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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뒷모습을 조심하라

홍윤정


종종 사회면에 등장하는 아동학대 뉴스를 볼 때마다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의 통증을 느끼곤 한다. 물론, 물리적 통증이 아닌 정서적 통증이지만,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실제의 그것에 못잖고, 완전한 회복도 난망해 보인다. 그 통증은 피해 아동들에 대한 측은지심이나 어떻게 저런 일들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분노 때문이 아니라, 나 역시 내 아이들을 함부로 다룬 적이 있다는 죄책감에서 기인한다.


(출처 : 네이버 법률, [카드뉴스] ‘아동학대’)


결혼해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스스로 온유하고 무던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니 나도 모르던 제2의 나, 성급하고 잔인하고 파괴적인 하이드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폭언은 물론이고 체벌(그것도 나름의 규칙에 따른 절도 있는 체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손부터 나가는), 물건 던지기, 자학에서 발광까지..... 아이들을 학대한 나의 흑역사는 참으로 다채롭기만 하다. 기억력 좋고 말발까지 센 둘째 아이는 지금도 살짝 패인 거실 마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내가 던졌던 연필깎이에 대한 추억을 잔잔하게 회상하곤 하니,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싶었다.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존경받으면서, 그렇게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고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난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상처를 준 사람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 대학원에서 상담공부를 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것도, 사람이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꽤 오래 간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홀어머니 슬하에서 수많은 체벌과 억압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가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듣거나, 스킨십으로 표현된 사랑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도 별반 불만이 없었다.

요즘은 육아 정보도 다양해지고 ‘인권’에 대한 의식도 높아졌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며 부모 자녀간의 애착형성과 스킨십을 진리처럼 신봉하고, 적절한 칭찬과 훈육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변한 건지 사회가 변했기 때문인지,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의 마음은 날로 공허해지는 것 같다.

몇 년 전 TV에서 6 ~ 8 세 정도의 어린이들을 데려다놓고 어른들의 질문에 답하게 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중 질문 하나는 ‘돈은 없지만 시간이 많아 자녀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부모님과, 시간은 없어서 못 놀아주지만 돈이 많은 부모님 중 어떤 부모님이 좋은가.’ 였다.

자, 어른들이여, 과연 어린이들이 어떤 답을 했을까 추측해보시라. 어린이들의 답은 만장일치였다. 과연 전자일까 후자일까.

답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 답을 고른 어린이들의 부연설명에 난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이 시간이 많아도 돈 없으면 뭘 할 수 있어요? 같이 구걸해요? 돈이 많으면 평소에 못 놀아줘도 나중에 외국여행을 갈 수도 있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잖아요.”


(출처 : JTBC 프로그램 [내 나이가 어때서] 방송 장면)


충격과 더불어 진심 슬펐다. 나는 그간 내 아이들이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해도 건강하고 화목한 우리 가정에 나름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근거없는 믿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죄인이었구나. 급식비 자동이체 통장에 잔액이 없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소리 들었던 딸에게 아무리 “어른이 들어오시면 현관에 나와 인사해야 한다”고 가르쳐봐야 우이독경이었겠구나. 고개를 끄덕여 준 것도 그저 귀찮아서였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만의 충격은 아니었는지, 사회자와 어른 패널들 모두 “아, 그래요오.”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번 호의 주제인 ‘가정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여러 미디어 자료들을 훑어본 결과,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우리의 미디어 속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긍정적 가르침을 주는 장면이 별반 없다는 사실이다. 흔히 보는 막장 드라마는 말 할 것도 없고, 사극, 시대극에서조차 한국의 부모는 자녀를 억압하는 존재, 순수한 사랑이나 고귀한 이상을 방해하는 매우 속물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었다. 간혹 자녀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들도 직계 부모님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것도 주로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닌 동네 슈퍼 할머니나, 지나가는 할아버지다.

‘어른’과 ‘부모’에 대한 일반 대중의 감각은 언제 이렇게 메마르고 강퍅해졌을까. 왜 우리의 어른들은 존경받기보다 조롱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었는가. 어른들은 억울할 법도 하다. 팍팍한 역사를 지내오는 동안, 내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악다구니 쓴 죄밖에 없는데. 자식이 나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았으면 해서 ‘남들 잘 때 공부해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상대방이 한 대를 치면 넌 두 대를 쳐라, 그래, 하면 된다.’라고 가르쳐 온 죄밖에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그렇게 살아온 어른들이, 우리들이, ‘돈 있는 부모가 제일’이라는 아이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모들은 대개 몰상식하고 몰이해한 작금의 형태로 완성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완벽을 요구하는 부모와 그로 인해 엇나간 자식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이라고 해서 모두 공부를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조는 왕들 중에서도 특히 공부에 골몰한 인물이었다. 요즘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해치]를 보고 있자니, 영조가 왜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출처 : 영화 [사도] 장면)


