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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나라를 뒤집는 재미, 혁명의 드라마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


혁명은 재밌다. 어제까지 왕이었던 자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노비가 황제가 되기도 한다. 단, 혁명이 즐겁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사는 시대여서도 안 된다. 혁명은 반드시 남의 일이어야 하고 다른 시대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용돌이에 하릴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로, 마치 어벤져스와 우주 괴물이 벌이는 시가전에서 구겨진 종이처럼 날아간 자동차에 깔려 죽는, 엔딩 크레딧조차 나오지 않는 배역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전쟁이나 혁명 같은 역사적인 이벤트는 개인의 삶을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로 밀어 넣는다. 전쟁통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고려 시대는 흥미롭다. 그동안 고려 이야기는 조선의 눈으로 한 번 걸러진 상태였다면 최근에는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신선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거나 기록을 재발굴하며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출처: 경기도박물관)


오랫동안 고려가 얽힌 가장 즐거운 시기는 소위 말하는 여말선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휘둘리고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며 어지러운 국경을 지키던 장군 중 하나였던 이성계가 고려의 문을 닫고 조선을 열던 때다. 과거에는 고려의 라스푸틴 같은 위치였던 신돈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성계의 소위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이라는 스토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꽤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을 담다, 〈레 미제라블〉과 〈해밀턴〉


혁명을 배경으로 한 가장 오랫동안 알려진 뮤지컬은 프랑스의 알란 부빌과 미쉘 쉔베르그가 만든 혁명 그 자체인 듯한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다. 이 작품은 휴 잭맨, 러셀 크로, 앤 해서웨이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져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근의 뮤지컬 팬들은 생각은 좀 다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레 미제라블〉보다는 미국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브로드웨이 최초의 랩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이 먼저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의 원작 소설 〈레 미제라블〉을 각색하여 방대한 수십 년의 줄거리를 이보다 더 잘 각색할 수 없다는 평을 들은 〈레 미제라블〉은 먹고 살자고 빵을 훔쳤다가 몇 번의 거듭된 탈옥 실패로 19년이라는 무시무시한 형기를 마치고 가석방된 남자 장발장이 주인공이다. 그가 빵을 훔칠 수 밖에 없었던 빈곤한 사회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한치의 연민도 보여주지 않는 지배 계층이 극 초반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장발장이 출소할 때조차도 형사인 자베르는 가석방이라는 사실을 콕 짚어주며 여전히 자신의 손안에 있음을 일깨운다.

장발장은 세상 모든 것에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모든 사람을 미워했다. 장발장은 특히 가진 자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던 자신을 맞이해 은식기까지 꺼내 식사를 대접한 마리엘 신부의 호의를 무시하고 은식기를 싹 챙겨 도망간다. 좀 찜찜하긴 해도 은식기를 살 수 있는 자에 대한 증오를 감출 생각이 없다. 하지만 경찰에 잡혀 다시 마주한 신부가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는 은촛대 한 쌍은 왜 잊고 갔냐며 집어주자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녹아내린다. 이후 장발장은 신분을 속이고 시장이 되고, 다시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며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한다. 장발장은 팡틴의 딸인 코젯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신분을 바꿀지언정 한 순간도 신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023~2024 〈레 미제라블〉 한국어 공연 포스터 (출처: 뮤지컬 레 미제라블 한국 공식 웹사이트)


왕당파와 혁명파가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뺏고 빼앗기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그는 은둔하며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코젯이 사랑하는 마리우스가 바리케이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결국 그를 살리기 위해 그 안으로 잠입하면서 혁명의 생생한 물결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레 미제라블〉에 담긴 이야기가 허구라면 뮤지컬 〈해밀턴〉은 미국의 국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이라는 실존 인물을 담은 극이다. 해밀턴은 미국 최초의 재무장관으로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연방은행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고 미국의 독립혁명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여겼다. 해밀턴에게는 영국과의 전쟁이 반드시 필요했다. 비록 그 와중에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뮤지컬 〈해밀턴〉의 한 장면 (출처: 디즈니플러스)


뮤지컬은 그의 행적을 그저 찬양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의 야망과 욕망, 열정, 그리고 지나친 승부욕을 적절하게 배분한다.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꽤 존경받을만한 인물이었을지 몰라도 남편이나 아버지로서는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마지막 결투에서 상대방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 않는다. 불우했기에 누구보다도 인생을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냈던 불꽃같은 남자 해밀턴의 이야기는 그가 ‘위인’이 아니기에 더욱 매력적이고, 미국의 독립이 아니었다면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될뻔했던 인물이기에 더욱 강렬하다.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다: 연극 〈백화〉


한국의 근대사는 처참하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자 이승만의 독재를 맛봤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대통령과 왕의 차이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때 이승만은 왕의 길을 걸었다. 4.19와 5.16을 겪었어도 여전히 대통령을 나랏님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대사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지만 입장에 따라 ‘정치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렇다면 좀 더 멀리, 그러나 현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시대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은 무대에서도 꾸준히 있어왔다. 고려 말의 무신정권의 몰락을 그린 2017년에 개막한 연극 〈혈우〉나 2022년에 공연된 뮤지컬 〈난세〉, 누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가운데 진짜 조선의 창업자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뮤지컬 〈창업〉도 공연됐다. 하지만 소재가 워낙 무겁고 짧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다루기가 쉽지는 않다.

오히려 주목할만한 작품은 소설가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쓴 소설 『백화(白花)』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 〈백화〉다. 1932년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했던 소설로 1934년에는 단행본으로 발행됐고, 1937년 12월에는 인생극장 창립 기념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대본집 표지에는 〈백련화연〉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원작이 여말선초의 환란을 겪으며 성장하는 ‘백화’라는 서경 기생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이었는데 연출가이자 극각가였던 송영은 이 작품을 5막 7장의 대작으로 각색했다. 지성과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예술적인 소양과 인문적인 소양도 뛰어났던 고려 말의 평양 기생 백화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복수를 시도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백화는(어릴 적 이름은 일주) 낙향한 선비 임처사의 딸이다. 소꿉친구인 왕생과 함께 성장하며 연정을 품었지만 신돈의 악행을 고발한 아버지가 끌려가면서 백화의 인생에 그림자가 깃든다. 악역인 황파는 일주를 환란에서 구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일주를 기생으로 만들어 돈을 벌려는 음흉한 인물이다. 백화의 아버지 임처사가 옥에서 죽자 일주를 옥죄어 억지로 기생으로 만든다. 더 익힐 것도 없이 아버지에게 배운 문장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바탕으로 뛰어난 미모까지 갖춘 백화는 여기에 기생 수업을 받으며 익힌 가무까지 얹어 서경의 최고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다. 비록 기생이 되었어도 백화의 마음은 꺽이지 않고 마침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긴다는 내용이다.


박화성의 장편소설 『백화』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원작자 박화성은 중세 사회라고 해서 여성이 억눌려서 살기만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박화성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남자와 다를 바 없이 진취적으로 살아가던 여성을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이 소설을 썼다. 일제 시대를 살아가며 여성 작가는 ‘여류’라고 불렸던 시대에 박화성은 과거를 소환해 당시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던졌다. 역사 소설이 임금의 계보 찾기에 급급할 때, 박화성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연극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아쉽게도 연출가인 송영이 월북하면서 작품도 같이 묻혀버렸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공연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만약 과거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역사의 역할이라면 연극 〈백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지금처럼 고려가 트렌드가 된 때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뮤지컬 레미제라블 중 One Day More (자막)   더보기

뮤지컬 해밀턴 (2016 토니상 쇼케이스)   더보기

〈백련화연〉 원문 DB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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