 황해도 신계까지 들어오기는 했으나, 현종은 직접 나서 서울 밖에 있는 민가를 성내로 들어오도록 명하며 청야전술을 활용하였고, 결국 최종 승리는 고려의 몫이 되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고려가 거란의 기병 전술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1019년 2월의 전투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거란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때)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의 군주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소손녕(蕭遜寧)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권3. 현종 10년 2월 기축).

이 기록은 1019년 구주에서 있었던 전쟁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고려군이 구주의 동쪽 교외에서 거란군과 대치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주 또는 귀주대첩이라 부르는 전쟁이다.


〈기록화: 귀주대첩〉 (출처: 전쟁기념관)


이 전투는 앞서 언급한 수성책과는 다른 형태의 전투 장면을 보여준다. 고려군이 구주 동쪽 교외에서 맞서 싸웠다거나, 비바람을 이용한 고려군의 공격에 거란군이 달아나자 이를 쫓아가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기마병 중심인 거란군과 직접 부딪쳐 싸웠다거나 도망가는 적들을 쫓아갔다는 것은 고려 또한 기마병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거란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려가 거란의 장점인 기마술을 습득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인 셈이다.

고려군의 공격으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거란군의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고려가 노획한 포로, 말과 낙타 그리고 갑옷과 투구 및 병장기가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대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조선 시대 『성종실록』(성종 8년 9월 경진)에는 ‘구주 동쪽 교외에서의 싸움에서 거란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姜邯贊)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귀주에서의 패배가 거란에게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 나라 군주인 성종 칸이 소손녕(소손녕의 형인 소배압의 오기)에게 낯가죽을 벗겨낸 후 죽이겠다는 폭언까지 할 정도였다는 데서 살필 수가 있다. 고려가 구주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고려의 장기인 수성과 청야전술의 적극적 활용과 더불어 상대방의 장기인 기마술까지 익힌 것이 크게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적의 장기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배우는 고려의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싸움의 결과는 송나라 신하 부필(富弼)은 ‘하북수어십이책(河北守禦十二策)’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천성(天聖, 천희(天禧)의 오기) 3년(1019)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해 감히 공격을 못할 정도로 고려의 대승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전쟁 당사자가 아닌 제3국 인물의 평가이니, 객관적이라 봐도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실제로 이후 양국 사이에 외교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란은 대규모 군사행동은 감행하지 못했다.

실제로 거란은 1301년 5월부터 1033년 이전의 덕종 재위 기간 중에 고려 공격을 위해 송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이 있었다. 이때 양국은 압록강 이동 지역에 거란이 점유한 땅의 반환 문제로 인해 충돌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송은 인종(仁宗, 1022∼1064)이 재위하고 있었는데, 인종 즉위 후 10여 년간 섭정을 하고 있던 명숙태후(明肅太后, 970∼1033)가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신하인 여이간(呂夷簡, 979∼1044)의 반대로 군사 연합은 성사되지는 못했다.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거란이 송에 연합을 요청했다는 것은 거란이 ‘절대 강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고려를 두려워해 거란이 무력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구주에서의 승리가 가져다준 결과였다.




구주대첩에 대한 조선의 평가


고려 시대 거란과 전투에 공을 세웠던 이들은 조선 시대에도 추숭되었다. 평안도 선천군에는 1011년 정월에 거란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유백부(庾伯符)를 모신 삼충사(三忠祠)를 인조 23년(1645)에 다시 세웠다. 삼충사는 원래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그 후 있었던 여러 차례의 병란으로 인해 어느 순간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와서 다시 창건한 것이다. 세조 2년(1456)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조선 이전 공을 세운 장군들을 모실 것을 건의했다. 무성묘에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양규와 강감찬(姜邯贊)도 포함되었다(『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에 대한 추숭은 좀 더 이른 시기의 기록에 나타난다. 태조 원년(1392)에 마전현에 창건한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으며, 또 금천, 즉 지금의 경기도 광명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에도 배향되기도 하였다.


충현서원지 (출처: 충현박물관)


선조 대와 광해군 대에는 전조, 즉 고려 왕들의 묘를 재정비하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는 강감찬의 묘도 있었다(『선조실록』 권146, 선조 35년 2월 무진․『광해군일기』[중초본] 권25, 광해 2년 2월 임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54)은 『해동악부(海東樂府)』의 「금화팔지가(金花八枝歌)」에서 “살았을 땐 백성들의 부모와 같았었고, 죽어서는 고종(瞽宗: 중국 은나라 때의 학교)의 악조(樂祖: 예악을 주관하던 선현)가 되었다네… 천고에 이름 남을 그대가 있었구나.”라고 하며, 강감찬을 기리기도 했다.




집필자 소개

허인욱
고려 시대 대외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한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근대 시기 대외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다. 아울러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 등이 있다.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 (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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