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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연애편지

2021년 한국의 여권파워 순위는 3위라고 한다. 여권파워 순위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국가의 수에 따라 결정되는 지수로, 우리나라는 지난 몇 년간 2~4위를 오가고 있다 한다. 다른 나라에 입국할 때 긴 줄을 서지 않고 간단한 확인만으로 입국할 수 있는 이 편리한 시스템은, 대한민국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에 관해 얼마 전 유튜브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다.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인용한 영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권(출처: 외교부)


한국 여권 지수 세계 3위(2021.07.11. 출처: 연합뉴스TV)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이 가능한 이유


우리나라의 한 사업가가 러시아에 갔다가, 비자연장을 받기 위해 동료와 함께 핀란드로 입국하는 길에 겪은 일이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국경 검문대 앞에서 그의 대한민국 여권을 확인한 국경 수비대원들은 난데없이 그에게, ‘중국인 아니냐’ 질문하더니, 갑자기 여권을 가지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돌아온 국경수비대원의 말에 사업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한국어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과 각종 문서들을 꺼내 보여줬지만, 국경수비대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시험지를 가져왔다. 결국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시험지를 받아든 그는 막상 문제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시험은 총 8문제였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을 나열하시오.
- 경부선 구간은?
- 긴급사고시 거는 전화번호는?
- 한국의 제2의 도시는?

러시아에서 4년째 공부중인 유학생 역시 몇 년 전 에스토니아로 여행을 가던 중 국경에서 한국어 시험을 치렀던 경험이 있다. 그녀가 추운 겨울, 국경수비대의 손전등 불빛아래 답을 작성했던 문제의 일부는 또 다음과 같다.

- 다음 중 가수가 아닌 사람은?
  1. 주현미 2. 나미 3. 이태지 4. 이미자
-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한국 야구 선수는?
- 다음 동요의 빈칸을 채우시오.
  나리 나리 개나리 (                    )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문제지만, 왜 외국 국경수비대 요원의 감시(?)하에 이런 시험을 보게 되었을까.

한국인의 여권파워 순위가 올라감에 따라, 한국 위조여권도 많아졌다. 특히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사칭해 입국한 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그곳에서 돈을 벌다 적발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핀란드의 경우, 러시아에서 한국여권을 위조해 넘어오는 중국인들이 많아지자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어 시험’이 가능한 것은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나 일본인들에게 한자로 된 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자국인이라 할지라도 통과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벌써 10여년 전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휴대폰과 컴퓨터 등 전자통신 매체에 익숙한 중국 젊은이들의 한자 실력이 날로 퇴보하고 있다’고 한다. 설문조사 결과 83%의 젊은이가 ‘한자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일본의 사정도 비슷해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웬만한 표현은 ‘가나’로 통용하고, 한자를 잘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 임금이 만든 ‘글자’와 그것으로 인해 치러야 했던 투쟁


궐 앞에 연좌한 육조의 대신들과 성균관 유생들 앞에 임금이 나타나자, 모두 소리를 높였다. 개중엔 흐느끼는 애들도 있었으리라.

“문자는 아니되옵니다!”
“문자는 아니되옵니다!”
“전하 어찌 성리학을 버리시고 스스로 이적(오랑캐)이 되려 하시나이까.”

결국 세종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열린 토론을 하기로 한다.
첫 번째 타자는 정도전의 제자인 혜강,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왕께 간한다.

“중국의 한자는 그냥 글자가 아니옵니다. 그 자체로 유학의 도이며 개념이옵니다. 보시옵소서. 싸울 무(武) 자에는 창(戈)과 그만 두라(止)는 두 개의 글이 들어있습니다. 즉, 싸울 무 자 자체로 싸움을 그만두게 하라는 의미와 싸움을 하지 않게 싸우라는 유학의 도가 들어있는 것이옵니다. 헌데 이적의 글에 이런 도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전하의 글자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사옵니까?”
“아니, 없소.”
“허면 어찌 유학을 파하려 하시옵니까.”
“허면 말이오. 작개언로(作開言路) 달사총(達四聰), 즉 언로를 키워 사방 만민의 소리를 들으라. 이것은 유학에서 임금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면 됩니다.”
“삼봉 전도전의 경제문감에 이르기를!”


혜강이 싸울 ‘무(武)’자를 가지고 설명하는 장면(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11, 출처: SBS)


세종이 ‘작개언로 달사총’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11, 출처: SBS)


‘삼봉’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혜강의 당당했던 표정에 균열이 생긴다.

