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모는 여러 모로 아름다운 분이었다. 외모도 그렇고 솜씨도 그러했다. 이모의 손을 거친 음식은 그 누구의 혀도 단박에 사로잡을 정도로 맛났고, 음식의 꾸밈새도 단아했을 뿐 아니라, 그 음식을 담는 그릇, 접시, 물잔 하나까지도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모의 길고 보기 좋은 손끝은 바느질에도 그 진가를 발휘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던) 4학년 때, 뜬금없이 수예반에 들어간 내가 코바늘 뜨기를 시작하자 이모는 기막힌 수를 알려주셨다. 이모의 지도에 힘입은 나는 코바늘 뜨기에 재미를 붙여 일주일 내내 하얀 수건 가장자리에 멋진 레이스를 떠갔다. 수예반 담당 선생님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가 떠 간 부분을 주르륵 풀어버리셨다. “다시 해봐.” 하면서. 나는 이모로부터 특훈 받은 실력을 증명해냈으며 선생님이 감탄하신 건 물론이다.
코바늘 뜨기 (출처: 픽사베이)
중학교 가사 실습 시간에 수젓집, 베갯잇, 배냇저고리 등을 만들 때마다 이모의 보이지 않는 손은 나를 한층 더 우쭐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모가 대신 다 해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가정교사가 되어주셨다는 말이다. 남다른 만듦새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감동했고, 이모가 내 뒤에 있는 한 그깟 가사실습 정도는 우스웠다.
이모는 스스로를 꾸미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으셨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무슨 의식처럼 정성껏 머리를 빗고 부풀린 후에 핀으로 고정시켰는데, 우아하고 풍성한 이모의 머리는, 뛰어도 누워도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참으로 곱게 쪽을 찌셨을 것이다.
물론 이모의 그런 점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매사에 너무 깔끔하다 보니 결벽증에 가까운 행동으로 주변을 당황시키기도 하셨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서 악취라도 나면, 절대 참지 않고 즉시 “이게 무슨 냄새야!” 혼잣말을 지나치게 크게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있건 말건 “얘, 너, 여기 고춧가루 끼었다. 어서 빼.” 큰일이라도 난 듯 이쑤시개를 건넨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내 딸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지만 늘 “여자는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돼. 늘 좋은 향기가 나야 돼.”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바람에, 우리 집안 딸들은 꽤 힘이 들었다.
일흔 중반이 되어서도 이모부를 위해 하루 세 끼를 정성껏 차려내시던 이모는 어느 날 아침, 구토를 하며 쓰러지셨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시간이 꽤 지체돼, 왼쪽 뇌의 많은 부분을 드러내야 했다. 이모는 두 달 간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계셨다. 후에 깨어나셨을 때 언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이모를 보러 간 나와 어머니에게 “마늘....” 이라 중얼거리셨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모의 표정만으로도 그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모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나중엔 사람들이 가도 눈을 뜨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씹는 훈련도 거부하셔서, 배를 뚫어 영양분을 주입했다. 비싼 병원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깔끔했던 이모가, 냄새에 예민하고, 비위 약하던 이모가, 한쪽에선 식사를, 다른 쪽에선 변 처리를 해야 하는 병실에 누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채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거나, 눈을 꼬옥 감은 채 11년을 보내다 가셨다.
막상 이모가 돌아가셨다 생각하니 후회만 남았다. 눈을 뜨지 않으셔도 한 번 더 보러 갈 걸. 건강하실 때, 함께 식사라도 자주 할 걸...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괴로운 상념은, 병원측의 말처럼, 이모 뇌의 많은 부분이 제거된 데다, 치매 증상까지 있어 현실인식을 못하신 것이 아니라면, 11년 동안 누워서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그 괴로움을 어찌 하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상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2013년 11월 열린 수원교구 권선동본당 지역대항 연도대회 (출처: 카톨릭신문, 2018.11.25)
이모의 장례식은 생전 당신의 종교에 따라 천주교식으로 진행되었다. 빈소가 차려진 때부터 발인하는 순간까지 성당의 장례 위원들이 교대로 그곳을 지키며 보통 ‘연도’라 불리는 ‘위령기도’를 드린다. 우리나라 타령 같기도 하고, 불교의 독경 같기도 한, 매우 심플한 단조의 곡조가 끊어지지 않고 내내 빈소를 지킨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은 ‘성서’, ‘종’과 ‘성수’, ‘향로’ 등의 여러 도구를 사용한다. 원칙적으로 곡하는 것이 금지된 기독교에서, 며칠간 ‘곡’처럼 들리는 ‘곡조’ 속에 파묻혀, 종소리를 듣고, 향을 맡고, 관 주위를 돌고, 꽃을 드리는, 조금 번거롭다 싶은 의식을 치러낸 후 오는 피곤함으로, 내가 조금 위로받았다고 하면 불경한 일일까.
