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황해도 해주 한 여염집, 바깥채 마루에는 이 지역 지주이자 집주인인 아버지와 그의 열 살 남짓한 아들이 마주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악 그의 첫 술잔을 건네준 참이었다. 정갈한 이맛전과 고운 눈썹, 영롱한 눈빛의 소년은 아버지가 내린 술잔을 맛나게 받아마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백의 시 ‘정야사(靜夜思)’를 주거니 받거니 함께 읊었다.
牀前看月光 침상에 누워 달빛을 바라보노라니
疑是地上霜 땅 위에 서리가 내린 것이 아닌가 싶었네
擧頭望山月 고개 들어 산 위에 뜬 달을 바라보고는
低頭思故鄕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미륵이라 불린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모두들 나쁜 시대가 왔다고 한다. 그러면 너는 말해주거라. 그것은 조금도 나쁜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그의 육체는 말과는 달리 새로운 시대를 견딜 수 없었나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오래지 않아 병을 얻어 눈을 감고 말았으니. 아들의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나고 조선이란 나라처럼 격랑 속으로 던져진다. 독학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명으로 일경에 수배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어머니의 강권도 있었고, 자신의 오랜 꿈이기도 했던 구라파 유학을 위해 그는 압록강을 건넌다. 상하이, 싱가폴, 아프리카, 수에즈 운하, 프랑스 마르세유항... 오랜 여정을 거쳐 독일에 도착한 것이 1920년. 그는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고, 1950년 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문학을 강의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쫓겨 온 그에게 또 다른 나치즘의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독일 역시 고향이 될 수 없었다.
이 드라마는 2009년 SBS 창사특집 3부작으로 방송된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미륵(본명 이의경)박사의 자전적 소설인 동명의 책이다. 독일어로 씌여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원제 : Der Yalu Fliesst)]는 1946년 발표 당시 20세기 최고의 명문이라는 독일 문단의 극찬과 함께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SBS 창사특집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의 장면들 (출처:서울신문_압록강은흐른다_2008.11.15.)
나 역시 어린 시절 소 등에 탄 소년 아이가 피리 부는 표지그림이 있는 범우사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자랐다. 전혜린이 번역한 문장은 정갈하고 아름다웠으며, 소설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이미륵이 조용하고 고집스러운 소년이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 소설은 고향을 떠나온 이미륵이 내내 고향에서 온 소식을 듣기 위해 우체국을 들르다, 처음 들은 소식이 바로 어머니의 부음임을 알리며 조용히 끝이 난다. 서늘하고, 허탈하고, 그리고 맑다. 마치 눈물처럼.
반면 드라마는 압록강 마을에서 평생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의 시점과, 독일에서 이박사를 연모하고 그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제자의 시점 등을 가미하면서, 이미륵박사의 죽음 이후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가 죽기 전, 고향의 쌀밥이 가장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에선 울컥 눈물이 솟기도 한다. 그러나 미륵은 압록강을 다시 보지 못하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미륵과는 달리 이방인의 삶을 극복하고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온 이가 있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 최서희 역시 할머니와 아버지 최치수의 죽음 이후 아귀처럼 달려드는 주변인과 일제의 압박으로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어 쫓기듯 간도 용정지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최서희에게는 길상, 공노인 같은 충성스러운 주변인들이 있었다. 또한 최참판의 자손으로서, 그녀가 갖고 있던 지혜와 결단력이 그녀를 거부로 만들어주었다. 사실 서희의 이런 성공은 쉬운 게 아니었다. 당시 기회의 땅이라 선전한 동시에, 황량한 땅의 대명사였던 간도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절망하고 스러졌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동 평사리로 되돌아온 [토지]의 최서희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속 히로인인지도 모른다. 수없이 드라마 혹은 영화로 만들어진 [토지]에서 누가 서희 배역을 맡느냐가 항상 큰 관심거리였고 서희를 거쳐간 여배우는 반드시 스타가 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토지의 서희역을 맡은 한혜숙, 최수지, 김현주 (왼쪽부터)
(출처:경향신문,[스포츠칸]드라마로도 사랑받은 ‘토지’..서희역 ‘빅스타’발돋움)
‘토지’란 한국인에게 있어 삶의 터전이자 존재 의의가 된다. 서희는 그런 토지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해 ‘이방인’으로 떠도는 남편 길상을 지지하고 기다린다. 시계바늘이 열심히 돌아도 중심축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것처럼, 토지는 우리 마음의 중심축이다. 우스갯 소리 같지만 한국인의 부동산 사랑에는 유구한 역사와 혼이 배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하 드라마 ‘토지’의 이미지 (출처:SBS)
서희처럼 고향으로 돌아오는 또 하나의 인물은 ‘거시기’다. 이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주었던 웃음 못지않게 비참했던 그의 삶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거시기’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과 [평양성] 모두에 나오는 인물이다. [황산벌]에서 그는 징집되어 홀어머니와 눈물의 이별을 하고 백제의 결사대로 전쟁에 참여한다. 비록 패배한 전쟁이었지만 목숨만큼은 구해 고향의 어머니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 평양성 전투에 거시기가 또 끌려가게 된다. 거시기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을 또 끌어가면 어떡하냐”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향해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소리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 (출처 : 네이버포스트_EBS영화_2016.05.14.)
