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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 (7) ]

첩의 삼년상

이상호

1616년 음력으로 6월 27일, 예안의 선비 김택룡金澤龍(操省堂, 1547~1627)은 사위 권근오가 보낸 쌀을 받고 감사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7월 1일에 있을 김택룡의 두 번째 첩 제사에 쓰라고 보낸 것이다. 사위는 감사하게도 그 다음날 제사에 쓰일 각종 채소들까지 보내왔다. 제사를 위한 물품들이 갖추어졌고, 29일이 되면서 온 집안은 제사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본 부인도 아닌,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준비로 온 집안이 분주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제사 음식을 준비하게 했고,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라고 명을 내려 두었다. 이번 제사는 그냥 제사가 아니라 삼년상을 끝내는 제사인지라, 김택룡은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음력으로 7월 1일, 김택룡은 2년 전 먼저 간 두 번째 첩을 기리면서 제사를 지냈다. 평소 알고 지냈던 진사 박회무와 이서, 그리고 홍붕 등도 김택룡의 슬픔에 동참했다. 두 번째 첩이 나은 2남 2녀 가운데 장녀는 액을 피해야 하는 일이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셋은 모두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제사를 끝낸 후 평상복으로 갈아 입음으로써, 비로서 삼년상을 끝냈다. 비록 첩이었지만, 집안전체의 일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든 예를 다 갖추어 그녀를 떠나 보냈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이다. 신분제 사회란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과 행위 범주가 분명하게 구획되어 있다. 신분에 따른 행동의 제약이 규범의 형태로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신분은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후대까지 그 신분이 세습될 때 신분제 사회는 완성된다. 비록 양반을 지아비로 섬겼다고 해도, 첩은 여전히 천한 신분이다. 첩의 자식들이 비록 양반의 자식이라고 해도, 양반과 같은 신분을 가질 수 없는 이유였다. 이 때문에 첩의 죽음은 양반의 전유물인 삼년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첩의 죽음에 대해 굳이 삼년상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분에 따른 행동 양식을 규정하고 있는 예禮는 적어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김택룡은 첩이 낳은 2남 2녀의 자식들로 하여금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게 했다. 김택룡 본인도 자식들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인을 잃은 마음으로 슬퍼했다. 그리고 삼년상을 마치는 날, 그는 집안 전체의 제사로 모두의 애도 속에 먼저 죽은 첩을 떠나 보냈던 것이다. 김택룡은 조목趙穆(月川, 1552~1606)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학자 이황李滉(退溪, 1501~1570)의 수제자 가운데 한 명인 조목의 적전嫡傳을 잇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유교적 예제에 밝았으며, 유학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던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첩이 나은 자식들과 함께 첩의 삼년상을 지켰던 것이다.

유학은 사람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 맺기에 관한 학문으로 규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의 사적 욕심과 욕망을 제어하고 타인을 위한 공적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유학의 공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禮는 이와 같은 공적 마음(선한 마음)이 만들어 낸 이상적인 관계맺음을 위한 최적의 행동양식이며, 예의 규정은 이러한 행동양식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예가 이상적인 관계맺음이라는 원론보다 구체적 행위 양식을 따르게 하기 위한 규범으로의 성격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예는 형식에 바탕한 규율의 형태로 남아 버렸다. ‘사람’은 빠지고 그 자리에 형식만 남았던 것이다. 복을 몇 년 입고, 절을 몇 번 하며, 젯상을 어떠한 순서로 차려야 하는지를 가지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김택룡은 삼년상을 지내면서,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연민과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입장에서 예를 해석했다. ‘사람’이 가진 감정을 적절하게 행위로 풀어내려 했던 예의 본래 정신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에 앞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먼저 기억하고,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의 슬픔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김택룡이 지낸 첩의 삼년상 제사에는 바로 이러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김택룡이 지낸 첩의 삼년상을 진정한 예의 복원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날


계암일록

1616년 6월 27일 잠시 비가 내렸다가 곧 맑아짐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다.

1616년 6월 28일 맑음. 낮에 비
권근오가 채물菜物을 보냈다.

1616년 6월 29일 맑음
부실副室의 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이복李福에게 약과를 만들게 했다. 저녁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지낸 이는 김개일·김시성·이서·이재창·홍회·김양선·권근오·이복·이진동·송상지 등이다. 이천동은 몸이 아파 오지 않았다. 아들 김숙과 생질 정득 등도 와서 제사지냈다.

1616년 7월 1일 맑음
부실의 재기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가 와서 제사지냈다. 이서와 홍붕도 왔다. 장녀는 피액避厄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다.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입었다. 신주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모두 돌아갔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 스토리

작가소개

이상호
이상호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계명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선친의 산소에 구멍을 낸 범인을 찾아라! - 덫에 걸려든 산다람쥐 ”

김령, 계암일록,
1622-02-27 ~ 1622-03-07
1622년 2월 27일, 청명절(淸明節)이었다. 김령은 아침 일찍 외조모의 기제사를 지내고, 부모님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살펴보니, 어머니의 산소에 쥐구멍이 나있는 것이 아닌가. 김령은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쥐구멍을 발견하고는 놀랍고도 괴로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즉시 손질해서 고치려고 했지만, 날과 달의 거리낌이 고려되어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김령은 잠이 오지 않았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머니 산소의 쥐구멍 때문이었다. 김령은 비 내리는 2월 29일의 아침, 다시 산소로 찾아가 쥐덫을 놓고 잡히기를 기다렸다. 지관에게 물어보니 산소에 난 구멍은 삼월절(三月節) 안에 손대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쥐덫을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쥐덫을 놓은 지 이틀만인 3월 1일, 날이 저물 무렵, 종이 쥐덫에서 잡힌 산다람쥐를 가져왔다. 옳거니, 김령은 어머니의 산소에 구멍을 뚫은 범인이 이 녀석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뒤로도 매일 어머니의 산소에 찾아가 확인해보았는데, 더 이상 구멍 뚫리는 일이 없었다. 필시 산다람쥐로 인해 생긴 탈이었던 것이다. 김령은 일주일이나 더 확인해본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 권문해, 어머니를 위해 직접 약을 조제하다 ”

