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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그리고 부모님

김수영

5월입니다.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이 달은 화려하고도 밝은 날씨와 활기찬 봄기운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물론 우리가 5월을 특별히 귀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5월이 바로 우리의 소중한 가족을 생각하는 가정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웹진 ‘담談’은 5월을 맞이하는 이번 호에서 부모에 대해서 생각하는 특집을 마련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지금 살아계시건 그렇지 않건, 또 내가 분명하게 알건 혹은 모르건 간에, 우리는 모두 부모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사실 누구에게나 부모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법이죠. 긴 논의 끝에 우리 웹진은 이 주제에 대해서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을 골라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이 길을 선택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했지만, 막상 그 대표 선수 한 명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 김택룡의 경우가 워낙 유명하면서도 큰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은 선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학자로서도 물론 중요한 위상을 지니지만, 우리가 오늘날 그를 의미있게 기억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때문입니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각각 1612년, 1616년, 그리고 1617년에 쓰였습니다. 김택룡이 부지런히 기록한 이 귀중한 유산에는 친구들과의 사소한 교류로부터 나라의 명운에 대한 원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 중기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뺄 수 없는 기록의 보고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기에는 자식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또한 담겨 있습니다. 김택룡은 서얼 3남(대평, 대생, 대건)을 포함해 5남 6녀를 두었는데, 그는 무엇보다 매우 훌륭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일반적인 경우들과는 달리,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았고, 적자와 서자의 차별도 특별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11남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들을 묵묵히 교육하고 지원하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400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웹진 ‘담談’의 이번 호에서 펼쳐지는 김택룡과 그의 자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와 자신 사이에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입니다. 봄의 기운도 아름답고 날씨 또한 아름다우며 환하게 피어난 꽃들 역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은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위대한 사랑일 겁니다. 우리의 부모에게서 그 사랑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큰 축복입니다. ‘담談’을 아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사랑에 대해서도 크게 감사드립니다.

“ 부자간의 정이야 끝이 없지만, 운명을 어쩌랴 - 아들이 끝내 숨을 거두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10-24 ~ 1617-01-28
1616년 10월 24일, 복이(福伊)가 산양(山陽)에서 돌아와서 김택룡은 그 곳에 사는 아들 김적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들의 병은 차도가 없지만 음식은 조금 먹는다고 하며, 또 그 집에 사위를 맞이하는 날짜를 아직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11월 13일, 금복이가 이틀 전 11일에 산양에서 김택룡이 있는 곳으로 왔다. 오면서 아들 김적의 편지를 가져다 주었는데, 편지에 의하면 적의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다고 하며 손녀의 혼사도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 늙은 아비, 아들의 무덤 앞에서 제문을 읽고 슬피 울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7-04-16
1617년 4월 16일, 아침에 김달가 · 중소 · 예막 등이 어제 장례가 끝난 김적의 묘소에 올라갔다. 이제 출발하여 돌아가려면 성묘를 하고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묘소에서 돌아와 조식제(朝食祭)를 지내고 행장을 꾸려 떠나기 전에, 김택룡은 새로 주과를 차려 아들의 신주 앞에 술 한 잔을 올리며 제문을 읽었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정사년 4월 15일 너를 장례 치른 다음날 아침 늙은 아버지는 아들 적의 영전에 고한다. 네 몸은 한곡으로 돌아가고 혼은 산양에 돌아가기에 술 한 잔 따르고 영혼을 위로한다. 중소는 네 신주를 받들어 돌아가고 중렴은 여기 남아 때때로 네 묘를 보살피며 글자를 배우게 하는데, 평소 네 소원에 부합하려는 뜻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라.’ 라고 했다. 김택룡은 슬픔을 다하여 곡했다.

