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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직업 관찰기

세계 경제 불황으로 실직과 퇴사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은 취업을 위한 준비에서부터 포기와 좌절을 경험하고 직장인들은 평생고용이란 단어를 잊은 채 투잡과 쓰리잡을 뛰기도 합니다. 이 같은 현상은 38세 직장인들이 평균 10~14개의 직업을 가지는 경험을 한다는 조사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평생 직업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지금은 일과 관련된 자아에서 삶과 관련된 자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저희 웹진 담談은 “직업이 무엇이오”라는 주제로 조선시대의 직업에 대해 준비했습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형성되었던 전문 직업들을 살펴보며 직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종천 선생님은 〈‘직업(職業)’의 세계, 그 오래된 미래〉에서 유교 사회에서 직업이 갖는 의미와 가치사슬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시대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사민(四民)의 직업 체계에 대한 글을 펼쳐 주셨습니다. 조선시대 유교 사상과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해 오신 관점에서 ‘생존에서 보람을 거쳐서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직업의 세계’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아 주셨는데요. 격변하는 직업 생태계의 맥락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기반으로 ‘직업이라는 오래된 미래’를 성찰하는 지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장경희 선생님은 〈조선 시대 유행을 이끌어간 패션 디자이너, 조선의 여성 장인〉에서 조선 왕실의 패션 아이템에 종사한 여성 장인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 장인은 침선비(針線婢), 수비(繡婢), 봉조비(縫造婢), 염모(染母), 수모(首母), 진소장(眞梳匠), 양태장(凉太匠), 모의장(毛衣匠), 복완재작장(服琬裁作匠), 상화장(床花匠) 등이 존재했는데요. 이들은 왕실과 관련된 일은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자신들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이 글을 통해 K-컬처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 여성 장인들의 활동을 눈앞에서 관찰하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서은경 작가님은 〈사방탁자〉에서 작은 가구들을 만들던 소목장(小木匠) 장인들이 어떻게 솜씨를 깃들여 가구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그려주셨습니다. 금난수(琴蘭秀)가 지은 『성재일기(惺齋日記)』를 기반으로 사방탁자가 주문되어 필요한 집에 오랫동안 사용되는 과정을 재미있는 웹툰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수진 작가님의 〈세월이 흐르고 노래의 흐름도 변하고〉에서는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 속 시조꾼들이 꾸미는 멋진 무대를 소개해 주십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비야의 사건일지는 〈책 읽어주는 여자〉로 이어집니다. 이번 일지에서도 산비는 관아에 들른 오빠 정훈과 연서 사건으로 내쫓긴 똘똘한 하녀 채비의 사이를 파헤치며 재미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스토리 이슈’에서는 지난 해 11월 22일 시작되어 올해 5월 28일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는 〈빙옥처럼 깨끗하고 화살처럼 곧아라〉를 소개합니다. 이번 전시는 한양조씨 옥천문중에서 기탁한 자료를 통해 기탁 자료의 소중한 가치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옥천문중은 지조와 절의로 상징되는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鄰, 1658~1737) 선생을 중심으로 합니다. 조덕린 선생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를 비롯하여 조덕린 선생의 신원을 촉구하는 후손들의 통문(通文) 등을 만나 볼 수 있는 전시에 웹진 독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조선 후기 현실 개혁을 주장한 실학자들은 신분제적 직업관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지식에 따른 사회 분업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았습니다. 혼돈이 일상화되는 경제 생태계에서 새해를 맞은 웹진 담談의 독자님들이 조선의 직업과 선인들의 모습에서 통찰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밝힌 직업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배달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땅을 얻어 곡량을 얻게 되고, 공장(工匠)은 기구(器具)로서 곡식을 바꾸어 상인은 물화로서 곡식을 바꾸는 것을 해로울 바 없다. 놀고서는 곡식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면 아침에는 들에 나가서 밭을 갈고 밤에는 돌아와서 자제를 가르치고 옛사람의 글을 읽을 것이다. 밥이 귀한 것이나 백성 모두를 농사로 돌리면 곤란해져서 죽게 될 뿐이다. 장인이 쇠, 나무, 질그릇, 기와, 벽돌을 다음을 만들고 상인이 재화를 유통시키고, 우인(虞人)이 산에 나무를 심고 새나 짐승을 번식하고 여인들이 명주실과 삼, 칡, 모시의 실을 다듬어야 구성원 모두 삶이 원만하며 어떤 직업이든 중요하지 않은 직업이 없다.”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 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 ~ 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가뭄, 비를 기다리는 버드나무와 눈먼 무당의 기우제”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국가 운영의 가장 큰 변수였다. 1614년 봄에도 가뭄은 찾아왔다. 기다리는 봄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타들어 갔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농사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우제를 연달아 지냈다. 눈이 먼 무당이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쳤고, 방방곡곡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게 하였다.

4월 4일, 드디어 비가 내려 모두가 기뻐하였다. 빗줄기가 마치 삼대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랫동안, 고루 내리지 않았고, 닷새 후 방방곡곡엔 다시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다시 향을 사르며 버드나무를 꽂고, 아이와 눈먼 무당이 서교(西郊)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철 장인이 수리용 쇠못을 만들어주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626년 7월 15일, 을유. 맑음. 권별은 한익길의 집에 갔다가 곧바로 쇠못을 보고 오후에 올라왔다. 초간에 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왔다.

1626년 7월 25일, 을미. 맑음. 권별은 귀래곡 철장(鐵匠)의 집에 가서 못 90여 개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초간에 갔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6일, 병신. 맑음. 서까래가 부족하여 수심에 가서 서까래 네 바리를 얻어 와서 곧바로 초간(草澗)으로 갔다. 임이섭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8일, 무술. 초간에 갔다. 목수 진상이 와서 어제부터 연못의 방죽을 고쳐서 쌓고 있다. 여균·이망이 와서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일, 임인. 맑음. 초간에 가서 제방 고치는 일을 마치고 물을 끌어댔다. 달보·경보·원백·여유가 와서 보고 갔다.

“기와장이가 닷새에 걸쳐 새 지붕을 덮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한 달에 걸쳐 사당 건물에 단청을 입히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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