“요순 3대에는 간관이라는 관리가 없었음에도 언로가 넓어서 진나라 때 모든 비방을 금지한 뒤 한나라 때 이르러서는 언로를 틔우려 간관을 만들었으나 그 간관이라는 관리가 생긴 후부터는 더욱 언로가 막히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이는 말이오, 한자를 아는 자가 관료가 된 시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오. 한자가 어렵기에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임금께 올리려면 관료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그 관료들은 백성들의 소리를 왜곡하고 편집했던 것이오. 하여 삼봉은 언로가 더욱 막히었다 이리 쓴 것이오. 그래 과인은 작개언로, 언로를 넓히려 달사총,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면 백성의 글자가 필요하다 생각하였소. 과인이 유학을 버린 것이오?”

이번엔 또 다른 관리의 항변이다.

“농사직설을 그리도 백성에게 전파하고 싶으시다면 관리의 수를 늘려 백성들에게 전파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그 많은 관리들의 녹봉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결국 관리들을 부양하는 것은 백성이 아니더냐, 관리의 수를 늘린다는 것은 결국엔 백성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한 장면으로 세종은 이 전에도 후에도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아버지인 태종과 싸우고, 태종의 신하들과 싸우며, 집현전 학사들과 싸우고, 집현전은 안 된다는 조정신료들과 싸우고, 먹고살기도 힘든데 문자가 무엇이냐는 백성과 싸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싸움은 세종을 몰아내고 세상을 뒤집고자 하는 ‘밀본’이라는 조직과의 싸움이다. 극 중에서 세종은 끝내 승리하지만, 그 이전, 이미 밀본의 내부에서부터 세종의 승리에 대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들이 그것, ‘세종이 만든 글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말이다. 그것은 밀본의 책략가인 한가의 입을 통해 그려진다.

“주상이 만든 이 글자 말입니다 모양이 좀 이상해서 제가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요기 이 군(君)자 보이시죠? 전 이게(ㄱ) 임금을 뜻하는 글자겠거니 했습니다. 헌데, 다른 글자들도 살펴보다보니 뭔가 이상한 겁니다. 아무리 조합을 해봐도 문장도 되지 않고 뜻도 안 통하고, 그러다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이게 표의문자가 아니라 표음문자라면… 발음 자체를 성모와 운모로 분리해놓은 것은 아닐까. 허면 이것(ㄱ) 은 임금 군의 첫소리를 형상화한 것인가 마지막 소리를 형상화한 것인가.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밤새 모든 경우를 따져서 조합을 해봤습죠. 표음문자라는 가정 하에 (‘각’자를 가리키며) 이것(ㄱ)이 초성, 그리고 이것(ㅏ)이 중성... 딱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또 보시다시피 처음에 쓴 글자(ㄱ)가 끝에 다시 쓰입니다. 근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스물 여덟자 안에 거의 모든 음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11.(출처: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2011.(출처: SBS)


물론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나, 그의 말은 밤새 궁리하면 읽는 법을 터득할 수 있는 한글의 쉬운 체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한 임금이 만든 ‘글자’와 그것으로 인해 치러야 했던 투쟁을 매개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며,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주인 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한자로도, 세상 그 어떤 글자로도 읽고 쓰고 마음을 나누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왕지사 쉽고도 예쁜 한글 보유국의 국민이 되었으니, 이 가을엔 우리 모두 연애편지를 써봄이 어떠한가! 아래, 한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의, 삐뚤빼뚤한 글씨에 진짜배기 수줍음이 숨겨진 시처럼,


연애편지, 2019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 최우수상 수상작(출처: 인천광역시교육청평생학습관)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류몽인, 유두류산록, 미상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노비 복놈이”

최흥원, 역중일기, 1749-06-18 ~

1749년 6월 18일. 아침에 맑다가 대낮부터 날이 흐려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어머니 병환은 어제보다 심하신 듯하였고, 아우의 병세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일기 첫머리에 어머니와 아우의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는지…. 최흥원은 마음이 착잡하였다.
오늘은 빈경이 하회에 사는 류상일과 함께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빈경은 류상일을 데리고 곧바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대구부 관아에서 노비 2명이 최흥원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최흥원은 복놈이라는 노비 이름을 듣자 곧 무엇이 생각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복놈이는 관노비였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글자를 알았고, 게다가 글씨 솜씨는 명필이라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궁금증이 인 최흥원은 직접 종이와 먹을 준비시키고는 복놈이를 시켜 직접 글씨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본 복놈이의 글씨는 과연 예사 글씨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양반들의 필치는 나란히 내놓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복놈이의 재주가 아까웠던 최흥원은 곧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복놈이를 시켜 아이들에게 글씨 연습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스승을 모셨으니 수업료가 없을 수 없는 법. 집안의 보리 몇 말을 복놈이에게 내어 주었다. 과거 시험에서 잘 쓴 글씨의 답안지는 필수인데, 집안 아이들이 복놈이의 재주를 반만 익힌다면, 아마 글씨가 모자라 시험에 낙방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최흥원은 노비 복놈이가 글씨 쓰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해 아침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1-01 ~

