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대체로 2층으로 되어 있고 명대에 지은 것은 3층도 있다. 이처럼 2층 이상의 집을 짓고 사는 풍습은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기온이 비교적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강남 지역에서는 일종의 고상건축(高床建築)이라고 볼 수 있는 2층의 목조집에서 생활했는데 사람들은 2층에서 지내고 아래층은 주로 가축우리나 창고로 사용한다. 후이저우 전통가옥이 남방의 고상식 가옥과 북방의 사합원 가옥이 결합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사합원(四合院)이란 북경을 중심으로 중국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네 채의 집을 마당을 중심으로 네모나게 배치한 형식을 말한다. 이때 네 채의 집은 후이저우와 달리 독립된 건물로 분리되어 있다.
후이저우의 집들도 실제 생활은 주로 2층에서 이루어지는데 특히 부녀자들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아래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당의 좌우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대체로 청당 좌우 측벽의 한쪽에 붙어 설치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건물 내부에 설치된 집도 있다.
건물 내부에 설치된 계단 가운데 청칸 마을의 석주청은 계단을 나선형으로 설치하여 계단이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하였다. 석주청의 계단은 후이저우 가옥에서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대단히 특별하며 형태미가 주는 아름다움 또한 다른 집에서 접할 수 없는 각별함이 있다.
그림1 청칸 나윤곤가의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대부분의 계단은 이 위치에 설치된다.
그림2 나선형으로 설치된 석주청의 내부 계단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복도가 나오는데 복도는 규모가 큰 경우 2층의 사면을 돌아가며 설치되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문채를 제외한 3면에만 돌려져 있다. 2층에도 중앙부에는 청당과 같은 공간이 있어 가족들이 모일 수 있으며 안마당 즉 천정 쪽으로는 미인고(美人靠)라고 부르는 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젊은 여성들은 외부 남자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미인고에 앉아서 밖에서 들어오는 남자 손님들을 엿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미인고라는 의자의 이름도 아름다운 여인이 기대어 앉는 의자라는 뜻이다.
복도의 안마당 쪽으로는 분합문 형식으로 된 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을 열면 위로는 하늘이 올려다 보이고 아래로는 천정이 내려다보인다. 문을 닫으면 아늑한 여인들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미인고가 있는 이층 중심부는 거실과 같은 기능을 하는 넓은 마루의 공간이 있다. 거실 양측에는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침실이 있다. 모든 침실들은 침대 하나와 화장대로 쓸 수 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한두 개가 놓이면 꽉 찰 정도로 면적이 좁다.
미인고가 있는 본채 중심부는 가족들이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거실 공간이다. 거실 뒤쪽으로 손바닥만한 창이 있어 빛을 받아들여 조명을 해주거나 환기도 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이층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집은 거의 없다. 먼지만 쌓인 이층으로 오르면 무너져 가는 옛 후이저우의 그림자가 어른댈 뿐이다. 젊은이가 떠난 집에는 이제 노인 내외가 사는 것이 고작이며 그나마 빈집이 태반이니 이 집들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본채 건물 좌우 측면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주로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인다. 명대 건물에서 보이는 삼층도 역시 창고 기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엌은 집 뒤나 측면의 공간을 활용하는데 설계의 주요 시설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집 뒤쪽에 따로 붙인 경우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후원의 채소밭으로 연결되어 음식을 만드는 중간에 채소도 바로 뜯어 조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안에 배치된 부엌은 비좁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림3 청칸 마을 루어룬쿤(羅潤坤) 가옥 2층의 창문 밑으로 미인고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 앉으면 아래 대문과 천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그림4 이층 분합문 창을 열면 하늘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다. 청칸 마을 루어룬쿤 가옥
이처럼 천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 형으로 둘러싸고 배치된 2층 또는 3층의 구조가 후이저우 가옥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집의 규모가 커지면 같은 구조의 집이 뒤쪽으로 한 채 더 배치된다. 뒤채로 가는 통로는 아래층 청당의 뒤에 문을 만들어 사용한다. 두 채가 앞뒤로 연결된 집을 이진식(二進式)이라 한다. 아주 큰 집은 세 채를 연결시킨 것도 있는데 이는 삼진식이라 한다. 큰 규모의 집에는 본채 주위에 건물을 붙여 관음보살을 모시는 종교적 공간을 설치하기도 하고 골목을 흐르는 수로의 물길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작은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또 후원을 만들어 원림(園林)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공간의 연결은 사람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소통 공간이기도 하며 물길을 통해 집의 안과 밖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그림5 2층 침실의 내부.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 마을 루어후이타이(羅會泰) 댁
그림6 복잡한 구조의 부엌. 화덕 아궁이가 벽을 타고 여러개 설치되어 있고 아궁이에서 벽을 타고
굴뚝이 올라가는데 이는 일종의 난방 시설을 겸하기도 한다. 황산시 셔현 진추안 마을.
