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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절실한 소망

김수영


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이 새해를 맞이하셨는지요? 올해의 첫날, 비록 몸은 아늑한 침대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마도 정동진의 해 뜨는 새벽으로 달려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소망들을 생각하고 올해에는 그 모든 소망들이 하나하나 견실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길 기원하셨을 줄 압니다. 여러분의 가장 중요하고도 절실한 소망은 무엇인지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세상에는 다양한 소망들이 존재합니다. 연말이나 연초 TV에서는 새해 소망에 대한 인터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대개 가장 중요한 새해 소망으로 가족의 건강을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카메라가 향하면 모두가 입을 모아 새해에는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죠. 왜 이 대답이 가장 많은 것일까요? 그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가 고백하는 소원은 대개 자기 자신의 일보다는 타인의 일에 관련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지는 일을 무의식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겠죠. 둘째, 우리는 어떤 것이 자신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개인적인 소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소원의 실현 여부는 결국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이니 그 부담을 굳이 공개적으로 털어놓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겠죠. 이런 이유로 TV에 등장하는 행인들의 인터뷰 속에서 가족의 건강은 늘 첫 번째의 새해 소망으로 언급되곤 합니다.

그러나 카메라를 치우고 그 사람들에게 정말 솔직한 소망을 물어보면 조금 다른 대답들이 나오게 되지 않을 지요. 아마도 다른 이들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차원의 여러 소원들이 나열될 것입니다. 급여 인상, 취업, 연애, 결혼, 다이어트, 합격, 좋은 성적, 여행 등이 포함되겠죠.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쑥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건강만큼이나, 아니 어떤 경우는 그 이상으로 절실한 소망일 수 있을 겁니다.

직장에서의 승진 혹은 부서 이동, 이것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생활에 필요한 급여를 받으며 살고 있죠. 직장에서의 시간은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가족이 소중한 사람들도 대개 직장에서의 동료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더 긴 법이죠. 그러니 직장에서 적절한 업무를 수행하고 적절한 권한과 임금을 받는 일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웹진 담談은 이번에 이 승진과 인사이동이라는 주제를 특집으로 잡았습니다. 옛 시절이라고 어찌 일터에서의 승진이나 진급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의사소통 및 업무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직적인 질서가 강조되었던 조선 시대에 어쩌면 그 문제는 우리 시대보다 더 중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조상들의 일기를 모아 놓은 스토리테마파크에는 승진 문제 혹은 인사 문제로 인한 고민과 좌절과 기쁨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

승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분 문제일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명함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사무실의 자리도 넓은 곳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업무의 내용과 성격도 달라지고, 참여하는 회의도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직무 상 접하는 정보도 달라지고 회사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영향력 또한 커지게 됩니다. 더구나 급여 또한 오르게 되죠. 그러니 승진, 그것은 사실 사무실에서 가질 수 있는 관심의 알파요 오메가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승진 승급에서 고배를 마신 동료에게,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차피 직장 생활하는 것 마찬가지 아니냐고, 명함 하나 새로 만든다고 해서 인생 뭐 그리 크게 달라지겠냐고 위로하지만, 글쎄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새해 모두 순조롭게 항해하고 계신지요? 승진에 대한 옛 이야기들을 읽으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의욕을 다시 한 번 가다듬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조정랑이 되자마자 청탁을 받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1-21 ~ 1720-01-22
1720년 1월 하순, 정기 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권상일은 지난해 성균관 직강으로 내부 승진이 된 상태였다. 그는 꽤 성균관에 오래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직강이 되었던 그가 정기 인사 대상에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인사대상에 올라 있었다. 예조정랑 수망에 권상일, 부망에 홍구, 말망에 여길에 올라와 있었다. 결국 예조정랑은 권상일이 낙점되었다. 예조는 성균관의 상급 관청이었으므로 같은 5품직이라고 하더라고 성균관보다는 예조가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또한 예조참판과 예조참의 또한 새로 교체되었으므로 예조 관원의 절반 이상이 이번 인사에서 새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예조정랑으로 부임한지 하루도 안되어 청탁이 들어왔다. 역관과 의학 5~6명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 청탁 편지는 대개 취재(取才)와 고강(考講)에 대한 것이었다. 본래 과거는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그런데 기술직 관원인 사역원(司譯院)의 역관, 전의감(典醫監)의 의학, 관상감(觀象監)의 역학 등은 모두 취재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다. 그런데 그 취재 담당 기관이 예조였던 것이다.

