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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을 기다리는가

지난해 11월부터 방영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으로 고려 시대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이 드라마는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 벌어진 고려와 거란 전쟁을 중심으로, 이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황제 현종과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어느 특정 역사 인물의 영웅 서사가 아닌 후세들이 잘 몰랐던 기록 속의 인물들을 소환하여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국제관계 속에서의 활약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거란의 포로가 된 후 투항을 거부하며 처형당한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康兆, 964~1010),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주력을 끝까지 괴롭힌 양규(楊規, ~1011) 등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영웅들을 그리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드라마로 인해 지식정보 프로그램 및 유튜브 채널에서는 고려 시대를 조명하는 콘텐츠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는 조선 시대나 삼국시대와 비교해 소외되었습니다. 그나마 다루어진다 해도 후삼국의 연장선에서 고려 건국을 다루거나, 고려 말기를 조선 개국의 출발점으로 그리는 정도였지요. 이런 맥락에서 이 드라마는 ‘고려’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고려 시대에 대한 호기심과 판타지를 촉발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동안 조선의 판타지에 빠져 있었던 대중들이 새로운 시대와 캐릭터를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고려는 어떤 시대이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조선에서는 고려와 그 시대의 인물을 어떻게 소환하고 평가했을까요?

이번 호에서는 오늘 우리에겐 새로운 판타지이자 매력적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고려 시대와 그 시대의 인물을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평가했을지 담아보고자 합니다.

이정신 선생님은 고려 숙종과 예종 대에 활약한 문신 윤관(尹瓘, 1040∼1111)에 관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평가를 담아주셨습니다.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고 북방으로 가장 넓은 영역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나, 화평론을 내세운 고려조정은 정벌 2년 만에 동북 9성을 반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가 9성에서 철수한 지 6년 만에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고려는 9성 반환이 실책이었음을 인식하게 되는데요,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요한 대외정책과 북방정책을 펼 때면 윤관을 소환하며 그의 행적을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정신 선생님은 〈윤관의 9성에 대한 조선 시대 지식인의 인식〉을 제목으로 고려 시대의 한 역사 인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셨습니다.

허인욱 선생님은 〈고려와 거란 전쟁-정주와 유목의 충돌〉이라는 글로 고려와 거란, 두 나라의 전쟁을 했던 이유를 문화사적으로 풀어주셨습니다. 농경 문화의 고려와 유목 문화의 거란은 생존 방식과 문화적 차이가 충돌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두 나라의 오랜 충돌은 고려의 승리로 평가되는데요, 평야에서 말을 타던 유목민을 고려의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무력하게 만들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청야(淸野)전술, 바람을 이용해 퇴각로를 차단하는 등 놀라운 전략과 전술이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독(獨)선생전〉 세 번째 이야기는 ‘맑은 냇물엔 한양의 나무들 또렷하고’입니다. 고려를 건국할 때 왕건을 도왔던 안동의 공신 김선평·권행·장정필의 위패 위치와 배향 순서를 놓고 100여 년 동안 이어진 후손들의 갈등을 담아주셨습니다. 두 가문의 힘겨루기를 독 선생의 시선에서 씁쓸하게 그려주셨습니다.

이수진 작가님의 〈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에서는 ‘나라를 뒤집는 재미, 혁명의 드라마’로 풀어주셨습니다. 혁명 혹은 반란은 기존의 질서와 힘에 대항하여 성공하거나 실패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과의 승패를 떠나 깨진 질서를 보는 것만으로 재미를 느끼는데요, 단, 나와 상관없는 시대와 장소에서 벌어졌을 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으며,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펼쳐진 공연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특히, 1937년 초연된 연극 〈백화〉는 고려 말 평양 기생 백화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복수를 시도하는 내용으로 중세 시대의 여인상을 새롭게 조명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님의 바람처럼 이 시대 이 작품이 무대에서 펼쳐진다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이문영 작가님이 그려주신 〈백이와 목금〉의 세 번째 이야기는 ‘망허산의 호랑이’입니다. 목금이는 호환으로 힘들어하는 망허촌 이야기를 듣자, 호랑이를 부렸다는 강감찬 장군을 떠올립니다. 강감찬 장군이 북두칠성 중 네 번째 별 문곡성의 화신이었기에 호랑이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 목금은 이를 응용하여 28개의 초를 켜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개, ‘천구(天狗)’를 불러내어 호랑이를 떠나게 하려고 하는데…. 목금의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이번 호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안동시 정하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정자 ‘영호루’입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서 70일간 머물렀는데, 영호루에서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리고, 활을 쏘는 등 영호루에 올라서 마음을 정비하고 달랬다고 합니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이곳을 잊지 못하였다고 전해지는데요. 안동 영호루에 담긴 공민왕의 이야기로 가득 담았습니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한 편의 대하드라마에 대중들이 몰입하는 이유는 수 없는 난제와 혼란 속에서도 슬기롭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옳은 방향을 찾아가는 새로운 영웅들을 담고 있어서는 아닐까.

스토리테마파크 웹진《담談》 121호는 여기까지입니다.




편집자 소개

김민옥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조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낙안읍성의 역사문화자원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관해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 공간의 장소성과 스토리텔링, 타문화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이다. 공저로 『영화 춘향전과 한옥』, 『정보혁명』 등이 있고, 「아우서호퍼의 전쟁일기 맥락지식 분석과 스토리테마파크에서의 전유 가능성」, 「글로벌 콘텐츠화를 위한 전통의 복원과 시각적 재현: 영화 〔춘향뎐〕을 중심으로」, 「타문화 이해와 소통 과정을 통한 로컬 지식의 상호작용적 확장: 베른슈토르프의 부탄 영상물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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