틈만 나면 ‘천출’이라고 멸시하고, 다른 왕을 옹립하려는 신료들 사이에서 영조가 믿을 것은 자신의 실력 외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영조가, 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향해 걸출한 인물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기대에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세자의 영특함을 자랑스러워했고,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세자를 중전의 양자로 삼아 동궁에서 교육하도록 한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세자를 너무 이른 나이에 생모와 떨어뜨려 불길한 곳(경종과 선의왕후가 기거하던)에서 키운 것이 화를 키웠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영조는 곧잘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세워놓고 질책하고 망신을 주곤 했다. 아마도 그렇게 세자를 자극하면 더욱 공부에 정진할 거라 생각했을 게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사도세자는 10세 이후 점차 공부를 멀리 하게 되며 영조를 실망시킨다. 세자의 글 읽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자 영조는 세자를 가르치는 보덕 김상철에게 묻는다. “세자가 내 앞이라 긴장이 되어 그러나보다. 평소에는 글 읽는 소리가 어떠하였는가?” 김상철이 “평소에는 크게 잘 읽으십니다” 하고 답하였다. 영조가 이번엔 세자에게 “12시진(하루) 안에 네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정도 되느냐?” 묻는다. 그때 세자의 대답이 ‘1~2시진(즉 2~4시간 정도)’라 하자 응교인 조재민이 당황해 “12시진을 아마 깨닫지 못하신 듯 합니다.”라 거들었다. 그러자 세자가 “알고 있습니다.” 라고 확실하게 답한다. 영조는 ‘마음을 속이지 않으니 정직한 대답이다’라고 칭찬했지만, 아마도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지 않았을까.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보이는데, 무서운 아버지 앞에 위축되어 눈치를 보며 답하는 사도세자의 모습이 안타깝다.


(출처 : SBS 드라마 [해치] 장면)


이와는 반대로 좋은 가정교육의 전형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다. 2017년 방송된 [사임당, 빛의 일기]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맞다.

사임당이 좋은 어머니인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인데 이런 좋은 어머니 사임당도 후에 율곡으로 알려진 아들 현룡의 손목을 잡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중부학당에 간다. 그리고 거기서 맞닥뜨리는 인물이 휘음당을 비롯한 치맛바람 일으키는 명문가 부인들이다. 휘음당은 미천한 신분을 세탁하고자, 남편에게 굴종하며 자식교육에 목을 매는 인물이다. 휘음당은 현룡의 아버지 이원수가 20년간 급제도 못한 ‘낙방거사’라며, 현룡이 중부학당에 있을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모욕을 준다. 그때 사임당은 휘음당과 치맛바람 부인들을 향해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을 봐주고 항상 웃게 해주는 더 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따뜻한 아비’ 라며 남편을 두둔한다.

아이들이 곶감을 훔치다 들켜 회초리를 들자 아이들은 ‘배고파서 그랬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며 눈물을 흘린다. 사임당은 상처받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른다. 남편이 사기를 당해 기와집을 팔고 산 황량한 땅이지만 그곳에 서서 눈을 감고 자신 이 꿈꾸는 땅을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그 땅에 꽃과 나무를 심고 집을 짓는 상상으로 즐거워한다.


(출처: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방송 장면)


남편의 외도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 받았을 때에도 사임당은 ‘이것은 어른들 사이의 문제일 뿐,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어미에게도 잘못이 있다.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롭게 만들었다’며 끝까지 아버지의 잘못을 감싸고,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감동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사임당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교육철학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 화제를 일으키며 방송되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는 마치 사임당과 휘음당을 현대로 옮겨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은 대조적인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이수임과 한서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좋은 부모의 표본처럼 보였던 이수임보다도 사람들이 더 공감했던 인물은, 딸을 서울의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과 편법도 마다 않던 주인공 한서진이었다. 한서진 역시 휘음당처럼 가난한 순댓국집 딸이었다는 과거를 숨긴 채, 이름까지 바꿔 우아한 사모님 노릇을 했는데, 그 자신, 시어머니로부터 엄청난 무시와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대중들은 한서진의 몰락을 바라는 한편, 열렬한 공감을 표했다. 3대째 의사가문을 만들겠다는 시어머니의 뜻에 순종하며 악행도 마다 않았던 한서진, 그리고 그에 못잖은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남편. 큰 딸 예서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공부에 목숨을 거는데, 평범한 중학생인 둘째 예빈이는 그런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환멸을 느낀다. 자신의 혼외자의 존재도 모르고, 결국 그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버지에게 예빈은 “아빠가 사람이야? 아빠가 사람이냐구.” 울음 섞인 목소리로 질타한다.