1802년 1월 1일, 날씨가 화창했다. 아침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도정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손을 잡고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애사를 잘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며칠 전 아버지의 상을 탈상하는 담제를 지냈는데, 그때 도정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시지 않고 손수 애사를 지어 보내주셨던 것이다. 류의목이 잘 받아보았다고 감사의 마음을 거듭 전하자, 도정 할아버지는 ‘애사에 쓴 글자 중에 약간 바꾸어야 할 곳이 있다.
내 훗날을 기다려 고치겠으니, 너는 다른 종이에 옮겨서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미 쓰신 글을 두고도 더 좋은 표현을 찾고 궁리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성곡 숙부와 주곡 숙부에게 세배를 하러 갔는데, 두 분 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며 류의목을 격려하였다. 성곡 숙부는 평소 아버지와 교분이 막역하였는데, 상 이후로는 류의목 집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하였노라 말하며 류의목을 위로하였다. 주곡 숙부는 공부에 더욱 힘쓸 것을 부탁하면서 ‘형님이 살아 있을 때 네가 일찍이 글을 읽어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먼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중용에도 뜻을 잇고 사업을 잇는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비단 살아계신 부모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아울러 가리켜 말한 것이니 잘 유념하여라’ 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또 한 말씀을 덧붙였는데, 바로 류의목이 글 짓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의목은 종이와 붓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글쓰기 연습을 잘 하지 않았던 터였다. 주곡 숙부는 ‘무릇 글씨 쓰기는 손이 부드러울 때 익숙하게 연습해야 성취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손이 뻣뻣해서 글을 쓸 수가 없고, 쓰더라도 잘 할 수 없다.’ 고 이야기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류의목은 지금이라도 서둘러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노라 다짐하였다.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는 풍습을 개탄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2-11-10 ~

1912년 11월 10일, 밤에 눈이 종이처럼 얇게 내렸는데, 아침에 햇살을 보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이제 다시 만주의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문득 김대락은 조선의 교육 풍습을 생각해 보았다. 집안의 여자들이 한문을 배우지 않은 까닭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란 생각에서였다. 즉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여자들에게는 진서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두 가지에 모두 능한지, 그리고 문자를 아는 지로 구별을 하겠는가.
특히 조선은 교육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끝내 조상의 이름자도 한자로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김대락은 이를 두고두고 개탄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김대락은 집안의 손녀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손녀를 앉혀놓고는 긴요한 글자 천 자를 써서 손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손녀가 제법 재주가 있어서인지 알려준 글자들을 꽤 영리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한문이란 것이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문장 이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낫 놓고 정(丁) 자도 모르는 꽉 막힌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바뀐 세상에 한자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금강산에 도배된 사람들의 이름을 보고 혀를 차다”

이동항, 풍악총론, 미상

이동항(李東沆)은 한창 금강산 유람중이었다. 지리산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지간한 산은 눈에 차지 않는 그에게도 금강산은 정말로 천하제일 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로봉을 비롯한 1만 2천봉과 108개에 달한다는 사찰, 그리고 곳곳의 누대와 계곡 등을 둘러보느라 그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곳곳마다 새겨놓은 사람들 이름이었다. 어디 조금이라도 이름난 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본래 명승지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여러 산중에서도 금강산이 가장 심한 듯하였다.
비록 깊숙한 골짜기라도 평평한 돌만 있으면 이름과 자를 새겨 넣어 거의 한 조각 빈틈도 없는 지경이었다. 이름들을 살펴보니 모두 최근 백 년 안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었다. 그럼 그 이전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이끼가 먹고 물이 깎아서 없어져 버린 것인가? 이동항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실소를 머금었다.
이동항의 생각에 옛사람들은 실천을 좋아하지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술잔을 잡고 흥을 일으킬 따름이었다. 혹 명산 가운데서 참다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판액이나 처마 등에 글을 썼지 절대 바위에다 글을 새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풍속이 투박해지자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호사하는 습관이 날로 커져 글씨가 돌 위에 새길 만한 명필이 아닌대로 새기고 또 새겨, 새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스님들 중에는 조각하는 재주를 지닌 자들도 꽤 많았다. 양반이란 자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본인을 따라다니면서 쇠를 달구어 글씨를 새기게 하면서도 조금도 보답하지 않고 있으니, 아 요새 풍속이란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나마 새겨진 이름들 면면도 모두 하찮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나마 김장생(金長生), 김천일(金千鎰), 유정대사(惟政大師) 정도의 이름은 모래 속에서 금 찾듯이 간간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볼 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길 때 후세의 누가 본인들의 이름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스스로 예상이나 했겠는가 하며 이동항은 혀를 끌끌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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