두 작품은 김유신, 김춘추, 연개소문, 계백, 당태종 같은 왕, 장군들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부분을 거시기에 할애한다. 거시기는 화자인 동시에 관객이다. 그는 늘 ‘집에 가서 엄니 만나야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의 목표는 무조건 살아남는 것,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다. 거대한 외부 환경에 휘말리는 작은 개인의 이야기에 애정을 갖고 천착해온 이준익 감독은, 거시기가 나오는 장면마다 신선한 유머를 곁들여, 정치와 밥, 인간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양성]에서, 고구려군에 잡힌 거시기가 그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대신라 회유방송’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시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나 보성 옆에 있는 벌교에서 온 거시기여. 우리 백제는 망해부렀어, 줄을 잘못 서갖고. 나가 백제왕 밑에서도 살아보고 신라왕 밑에서도 살아봤는디 고놈이 고놈이고 다 거기서 거기여, 도진개진이라 이말이여. 까놓고 말혀갖고 요 전쟁 누가 이기든지간에 우리허고는 아무 상관없어. 전쟁에 이기면 고 윗대가리들이나 좋지 우리한테 떨어지는 거 아무것도 없어. 문디(전쟁터에서 만나 아웅다웅하는 신라 출신의 병사)야, 너 듣고 있재? 너 전쟁터서 출세할라고 그러지? 근데 뒈져버리면 전쟁하다말고 뭔 소용 있간디? 너 거기서 살아돌아갈라믄 시방 나가 하는 말 잘 들어라.
- 중략 -
뭐시기(같은 백제출신으로 돌격대에 끌려온 어린 병사)도 맥없이 맞아서 뒈져버리고잉.. 나도 곧 뒈질 건디, 나 뒈져버리면 우리 엄니는 어뜩해. 엄니! 엄니! 엄니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의 한 장면 (출처:네이버_포토뉴스_이준익 감독의 ‘평양성’, ‘황산벌’ 넘는다)
시종일관 웃음을 주었던 거시기의 비통한 절규는 아마도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주제가 아닐까.
거시기는 결국 고구려 여인과 혼인까지 하고, 아내와 함께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간다. 김유신도, 김춘추도, 연개소문의 아들들도, 당나라 군대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황산벌]과 [평양성]은 삼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인간 거시기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구려 아내와의 혼인 자리에서 주례는 이렇게 말한다.
“백제 출신 거시기가 신라군으로 출전하여 고구려 색시를 얻었다.”
거시기는 그야말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 글로벌리스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기가 원하는 삶은 그저 ‘고향에 돌아가 내 사람과 함께 한 줌 땅 일구며 알콩달콩 사는 것’ 뿐이었으니.
[압록강은 흐른다] 드라마 초반 인용했던 이백의 ‘정야사’는 중국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외우는 시라고 한다.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이백이, 2년이 지나도록 관직에도 못 나가고 돈도 다 떨어져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어느 달밤에 고향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시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은, 모두의 마음속에 고향 혹은 어머니란 존재는 언제나 그리운 이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몸이 고향에 있어도 고향이 그리운 것 같은 마음은(마치 너를 보고 있어도 네가 그립다는 말처럼) 신(神), 혹은 모태로부터 분리된 인간 존재 자체의 고독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자면 우린 모두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근원적인 고독을 떨치고자 그렇게 고향을 찾고 어머니를 찾는지도....
산에 올라본 이들은 안다. 길손들은 서로 오이도 나눠주고 물도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코스 정보를 나누고, 잠시 동안의 여유도 함께 한 후, 다시 일어나 자신만의 산행을 묵묵히 계속한다. 산은 늘 거기 있고, 우리 모두 그 험한 산을 잠시 빌려 오가고 있음을 안다는 것, 그것이 서로를 공감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이 땅의 주인은 따지고 보면 아무도 아니다. 그런데도 땅을 확보하고, 그 땅에 나의 깃발을 꽂아 영원히 내 것으로 삼겠다고 달려가는 하루하루가 과연 맞는 것일까. 그저 한 줌 땅 잠시 빌려서, 거기서 나는 은혜와 풍요로움에 감사하며 즐거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 다른 이들의 밥이 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이방인들의 바람직한 자세다. 오가는 등산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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