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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삶이라는 소명과 웰다잉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렇다면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는 대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서 자신이 겪은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떠나보낸 경험과 기억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고통을 소환합니다.

웰다잉(well-dying)이란 말에 대해 잘 살다 좋은 마무리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평안한 삶의 마무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너무 맞는 말 같은데 오랜 기간 OECD국가들 중 자살률 1위를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는 말은 어쩌면 소박한 바람일 수 있습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hospice’라는 말은 라틴어로, ‘순례자를 위한 숙박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해 넘게 끌어온 팬데믹(pandemic)에 지쳤지만 일상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이 혼재하는 7월입니다. 이에 웹진 담談은 ‘조선시대의 선인들은 삶의 마무리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한 내용을 펼쳐봅니다. 선인들은 주어진 삶의 소명을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과정으로서 죽음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강유현 선생님은, 〈죽음 권하는 사회〉라는 글에서 죽음이 사회‧공동체에 의해 그 가치가 매겨진다는 부분에서 결코 개인적인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에 삶을 걸어 맞이하게 된 죽음은 쉬이 미담이 되어 전파되고 ‘좋은 죽음’으로 모델링되곤 했다는 것입니다. 정몽주의 죽음에서, 야담집에 실린 열녀 박씨의 자결, 그리고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 김상헌, 을사조약 시기 민영환의 죽음에서. 죽음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죽음은 더 이상 고인에게 속한 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닌 공동체에 속한 무언가가 되고 맙니다.

이문영 작가님은 〈정생의 고종일기(考終日記)〉에서 위독한 백부를 방문하여 상을 치르는 과정을 한편의 엽편소설처럼 풀어냅니다. 마당에 모여 유족들이 밤새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조선시대 죽음에 대한 생각과 유교적 철학에 대한 내용이 펼쳐지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좀비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달의 일기-잘 살다 잘 죽기〉의 권숯돌 작가님은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 있는 〈양반 부인의 상을 치른 비부(婢夫)〉를 웹툰 작품으로 담아주셨습니다. 자식 없이 쓸쓸히 죽은 이씨 부인의 상에 비부(婢夫) 복삼(福三)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 상차(喪次)에서 망자를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한 사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디어로 본 역사 이야기의 홍윤정 작가님은 〈산 자는 죽고, 죽은 자는 살아가는〉이란 글을 통해, 떠나보낸 자들의 슬픔과 아쉬움,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경험을 펼치시며 더불어 1996년에 개봉된 두 편의 영화인 〈축제〉와 〈학생부군신위〉에 담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산 자들의 삶으로 끝을 맺는 영화들입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경상북도 성주군 한개마을에 건립한 북비고택에 이원조의 유훈이 담긴 ‘독서종자실’ 편액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독서종자’는 글을 읽는 씨앗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원조가 할아버지 이민겸의 자녀 교육과 집안 대대로 전하여 오는 학문을 기념하고 자손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대하며 건 편액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죽음에 직면하면 크게 슬퍼하거나 암울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담담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이를 유훈으로 남겨 후대에 전승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응와 이원조는 선조의 가정교육에 감사함을 보답하는 동시에 후손에게 가법으로 오랫동안 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독서종자’라는 유훈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음을 막연한 두려운 대상으로 보지 않고 가학을 전승하는 태도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이번호의 〈스토리이슈〉는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저자 이상호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이상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시사적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살인사건을 다각도에서 재구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일상사의 지평을 넓힌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서(小暑)에서부터 염소 뿔도 녹는다는 대서(大暑)로 이어지는 가장 더운 7월이 시작됩니다. 오는 7월 24일[음력 6월 16일]을 조상들은 유두(流頭)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일가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유두잔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름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즐거운 휴가철을 되찾는 날들을 저희 웹진 담談 편집위원들은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기원해 봅니다.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양반 부인의 상을 치른 비부(婢夫)”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3-10-08 ~ 1773-10-10
겨울로 접어드는 10월, 하천(下川)의 족증조모 이씨(李氏)가 별세하였다. 올해 80세가 되었는데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식이 없이 쓸쓸하게 살고 있었고, 결국 임종을 한 자식도 하나 없었다. 친족들은 모두 원래 자식이 해야 하는 발상(發喪)은 누가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비부(婢夫) 복삼(福三)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 상차(喪次)에서 망자를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복삼이는 세 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긴 이씨 부인이 그를 거둬 키웠는데, 복삼이는 길러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다하기 위해 상차에 자리하여 곡을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천한 비부가 양반 부인의 장례에서 상주 노릇을 한다며 끌어내려하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는 복삼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천성이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복삼이는 신분이 달랐기에 이씨 부인의 수양아들로 인정받을 수 없었고, 부모를 잃은 자식이 입는 상복도 입을 수가 없었다.