사실 게으른 나는, 매사 가급적 적은 노력으로 큰 효율을 얻는 게 최고라 생각해왔는데 개신교 장례절차는 이런 내 생각에 딱 들어맞는 매우 조용하고 간단한 형식이다. 빈소와 장지에서 드리는 몇 번의 예배에는 기도와 찬송가 간단한 말씀 전례가 있는데, 천국에서의 삶을 고대하는 기독교 교리 덕분에, 심하게 애통하거나 곡하거나 절망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장지에서, 타들어가는 관을 보면서도,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본질은 저기 관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하늘에 있다.’는 희망 속에서 담담히 슬픔을 참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막상 장례식장에서 슬퍼하는 유족들을 뵙고 나올 때면, 마음에 비해 간소한 예배 형식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미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개신교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한 형식의 천주교 절차에 따라 이모의 장례를 치르며, 장례란 결국 남아있는 이들을 위한 의식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만일 이모를 개신교식으로, 간소한 절차에 따라 보내드렸다면, 유족의 육체가 덜 피곤했던 만큼, 마음은 오래도록 더 허전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영화 〈축제〉, 1996
“유교는 다분히 현세적인 종교야, 아니 종교라기보단 말이야 하나의 생활계율이자 학문인 셈이지. 그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신이 죽은 조상이야. 살아서의 효는 계율이지만 죽어서의 효는 종교적 개념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 효가 얼마나 크고 엄숙한 것이야. 유교가 종교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장면 때문이야,”
“그렇다면 장례식은 그 규율과 종교가 만나는 접점이 되겠구만.”
“그렇지, 예전에는 3년 시묘살이까지 해야 끝났던 우리 장례의 복잡한 이치 그것도 따지고 보면 현세적 공경의 대상인 사람을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이전시키는 유교적 방식인 셈이지 제사는 종교적 효의 형식이고, 장례는 그 중 가장 진지한 효도의 형식인 셈이야.”
영화 〈학생부군신위〉, 1996
1996년 영화 〈축제〉에서 등장인물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임권택 감독이 만든 이 영화에서 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사람이 떠나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절차를 거치는지, 이를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얽히고설키며, 그래서 결국 죽은 자를 위한 장례가 어떻게 산 자들의 축제가 되어 가는지를 목격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박철수 감독 역시 같은 소재를 가지고 〈학생부군신위〉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축제>는 이청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학생부군신위〉는 황지우의 ‘여정’이라는 시가 그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영화에서 모두 속광으로부터 임종, 고복(초혼), 사자상, 부고작성 및 발송, 수시, 발상, 명정, 습, 반함, 염, 입관, 성복제, 영좌, 빈소설치, 발인제, 천구, 노제, 하관, 실토, 반혼, 초우제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고유의 유교식 장례풍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축제〉의 마지막은 산에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주인공과 가족들이 집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어머니보다 먼저 간 큰 형이 밖에서 낳아온 딸, 이전이나 지금이나 가족들 사이에서 왕따인 주인공의 조카 용순이 느릿느릿 나타난다. 이리 오라는 가족들의 손짓해 마지못한 척, 사이에 끼어 앉는 그녀. 다 함께 사진을 찍는데, 표정들이 하나같이 굳어있자, 보고 있던 동네 사람이 한 마디 거든다.
“무슨 초상났냐?”
그 말에 비로소 모두 와르르 웃는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 스톱이 걸리며 영화가 끝난다.
“할머니께서는 오늘 마지막 남은 나이를 다 나눠준 모양이라고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은지는 그 할머니의 영혼이 조용한 숨결을 타고 슬며시 은지네를 떠나시며 옷을 벗어 개어놓듯 곱게 벗어놓고 가신 하얗고 조용한 옛날 모습 앞에 몹시도 섭섭하고 슬픈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할머니의 영혼은 팔랑팔랑 하얀 날갯짓으로 올라가는 배추꽃나비 위에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은지는 그저 그 할머니의 영혼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새 아기로 태어나기를 마음 깊이 빌어드립니다. 할머니 고마워요. 안심하고 떠나세요. 할머니께서 저한테 나눠주신 나이는 제가 잘 맡아서 간직하고 있을게요. 그래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고나면 제가 할머니 대신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그 나이를 다시 나눠줄 거에요. 은지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아기 (출처: 픽사베이)
주인공 준섭이 쓴 동화의 마지막 구절처럼, 좋은 삶의 끝은 산 자들을 위한 것이다. <학생부군신위>의 모티브가 된, 황지우의 시 ‘여정’의 마지막 구절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산 자들의 삶으로 끝을 맺는다. 그들 역시 언젠간 죽을 테지만, 이 역시 삶이 아니던가.
이튿날, 바람 없고 맑고 찬 아침, 한 채의 꽃상여를 짓고 앞바다 솔섬으로 사람들은 건너갔다. 여인들은 물가에 남아 울었다. 섬의 부족한 흙으로 할아버지를 묻고 사람들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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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로
택시로
혹은 비행기로
모두들 일이 밀렸다고, 목포로, 광주로, 부산으로, 혹은 서울로, 혹은 엘에이로
삶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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