“ 출가한 딸의 와병 소식에 잠을 설친 아버지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2-05-20 ~ 1612-07-24
1612년 5월 20일, 오천(烏川)의 사위 집에서 김택룡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편지에는 딸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김택룡은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5월 25일, 김택룡은 오천(烏川)에 가서 아픈 딸을 만나볼 계획을 세웠다. 5일 뒤 5월 30일, 김택룡은 오천으로 가기 위해 식사를 마치고 출발했다. 오천에 도착해 판사(判事) 김지(金址)와 상사 김평 · 김령(金坽)을 만난 다음, 탁청정(濯淸亭)에 내려가니 좌수 김호(金壕) 어른과 사위 김광찬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택룡은 집으로 들어가 딸을 보고 병에 대해 물었다. 오늘부터 소뿔로 배꼽에 뜸을 떴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저녁을 먹고 나가서 김부생(金富生) 과 사위 김광찬과 함께 정사(亭舍)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여독 탓인지 아픈 딸에 대한 근심 탓인지 매우 피곤하여 밤새도록 뒤척였다.

“ 산사에 들어가 공부하는 아들 뒷바라지 - 책과 음식, 그리고 편지를 보내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03-02 ~
1616년 3월 2일, 이재창(李再昌)이 영천에서 와서 김택룡에게 둘째 아들 김각이 부석사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3월 9일, 김택룡은 아들 김각의 편지를 받고 잘 있음을 알았다. 아들은 부석사에서 『주역』을 읽고 있다고 하였으며, 수 백 번은 더 읽고 나서야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다. 흥남(興男)도 부석사에서 내려와서 김택룡에게 아들 각의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3월 11일, 딸의 혼사 때문에 김택룡은 아들 김각에게 편지를 쓰고, 『주역상경언해(周易上經諺解)』 두 책을 보냈다. 3월 18일, 부석사에서 김각의 편지가 왔다.

“ 둘째 딸의 혼례 준비 - 비용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03-20 ~ 1616-03-24
1616년 3월 20일, 김택룡은 둘째 딸의 혼사에 쓰려고 쌀을 내다 팔았다. 그리고 네 장의 편지를 써서 명금이를 예안으로 보내 아들 김숙 · 생질 정득 두 곳과 영천 이영도 · 유사 이의적에게 전하도록 했다. 또 청송 부사 박이장(朴而章)에게도 편지를 써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 혼인에 쓸 재물을 청했다. 4일 후 3월 24일, 김택룡은 딸 혼사가 진행 중이며 또 27일날 예식을 올려야 하는데 여지껏 혼례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내심 불안하였다. 그는 부득이하게 영천(榮川, 지금 榮州) 군수에게 부탁의 편지를 썼다. 더불어 □□, □□ 등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또 편지를 써 노비 풍종이에게 주며 군(郡) 내 김효선(金孝先)에게 가 꿩을 구해보도록 시켰다. 그런데 모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더욱이 군수는 국기일(國忌日)이라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할아버지의 매 - 공부를 게을리 한 손자에게 매를 들다 ”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2-07-19 ~ 1617-08-10
1612년 7월 19일, 김택룡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7월 20일, 김택룡은 집에 있으면서 소장 서적을 점검하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들 대생 등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1616년 11월 27일, 김택룡이 집에서 아들과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617년 5월 12일, 김택룡은 중길 형제가 와서 배알하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김택룡이 억지로 불러다 글을 가르쳤다. 5월 14일, 김택룡은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5월 19일, 여러 아이에게 혹은 몽학서(蒙學書), 혹은 『사기(史記)』를 가르치고, 또 제부[製賦, 賦를 짓는 것]를 가르쳤다. 8월 4일, 김택룡이 집에 있으면서 자신의 아들 김각과 중길·중괴·중렴 세 손자의 독서를 가르쳤다. 8월 8일, 김택룡은 또 집에서 아들 김각과 손자 중길·중연·중렴을 가르쳤다. 8월 10일에는 학문에 게으르고 독송(讀誦)을 열심히 하지 않는 손자들에게 김택룡이 매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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