“가친께서 돌아가시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5-05-13

금난수(琴蘭秀)의 부친인 금헌은 1575년 올해 정월부터 심기가 고르지 못하였다. 식사도 점점 양이 줄고 가래와 천식이 아주 심하였는데, 이러한 증세가 오래도록 나아지지 않는 염려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차도가 없이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자 금난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부친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에서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예서에서는 임종이 가까워지면 천거정침(遷居正寢)이라고 하여 병이 깊어진 환자를 정침으로 옮기도록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금난수도 이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었다.
금난수는 임종에 대비해 부친의 처소를 안방으로 옮겼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히 부친이 쾌차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금헌은 5월 13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세상을 떠났다. 오랜 병환 기간이 있었기에 부친이 조만간 먼 길을 떠나실 것을 예감했음에도 애통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금난수와 가족들은 그 애통함에 연거푸 곡(哭)하였다. 집안을 이끌어야 했던 금난수는 정신을 차리고 부친께서 다시 살아나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초혼(招魂)을 진행하였다. 가친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간 자가 부친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소리가 금난수의 귀에 들렸다. 금난수는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시신을 살폈으나 깨어나시지 못했다. 이제는 금난수도 부친이 돌아가셨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난수는 주상(主喪)이 되었고, 금난수의 처 횡성 조씨는 주부(主婦)가 되었다. 금난수는 집안사람들 중 주상인 자신을 도와 상사(喪事)의 일을 처리할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과 사서(司書, 조문객의 출입 등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사화(司貨, 초상에 쓸 물건 또는 재물의 출납 등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를 정한 다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아내가 병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3-19 ~ 1643-08-18

1643년 봄부터 김광계의 아내는 병이 깊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먹고 마시지도 못하였다. 김광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 또 김광계가 존경하고 따르던 재종숙의 대상이 다가오자, 김광계는 아끼는 이를 또 잃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걱정하였다. 더욱이 아내가 병에 걸려 있어 부정이 탈까 싶어 재종숙의 궤연에 전을 올릴 수도 없었다. 여러모로 한스러운 상황이었다.
김광계는 종 무생(戌生)을 용성(龍城)에 보내 약을 처방받아 오게 하였는데, 의원은 김광계의 아내의 병세를 듣고 가감승마갈근탕(加減升麻葛根湯)을 처방하였다. 이 약은 신열을 내리고, 입이 헐고 목구멍이 아픈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다. 김광계는 걱정도 되고, 자신의 노구도 병을 옮을까 싶어 강재(江齋)로 나와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동생 김광악, 김광실, 김광보, 조카 김민 등 여러 사람이 김광계를 매일같이 찾아와 아내의 병세를 전하였는데,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들이었다.

“하회누이의 부고가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6-05-06 ~

1756년 5월 6일. 최흥원은 아침 날이 밝기 전부터 서둘러 10말의 쌀과 5냥의 돈, 2마리 닭과 함께 5홉의 꿀을 종 한선이를 시켜 하회마을로 가져가도록 하였다. 며칠 전 하회마을로부터 걱정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를 가진 최흥원의 누이가 전염병에 걸려 유산을 하였다는 것이다. 유산뿐 아니라 몸 상태가 매우 위중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이때 까지만 해도 누이가 위기를 잘 넘기고 일어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재낭이의 지아비를 하회마을로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누이의 증세가 심각해져 그사이에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최흥원은 당장이라도 누이의 증세를 확인하기 위해 하회로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으나, 최흥원 본인도 병중인 상황에서 함부로 길을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오전에 한선이를 보내 여러 물건을 보내고, 누이의 증세를 다시 확인해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후 무렵, 한선이가 돌아오기도 전에 하회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결국, 누이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에, 이것이 무슨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매우 애통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최흥원은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께는 대체 어찌 말씀드린단 말인가! 병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데, 이제 딸자식의 죽음까지 듣는다면 어머니께서 차마 견딜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최흥원은 소식을 전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도 없는 법. 최흥원은 이윽고 결심하고 어머니 방의 문을 두드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누이의 부고를 전하던 최흥원은 어머니와 함께 통곡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 병으로 딸을 잃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2-05-20 ~ 1592-06-03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근심이 많은 때에, 전염병까지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피난을 온 외지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모두 씻고 먹는 것 역시 부실한 만큼 전염병이 퍼지기도 쉬웠다. 금난수의 가족이 피난하고 있는 고산(孤山)에서도 병자가 나왔다. 이광욱과 혼인한 딸 계종(季從)이 앓기 시작한 것이다. 사위인 이광욱은 이때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모를 챙기기 위해서인지 따로 있었는데, 부인이 심하게 앓는다는 소식에 고산으로 와서 부인의 병세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약재를 구하기도 어려운 흉흉한 상황이었다. 계종은 약 한번 변변히 써 보지 못하고 남편이 돌아간 다음날 저물 때쯤 허망하게 사망하였다. 돌아갔던 남편이 황망하여 바로 찾아왔으나 이미 부인의 시신은 차게 식은 뒤였다. 전쟁 중이라 시신을 시댁으로 보내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금난수는 몸소 딸의 장례를 지휘하였다. 사위와 사돈, 그리고 형제인 금경과 금업, 부모인 금난수와 그의 부인만 참여한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가 끝난 뒤, 아들들은 자신의 부인이 있는 곳으로, 사위는 자신의 부모가 있는 곳으로, 모두 각자의 집안을 챙기러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금난수는 딸의 관을 뗏목에 실어 강을 건너게 한 뒤 소를 빌려 장지까지 운반하였다. 쓸쓸한 장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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