권문해, 초간일기,
1583-03-07 ~
1583년 3월 7일, 권문해가 예천을 떠나 사간원 사성으로 복직되어 한양에 올라온 이후 조정은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북방에서는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민심은 흉흉해지고, 조정은 정치적 이견들이 수 없이 대립하는 가운데 권문해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권문해는 그렇게 바쁜 중에도 어머니의 안위와 평안을 늘 염려하였다. 며칠째 비가 내리며 궂은 날씨가 이어지는데 어머니의 몸이 편치 않아보였다. 어머니는 뱃속이 잠시 편치 않은 가벼운 증상이라 했지만 권문해는 동지중추부사 양예수(楊禮壽)를 직접 찾아가 어머니에게 좋은 약을 물었다. 당대 탕약과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양예수는 가입이진탕(加入二陣湯)과 기효사물탕(奇效四物湯)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권문해는 그 말에 직접 전의감(典醫監)에 가서 약을 조제해왔다.

“ 정성스러운 3년상, 어버이의 빈소에 올리지 않은 음식은 입에 대지 않는다 ”

김령, 계암일록,
1608-11-28 ~
1608년 11월 28일, 임 형의 이야기가 내성의 참봉 이문규와 수군 홍동년의 효행에 미쳤다.
이 참봉은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어버이 가묘에 평상시와 같이 밥상을 올렸는데, 퇴도(退陶, 이황) 선생이 ‘지나친 예’라고 말했으나, 이것은 귀한 일이다.
김령은 일찍이 이문규의 효행은 들었으나 홍동년의 일은 처음 듣는다.
홍동년은 생전에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모셨는데 돌아가시자 3년상을 지내는 동안 비록 보잘것없는 음식일지라도 어버이 빈소에 올리지 않고는 자기 입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그의 어버이 묘소에 성묘하러 가서 개암나무 열매를 따다가 절하고 올렸는데, 중이 지나가기에 불러 나누어 먹자고 하니, 그가 웃으면서 갔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사소한 일이나 역시 그의 지성스러운 효심이 독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상에도 반드시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 피난길 헤어진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 듣고 주저앉다 ”

도세순, 용사일기,
1593-05-15 ~ 1593-06-11
1593년 5월, 도세순(都世純)은 합천의 초계(草溪)에 있었다. 그리고 이때 부모님들은 광대원(廣大院)에 계셨다. 도세순은 오고가는 인편에 부모님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5월 15일 종숙부인 도장(都章)이 와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소식을 세순에게 전하였다. 전한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름 모를 병을 앓고서는 10여 일 만에 일어나셨고, 또 세순의 형 역시 아버지를 이어 병으로 누워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세순은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과 몸이 어지럽고 뒤숭숭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순이 부모님이 계신 광대원으로 가자니 강물이 불어 갈 수도 없었고, 며칠 간 부모님의 소식이 끊긴 채 마음만 애태워야 했다.
6월 1일이 되자 도장 숙부께서 비로소 광대원으로 돌아가실 수가 있었다. 세순은 급히 옥수수 닷 되를 찾아 광대원으로 보냈다. 그런 후 얼마 후 상주에 갔던 연금(連金)이가 6월 7일 돌아왔다. 연금은 돌아오는 길에 광대원을 들렀는데, 광대원에는 전염병이 돌고 어머니마저 병이 들어 누우셨다고 세순에게 전했다. 세순은 어머니가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6월 11일 명복(命卜)이 광대원에서 세순을 찾아 와서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하였다. 세순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세순은 털썩 가슴을 부여 치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순간 세순의 마음속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까맣고 황량해졌다. 조금 뒤 정신을 차린 세순은 급히 어머니가 계신 광대원으로 달려갔다.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흉흉한 시절, 어머니의 제삿상에 떡을 올리다 ”

도세순, 용사일기,
1594-06-05 ~ 1594-06-08
1594년 6월 5일, 도세순(都世純)은 형님과 누이, 그리고 동생을 만나보고, 또 8일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형과 동생이 있는 고향 마을 운곡(雲谷)으로 출발하였다. 도세순은 매실[毛也]에서 밀 약간과 보리, 젓갈, 그리고 콩가루 약간을 마련하여 직접 짊어지고 홀로 길을 나섰다. 이 가운데 콩가루는 도세순이 길을 가며 쓸 양식이었다.
도세순은 출발한 날 저녁에는 용담(用淡)에서 묵고, 6월 6일에는 한배미[大夜]에 묵었다. 그리고 6월 7일 도세순은 몸이 몹시 피곤함을 느끼며 겨우 운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곡에 와 형님과 누이, 동생을 보니 겨우 명줄이나 보존하고 있었고, 몸 전체는 굶주림에 들뜬 모습이 확연하였다. 도세순은 형님과 이마를 맞대고 통곡을 하며, 그 동안 만나지 못한 사연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도세순은 저간의 사정을 이루 다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날 도세순과 형님, 누이와 동생들은 굶주려 죽을 지경인데도 감당하지 못할 제수를 마련하고, 떡과 술, 나물을 갖추었다.
다음날(6월 8일) 새벽, 세순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허위(虛位)를 진설하고 어미니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날 숙모(숙부 배응보의 처)가 우박촌(于朴村)에서 와 제사떡을 음복하고는 깊이 탄식하여 세순의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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