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도시 생활을 접고 경주시 괘릉리에 자리를 잡은 지 만2년이 되었다. 그사이 왜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냐는 질문을 수백 번은 받은 것 같다. 때에 따라 대답은 약간씩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했다.
홍대 앞 연남동에 살 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주차였다. 주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주차해 놓고 누군가 전화할 것을 대비해 꼭 핸드폰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었다. 샤워를 할 때면 창문 쪽에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놓아두기도 했다. 차 빼 달라는 전화는 왜 꼭 샤워 중에 많이 오는지. 새벽 3시에 아이가 아파 응급실에 가느라 뒷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해야 할 때는 이 좁은 공간이 정말 싫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쌓여 좀 더 넓은 곳으로, 그런 공간이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었나 보다. 얼마 없는 시간을 그렇게 소비하다 보면 아이들과 놀 시간이 없었다. 기타를 치고 글을 쓰며 산다고 집에 오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맨날 출근하는 야근 많은 아빠일 수도 있다. 공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간은 더 적었다. 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짧았다. ‘좁은 공간 짧은 시간’ 그것이 우리 도시 생활의 슬로건이었다.
경주시 괘릉리에 살다 보니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었다. 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었는데(주차 걱정이 없다. 주차장이 없으니 천지가 주차장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했다. 그나마 학교 버스를 같이 기다려주거나 버스 내리는 시간에 기다리는 것이 가능해진 건 좋은 점이긴 하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많지 않다. 어쩌면 아이들도 ‘시간이 많은 어린이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학교에서 하는 일들은 ‘공식적’이고 중요하다. 긴 시간을 투자해서 진행하고 학부모들은 전적으로 협조한다. 학교에서 모든 책임을 지는 시스템은 결국 학원이라는 ‘도우미’를 얻었다. 그래서 학교의 시간이 학원의 시간으로 연장된다. 그런 방식은 이곳 변방 경주, 경주에서도 시골인 괘릉리에서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거기에 더해 학원으로 실려간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다. 도무지 자유로운 시간, 여유로운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뭔가 딴짓을 하고 싶어도 그럴 틈이 별로 없었다. 기타연습이 하고 싶으면 아침 일찍이거나 저녁 늦은 시간에 해야 했다. 다행히 주변 분들이 좀 참아주셨다. 그러니 어쩌면 더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들의 ‘시간’ 확보가 중요하다. 그래야 뭐라도 해 볼 것 아닌가. 그러니 누군가.
“시간이라도 좀 주세요!” 라고 같이 외쳐주면 좋겠다.
63호의 주제는 [가정 교육]이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최우선인 이 나라에서도 여전히 돌파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김찬호 선생님은 믿을 수 있는 어른과 자유롭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결국 학교 밖 공간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청(소)년들이 온전하게 성장하려면 자신을 온 마음으로 존중해주는 타인, 가슴을 열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생각만이 아니라 감정도 표출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격려와 지지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만남이 절실하다.
대안대학을 이끌고 있는 이태영 교무지기는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와 현실의 불균형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교육을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 믿고 있지만 해결이 가능한 교육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직업이 활동가인 나는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장면을 종종 마주한다. 그 자리에서 문제가 되는 해당 이슈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해결방법으로 '교육'을 선택하는 장면 말이다. 우리가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린이, 청소년 시기부터 학교교육을 통해 민주시민교육을 해야한다든지, 공정하고 정당한 노동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어린이, 청소년 시기부터 노조 조직과 노동권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결론. 때로는 나도 그 토론에 참여해 비슷한 논조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명분으로 여러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고, 그런 사업들이 모두 성과가 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정용연 작가가 쓰고 그린 [이달의 일기]는 좋은 가정교육이 낳은 좋은 목민관을 소개하고 있다. 90 노모의 말을 잘 새겨들은 아들은 끝까지 좋은 관리가 되었다.
홍윤정 작가는 미디어라는 최전선에서 ‘가정교육’ 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검토해 준다.
이번 호의 주제인 ‘가정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여러 미디어 자료들을 훑어본 결과,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우리의 미디어 속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긍정적 가르침을 주는 장면이 별반 없다는 사실이다. 흔히 보는 막장 드라마는 말 할 것도 없고, 사극, 시대극에서조차 한국의 부모는 자녀를 억압하는 존재, 순수한 사랑이나 고귀한 이상을 방해하는 매우 속물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었다. 간혹 자녀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들도 직계 부모님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것도 주로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닌 동네 슈퍼 할머니나, 지나가는 할아버지다.
연재 중인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에서는 ‘효자는 날을 아낀다.’ 라는 뜻의 현판 ‘애일당’ 이야기를 전해준다. 항상 공간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선인들의 습관이 부럽다. 그리고 그렇게 여유로운 공간이 많다는 것이.
나는 시간이 많은 어른으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들도 시간이 많은 어린이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가 만나서 같이 시간을 ‘낭비’해 보자.
이 아저씨가 깨달은 삶의 방식, 낭비하는 시간 속에 찾아오는 뮤즈(Muse)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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