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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세월이 흐르고
노래의 흐름도 변하고

만만치 않은 무대 위 인생


새해가 밝았다. 설날도 지났다. 2022를 쓰다가 화들짝 놀라 3으로 고치는 일은 줄었는데, 여전히 먹고 살기 어렵다는 소리가 파다하다. 무대 쪽 삶도 만만치 않다. 역병으로 극장 문 줄줄이 닫던 시절을 비교대상으로 삼으면 모든 것이 좋아졌다 할 수도 있겠지만 비정상 시절을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몇몇 프로덕션은 무섭게 올라가는 물가를 이유로 참가하는 스텝이나 배우의 급여를 깎기도 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럴 때 가장 먼저 쉽게 줄어드는 것이 인건비라는 사실은 슬프다. 물가가 오르고 있을 때는 더욱 더 그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건비를 아껴도 티켓값은 쑥쑥 잘도 올라간다. 제도 없는 상생이란 어디서나 쉽지 않다. 무대 뒤나, 무대 위나 인생은 만만치 않다.


뮤지컬 티켓 가격 또 인상…‘19만 원 시대’
(출처: KBS 뉴스광장 2023.01.05. https://www.youtube.com/watch?v=l4NKTLO5zp4)더보기




가상의 나라 조선에서는…


뮤지컬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배경은 진짜 조선이 아니라 가상의 나라 조선이다. 가상의 조선 사람들은 시조를 국민 오락으로 즐겨왔다. 하지만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간신히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모까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시조를 금지해 버렸다. 정확하게는 전쟁을 핑계로 자신의 권력을 착실하게 늘려가던 홍국이 금지했다. 누가 금지했건 간에 양말, 아니 버선을 찾아 신으면서도,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서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흥의 민족이 한순간 노래를 금지 당하자 사람들은 숨어서라도 시조를 짓고 장터에서 게릴라 시조 부르기를 시도한다. 그 중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 시조꾼들은 ‘골빈당’ 일당이다. 웃고 즐기자고 부르는 시조가 아니라 이들의 노래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다. 이들은 시조를 금지한 홍국의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모든 백성이 양반 되는 세상을 꿈꾼다. 양반이란 시중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백성이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보그 일꾼이라도 만들어내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신분제를 철폐하자는 것으로 보자면 왕정제의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반역이기도 한 이야기다.

주인공 단은 출생을 알 길이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마치 올리버 트위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선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노래하기를 즐기며 알라딘처럼 날쌔다. 게다가 주인공인 만큼 노래의 재능도 타고났다. 단의 재능을 알아보고 골빈당에 끌어들인 사람 역시 단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인 진이다. 하지만 진의 정체는 금방 밝혀지는데, 십대의 어린 임금을 좌지우지 하는 권세를 누리는 홍국의 딸이다. 진은 강압적인 아버지 홍국에게 반기를 들고 몰래 집을 빠져나와 남장을 하고 모든 백성이 양반 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출처: PL엔터테인먼트, 럭키제인타이틀)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은 가상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퓨전 사극을 내세웠지만 사실 역사는 살짝 거들 뿐이다. 의상도 전통 의상보다는 재해석된 현대적인 한복에 배우들은 스니커즈를 신었다. 그리고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또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처럼 한국에서 정규교육을 받거나 역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정몽주와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 와 ‘단심가’가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으로 혹은 절절하게 울려 퍼진다. 정몽주가 죽음을 앞두고 불렀던 ‘단심가’는 홍국이 임금 앞에서 아부할 때 부르기도 한다. 비록 역사는 거들 뿐이라고 했지만 실제 양반들이 즐겨 불렀던 평시조는 극중에서도 지배계층이, 그 지배계층을 엎으려는 골빈당의 시조는 평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던 사설시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노래들이 등장한다. 반면 평민도 아니고 지체 높은 양반의 딸이지만 자신의 계급에 반기를 든 진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시조랩을 선보이기도 한다.




골빈당의 운명은?


