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요건 몰랐지?

작품소개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이 깨알같이 파헤치는 스펙터클 버라이어티 조선 유랑기!

캐릭터 소개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 삿갓 김씨! 넉살좋고, 뻔뻔한 성격으로 만사태평하다.
하지만, 종놈 칠복의 식성을 감당하느라 등골이 빠진다.
단순, 무식, 팔랑귀에 식탐까지 두루 갖춘 종놈 칠복! 의리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지만, 여자 앞에선 처참히 무너진다.

작가의 말

웹툰 ‘요건 몰랐지’는 지난해 ‘스토리 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토리텔링하기 참 좋은 ‘나라’, 조선을 배경으로 왕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일상인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의 의미를 담긴 위해 기획했습니다. 평소 사극 매니아인 동생(이승훈 작가)과 저(장순곤 작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조선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을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이를 통해 풀어보려고 합니다.

작가소개

장순곤
장순곤
콘텐츠 개발자.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니켈로디언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
현재 애니메이션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 중.
이승훈
이승훈
콘텐츠 기획 및 제작자.
스폰지밥, 내 친구 아서, 코르토 말테즈, 키오카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배경, 콘티, 연출에 참여. 회사 생활 틈틈이 창작활동 중.
“ 부자간의 정이야 끝이 없지만, 운명을 어쩌랴 - 아들이 끝내 숨을 거두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10-24 ~ 1617-01-28
1616년 10월 24일, 복이(福伊)가 산양(山陽)에서 돌아와서 김택룡은 그 곳에 사는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들의 병은 차도가 없지만 음식은 조금 먹는다고 하며, 또 그 집에 사위를 맞이하는 날짜를 아직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11월 13일, 금복이가 이틀 전 11일에 산양에서 김택룡이 있는 곳으로 왔다. 오면서 아들 김적의 편지를 가져다 주었는데, 편지에 의하면 적의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다고 하며 손녀의 혼사도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 늙은 아비, 아들의 무덤 앞에서 제문을 읽고 슬피 울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7-04-16
1617년 4월 16일, 아침에 김달가 · 중소 · 예막 등이 어제 장례가 끝난 김적의 묘소에 올라갔다. 이제 출발하여 돌아가려면 성묘를 하고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묘소에서 돌아와 조식제(朝食祭)를 지내고 행장을 꾸려 떠나기 전에, 김택룡은 새로 주과를 차려 아들의 신주 앞에 술 한 잔을 올리며 제문을 읽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정사년 4월 15일 너를 장례 치른 다음날 아침 늙은 아버지는 아들 적의 영전에 고한다. 네 몸은 한곡으로 돌아가고 혼은 산양에 돌아가기에 술 한 잔 따르고 영혼을 위로한다. 중소는 네 신주를 받들어 돌아가고 중렴은 여기 남아 때때로 네 묘를 보살피며 글자를 배우게 하는데, 평소 네 소원에 부합하려는 뜻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라.’ 라고 했다. 김택룡은 슬픔을 다하여 곡했다.

“ 출가한 딸의 와병 소식에 잠을 설친 아버지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2-05-20 ~ 1612-07-24
1612년 5월 20일, 오천(烏川)의 사위 집에서 김택룡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편지에는 딸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김택룡은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5월 25일, 김택룡은 오천(烏川)에 가서 아픈 딸을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5일 뒤 5월 30일, 김택룡은 오천으로 가기 위해 식사를 마치고 출발했다. 오천에 도착해 판사(判事) 김지(金址)와 상사 김평 · 김령(金坽)을 만난 다음, 탁청정(濯淸亭)에 내려가니 좌수 김호(金壕) 어른과 사위 김광찬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택룡은 집으로 들어가 딸을 보고 병에 대해 물었다. 오늘부터 소뿔로 배꼽에 뜸을 떴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저녁을 먹고 나가서 김부생(金富生) 과 사위 김광찬과 함께 정사(亭舍)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여독 탓인지 아픈 딸에 대한 근심 탓인지 매우 피곤하여 밤새도록 뒤척였다.

“ 산사에 들어가 공부하는 아들 뒷바라지 - 책과 음식, 그리고 편지를 보내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03-02 ~
1616년 3월 2일, 이재창(李再昌)이 영천에서 와서 김택룡에게 둘째 아들 김각이 부석사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3월 9일, 김택룡은 아들 김각의 편지를 받고 잘 있음을 알았다. 아들은 부석사에서 『주역』을 읽고 있다고 하였으며, 수 백 번은 더 읽고 나서야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다. 흥남(興男)도 부석사에서 내려와서 김택룡에게 아들 각의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3월 11일, 딸의 혼사 때문에 김택룡은 아들 김각에게 편지를 쓰고, 『주역상경언해(周易上經諺解)』 두 책을 보냈다. 3월 18일, 부석사에서 김각의 편지가 왔다.

“ 둘째 딸의 혼례 준비 - 비용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03-20 ~ 1616-03-24
1616년 3월 20일, 김택룡은 둘째 딸의 혼사에 쓰려고 쌀을 내다 팔았다. 그리고 네 장의 편지를 써서 명금이를 예안으로 보내 아들 김숙 · 생질 정득 두 곳과 영천 이영도 · 유사 이의적에게 전하도록 했다. 또 청송 부사 박이장(朴而章)에게도 편지를 써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 혼인에 쓸 재물을 청했다. 4일 후 3월 24일, 김택룡은 딸 혼사가 진행 중이며 또 27일날 예식을 올려야 하는데 여지껏 혼례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내심 불안하였다. 그는 부득이하게 영천(榮川, 지금 榮州) 군수에게 부탁의 편지를 썼다. 더불어 □□, □□ 등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또 편지를 써 노비 풍종이에게 주며 군(郡) 내 김효선(金孝先)에게 가 꿩을 구해보도록 시켰다. 그런데 모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더욱이 군수는 국기일(國忌日)이라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할아버지의 매 - 공부를 게을리 한 손자에게 매를 들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2-07-19 ~ 1617-08-10
1612년 7월 19일, 김택룡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7월 20일, 김택룡은 집에 있으면서 소장 서적을 점검하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들 대생 등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1616년 11월 27일, 김택룡이 집에서 아들과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617년 5월 12일, 김택룡은 중길 형제가 와서 배알하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억지로 불러다 글을 가르쳤다. 5월 14일, 김택룡은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5월 19일, 여러 아이에게 혹은 몽학서(蒙學書), 혹은 『사기(史記)』를 가르치고, 또 제부[製賦, 賦를 짓는 것]를 가르쳤다. 8월 4일, 김택룡이 집에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 김각과 중길·중괴·중렴 세 손자의 독서를 가르쳤다. 8월 8일, 김택룡은 또 집에서 아들 김각과 손자 중길·중연·중렴을 가르쳤다. 8월 10일에는 학문에 게으르고 독송(讀誦)을 열심히 하지 않는 손자들에게 김택룡이 매를 때렸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