“이괄의 난 (5) - 피난하는 임금의 가마를 뒤따른 자들, 승진 리스트에 오르다”


김령, 계암일록, 1624-03-08 ~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인조반정에서의 공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 요소로 경계하는 조정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으킨 난은 순식간에 조선을 강타했다. 영변에서 시작된 난은 보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도성까지 내려왔고, 국왕 인조는 급기야 파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변란의 공과 죄를 물어 체직과 임명이 계속되었다.
이 때 인조의 파천 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수행한 공으로 4품 이상의 관리는 모두 승격을 시켜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기까지 승진 리스트에 오른 관리가 모두 1백 5명이었다.
대간(臺諫)에서는 이를 논계하여 상이 너무 남발되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 결정을 거둬달라는 대간의 논계는 4품 관리는 통정대부로 올린 것만 개정하자고 청하는데 그쳤다. 임금의 가마를 따랐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귀와 김류가 관직임명을 두고 갈등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7-27 ~
1625년 7월 27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내렸다. 식사 때쯤 그치더니, 이 비로 냇물이 불었다. 저녁에는 김시익이 찾아와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김령은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에 남이공이 대사헌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것은 전적으로 김류를 통해서인 듯 하였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와 친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직을 제수받았다. 이를 전해듣고 이귀가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귀가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전하가 하교하여 ‘이귀가 공믈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고 명하시고는 또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인데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우의정 신흠 등이 차자를 올려 겨우 주상전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유배의 명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이 일로 김류 역시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이란 이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의 군적 어사도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이고, 우도는 김시양이란 이가 뽑혔다. 영의정 자리는 이미 봄부터 비어있었는데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정승자리는 비어 있고, 또 반정의 공신들 사이는 저렇듯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었다.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인사 대상에 오르다 번번히 떨어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19년 7월 22일, 정기 인사 기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사를 담당해야 하는 이조참의가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으므로 이조참의를 교체시켜 이병상(李秉常)을 임명했다. 그래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사가 열렸다. 이날 인사에서 권상일은 그토록 바라던 지방관 후보에 올랐다.
강진현감의 말망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망은 실제 거의 가망이 없었다. 3후보 중에서 가장 꼴지가 말망이었기 때문이다. 병조좌랑이었던 김성발이 1순위인 수망으로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와서 벼슬살이 하면서 단지 쇠잔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부친을 영화롭게 모시려 했지만 지금 또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튿날 다시 정사가 진행되었다.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병조좌랑을 대신하기 위한 인사로 권상일이 2순위인 부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못했다. 다음날 또 정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병조좌랑 한자리에 그가 3순위 말망에 올랐고 또 한번은 예조정랑 자리에 2순위 부망에 올랐으나 그는 낙점을 받지 못했다. 다시 성균관에서 몇 개월의 관직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복직 (2) - 성주목사로 복직 될 뻔 했으나…”


권문해, 초간일기,
1582-11-20 ~ 1583-01-16
1582년 11월 20일, 권문해는 공주목사 재직 시절의 모든 사건과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책임을 벗게 되자 관직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주목사로 추천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성주목사로 세 번이나 추천을 받아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탄핵을 받아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때 권문해가 성주목사의 세 명의 후보자 중 말망(末望)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 후보자 모두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임금을 모셨던 사람들로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가장 첫 번째로 추천을 받아 수망(首望)에 오른 윤희길(尹希吉)이 성주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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