명백하게 홍길동전의 ‘활빈당’을 패러디한 ‘골빈당’ 은 이름이 주는 엉뚱함과는 달리 그들의 앞날이 유쾌하기만 할 수는 없다. 골빈당이 지키고자 하는 청년 단은 사실 홍국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은 대신의 아들이다. 마치 영국 오페레타 ‘펜잔스의 해적(The Pirates of Penzance)’ 의 주인공 프레데릭처럼 단은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자란다. 귀족으로 자라지 않은 그는 비단옷과 고깃국을 먹는 배부른 인생 대신 자유롭게 시조를 노래하며 사는 즐거운 세상을 꿈꾸는 인물이 되었다. 단과 진, 골빈당을 한 자리에 모으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중에서 악당을 맡은 홍국이다.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홍국(출처: PL엔터테인먼트, 럭키제인타이틀)


골빈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불만세력이 늘자 홍국은 이들을 일망타진 하려고 조선시조자랑을 연다. 무려 15년 만의 일이다. 마치 로빈 후드 일당을 잡기 위해 활쏘기 대회를 연 노팅엄 영주처럼 홍국도 자신이 욕망과 꾀로 인해 파멸로 치닫는다. 하지만 그에게 파국이 닥쳐오기 전에 우선 조선시조자랑을 즐겨야 한다. ‘쇼미더머니’의 조선 버전인 조선시조자랑에도 당연히 사회자가 있다. 예의상 비트 대신 장단을 달라거나 마이크가 없어 살짝 어색해질 수 있는 손에는 주걱을 쥔다. 부채를 펴들기도 하고 탈춤의 가면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 이름을 바꾸고 몰래 참가한 골빈당은 랩으로 임금에게 홍국의 악행을 고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들려주려 한다. 당연히 홍국은 골빈당과 진을 잡아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진은 임금 앞에서 오히려 친아버지 홍국의 음모를 고발하며 홍국은 그 자리에서 잡혀가고 단은 자유롭게 시조를 부르며 살겠다는 꿈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양반 되는 전복적인 세상을 꿈꿨던 골빈당이 왕의 은혜에 힘입어 잃었던 지위를 찾고 조선에 평화와 노래가 찾아온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재미를 더한다.




조선 시대 랩배틀, 조선시조자랑


이 작품의 묘미는 다른 무엇보다도 시조자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색안경을 쓴 사회자가 등장하고 시조자랑은 팀으로도, 개인으로도 참가 가능하다. 가지각색의 팀이 시조자랑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랩을 펼친다. 그런데도 여기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첫째,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홍국의 직위명이 시조대판서라는 사실이다. 시조대판서가 시조를 금지했으니 어쩌면 그의 파멸은 이미 예고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두 번째로, 진짜 재밌는 부분은 실제 시조창과 랩의 속도 차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무슨 말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빨리 흘러가는 랩과는 다르게 시조창은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시간을 벗 삼아 부르는 노래다.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한 장면(출처: PL엔터테인먼트, 럭키제인타이틀)


그리고 시조창은 영조 때에 이미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의 형식이기도 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조꾼들의 속도도 세월을 따라 눈부시게 빨라졌고, 이제는 시조꾼을 우리는 아이돌, 혹은 래퍼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시조꾼이라는 직업은 실제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시조창을 부르던 사람들과 그 노래를 즐거이 듣는 관객들은 있었다.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상생하는 그런 미래가 멀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스웨그에이지 : 외쳐, 조선!’ (유튜브 링크)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 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 ~ 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가뭄, 비를 기다리는 버드나무와 눈먼 무당의 기우제”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국가 운영의 가장 큰 변수였다. 1614년 봄에도 가뭄은 찾아왔다. 기다리는 봄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타들어 갔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농사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우제를 연달아 지냈다. 눈이 먼 무당이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쳤고, 방방곡곡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게 하였다.

4월 4일, 드디어 비가 내려 모두가 기뻐하였다. 빗줄기가 마치 삼대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랫동안, 고루 내리지 않았고, 닷새 후 방방곡곡엔 다시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다시 향을 사르며 버드나무를 꽂고, 아이와 눈먼 무당이 서교(西郊)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철 장인이 수리용 쇠못을 만들어주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626년 7월 15일, 을유. 맑음. 권별은 한익길의 집에 갔다가 곧바로 쇠못을 보고 오후에 올라왔다. 초간에 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왔다.

1626년 7월 25일, 을미. 맑음. 권별은 귀래곡 철장(鐵匠)의 집에 가서 못 90여 개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초간에 갔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6일, 병신. 맑음. 서까래가 부족하여 수심에 가서 서까래 네 바리를 얻어 와서 곧바로 초간(草澗)으로 갔다. 임이섭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8일, 무술. 초간에 갔다. 목수 진상이 와서 어제부터 연못의 방죽을 고쳐서 쌓고 있다. 여균·이망이 와서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일, 임인. 맑음. 초간에 가서 제방 고치는 일을 마치고 물을 끌어댔다. 달보·경보·원백·여유가 와서 보고 갔다.

“기와장이가 닷새에 걸쳐 새 지붕을 덮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한 달에 걸쳐 사당 건물에 단청을 입히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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