(출처 : JTBC 드라마 [SKY캐슬] 방송 장면)


우리가 행동하지 못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은 앞에서 하는 수백마디 말보다 행동하는 뒷모습으로 전해진다. [스카이캐슬]의 예빈은 부모가 해주는 비싼 값의 사교육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에서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어른들의 뒷모습이 멋지면 아이들은 따라서 변한다. 아이들을 나무라며 연필깎이를 집어던지고 화내던 부끄러운 내 모습에서 내 딸이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어버이 연X'과 ’어머니 부X'라는 숭고한 이름을 달고 일그러진 뒷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과연 누굴 가르칠 수 있을까. 어른들은 그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행동할 뿐이다. 가정교육은 아이보다 어른들 먼저 스스로 행하는 것으로 방향전환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우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수많은 예빈이들이 ‘부모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존재고, 가정이란 참으로 따뜻한 것’이라 느낄 수 있도록.





작가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8-24~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백곡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꾸준함의 중요성을 배우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0-12-24 ~

1800년 12월 24일, 맑은 날씨였다. 오늘은 명동에 사는 백곡 할아버지가 류의목의 할아버지를 보러 왔다. 류의목이 인사를 올리자, 백곡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요즘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어떠한 책을 읽고 있는지 등등을 물으셨다. 류의목이 대답하자, 백곡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리곤 류의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일을 할때는 그치지 말고 꾸준히 해야 성취가 있는 법이니라. 예전 계미년에 온 고을에 천연두가 번진 일이 있었다. 내가 천연두를 피하여 정동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마을을 터놓고 이야기할 벗도 하나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였는데, 무엇인가라도 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버들 수십 묶음을 얻어 새벽에 일어나 저물때까지 자리를 짰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서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를 다 만들 수 있었지. 이후에 이와 같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중에는 제법 속도도 붙었지. 이리하여 꽤 많은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마침 식량이 다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만든 자리를 장에 가서 내다 팔아서 쌀과 보리를 얻었는데, 이 식량이 꽤 많아서 천연두가 가시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오히려 남는 것이 있을 정도였지. 또 그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서 삼을 꼬는데, 내가 보니 밤새 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삼을 꼬다 남은 자투리가 버려지고 빠진 것들이 꽤 많았다. 이리하여 내가 아침 나절에 일어나서 버려지고 빠진 것들을 줍기를 여러 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돌아갈 무렵에 모은 양을 보니 열 묶음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베틀로 중포를 짜니 세 필이나 되었다. 일이란 모두 이와 같아서, 하루하루 할 때는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꾸준히 해가다 보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다’ 라고 감탄하셨다.

“공부를 게을리하다 할아버지께 지팡이로 맞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9-17 ~

1801년 9월 17일, 맑은 날이었다. 오늘 류의목은 『서경』 문후지명을 읽었다. 밤에 법산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 무척 반가웠다. 보통 밤시간에는 독서를 하며 공부하였는데, 오늘은 책 앞에 앉지 못하고 칼로 감을 깎으며 법산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평소부터 익살이 많던 법산 아저씨인지라, 이야기를 듣다가 곧 웃고 떠들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평소 할아버지는 이 시간이 되면 늘 밤을 틈타 몰래 엿들으며 류의목이 공부를 하는지 여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문틈으로 류의목의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자, 문 밖으로 류의목을 부르더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매질을 하였다. 아울러 법산 아저씨를 향해 크게 책망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엄준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이 웃고 떠들며 하는 말이 서경에 있는 내용이냐?’ 라며 심하게 질책하셨다. 질책을 받는 동안 법산 아저씨는 방안의 벽 모퉁이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떨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명을 들을 뿐이었다.
한참 훈계를 하신 할아버지가 떠나시자, 비로소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은 다시 자리에 낮을 수 있었다. 한참 혼인 난 후라 바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였다. 법산 아저씨는 류의목에게 매우 미안해 하였는데, 실상 류의목 역시 같이 재미나게 어울렸던 터라 법산 아저씨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법산 아저씨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내가 내일 어찌 사람들을 보겠는가’ 라며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였다. 류의목은 비록 할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큰 일은 없을 거라 법산 아저씨를 위로하였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공부 시간에 잡담을 나누는 본인에게 큰 실망을 느끼며 밀려드는 자책감에 민망하였다.

“6살 아이가 성리학을 묻다”

朱子大全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장흥효, 경당일기, 1624-01-07 ~

1624년 1월 7일, 제자들이 몇 년째 자신을 찾아오면서 혼자 하는 공부를 넘어 함께 하는 공부로 발전하였다. 무릇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든 것을 혼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고 하여도 읽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주석서를 내었고 주자는 그것을 자기 관점으로 다시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
장흥효도 나름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황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점을 제자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사달(四達)이라고 불리는 이제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와서 묻기를 “땅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라고 하기에 그는 “하늘에 붙어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단순하게 땅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질문 자체가 놀라웠던 것이다.
아이는 장흥효의 답변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늘은 어디 붙어있습니까?” 장흥효는 “땅에 붙어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일기에 총명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외손자인 이휘일로 이황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불리는 이현일의 형이 된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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