그림7 집이 좁아 골목에 조리대를 설치한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황산시 셔현 위량 마을.
이러한 소통공간으로 들 수 있는 특수한 구조로는 수루(绣楼)라고 부르는 누각과 같은 형태의 공간을 들 수 있다. 이는 집의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이곳 역시 여인들의 전유 공간이다. 여인들은 이곳에 모여 앉아 수를 놓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면서 바깥 골목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길에 지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누각형 부속 건물을 일반적으로 여인들의 공간 특히 결혼 전의 규수들의 공간이라고 해서 소저수루(小姐绣楼)라고 한다.
황산시 이현 시디(西遞) 마을의 수루는 대부제(大夫第)라는 고택의 주인이 본체 옆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길 쪽으로 붙여서 지은 일종의 누각이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처마 끝의 날렵함은 여느 중국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과장이 없어 보기에 편안하며 시디 마을의 명물들 중 하나다. 동네 총각들을 수루 아래 길에 모이도록 하여 이층에서 비단수를 놓은 공을 던져 받는 사람을 배필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중국 어느 마을을 가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림8 수루에서 내다 본 시디 마을의 풍경
그림9 길에서 올려다 본 수루의 모습. 왼쪽에 '산시山市', 오른쪽에 '도화원리인가桃花源裏人家'현판이 보인다.
지금까지 말한 후이저우 집의 대강만 훑어보더라도 집의 구조나 규모 또는 집의 꾸밈 등을 볼 때 한 채의 집에 들어간 돈이 어마어마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집들이 수백 채씩 모여 큰 마을을 이루고 있음은 마을의 경제력이 엄청났음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이곳이 명‧청대의 중국 상인을 대표하는 휘상(徽商)의 고장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그 많은 마을의 집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집으로 손꼽히는 집은 단연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승지당(承志堂)이다. 청나라 말기인 1855년 지은 이 집은 건축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규모에서나 집의 짜임새나 구조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각종 조각 장식에서 후이저우의 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의 다양한 조각 장식들이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도 거의 훼손되지 않은 것은 가히 기적 같은 일이다.
승지당은 소금(海鹽)을 팔아 큰 부자가 된 왕딩구이(汪定貴)의 집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시장 급에 해당되는 오품동지(五品同知) 벼슬까지 돈으로 사서 부(富)와 명예를 다 이루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한 왕딩구이는 자신의 부와 명예에 걸맞은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게 되었다. 그 화려한 정도는 사람들이 이 집을 홍루몽 속에 나오는 화려한 저택에 버금간다고 하는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승지당은 큰 규모와 내부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민간고궁(民間古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승지당은 기본적으로는 전청(前廳) 즉 앞채와 후청(後廳) 즉 뒤채로 이루어진 이진식(二進式) 구조이다. 앞채와 뒤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공간이 배치되어 회랑식 구조로 보기도 한다. 앞채로 들어가는 입구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관음보살을 모신 불당이 있으며 그 옆으로 골목의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어당(魚塘) 즉 고기를 기르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둘레에는 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어청(觀魚廳)이란 공간을 만들고 미인고를 설치하였다. 이 집의 아름답고 내밀한 공간의 하나다. 관어청 뒤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젊은 첩실을 감추어 두었다고 전하는 작은 집이 있다. 주인이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젊은 여인이 관어청의 미인고에 기대앉아 물끄러미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 대궐 같은 집 뒤꼍의 또 다른 그늘이 보인다. 두 채의 집 사이 좁은 공간에 우물이 있어서 집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을 공급한다.
그림10 승지당 어당과 관어청
그림11 승지당 내부의 우물
그림12 승지당의 관음보살을 모신 불당
앞채와 뒤채가 붙은 본채의 오른쪽으로는 배산각(排山閣) 탄운헌(呑雲軒) 등의 작은 건물이 있다. 이 두 공간은 모두 놀이 공간인데 배산각은 마작을 하는 곳이고 탄운헌은 ‘구름을 삼키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담배나 아편 등을 즐기는 곳이다. 마작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즐기는 국민 놀이라 할 수 있고 아편은 청나라 말기 영국인들에 의해 들어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결국 중국을 망하게 한 마약이다. 탄운헌은 당시 중국의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탄운헌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문을 나서면 넓은 마당이 길게 터졌는데 여러 가지 화초를 심어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었다.
후이저우의 살림집들을 보면 조금 큰 집이라 해도 내부의 공간이 좁아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승지당 같은 대 저택을 들어와 보면 역시 큰 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온갖 사치와 환락을 집안에서 즐길 수 있게 다른 세상을 만들어 살았음을 알게 한다.
살림집은 그 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삶과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또 상징적인 공간이다. 어떤 집에서는 명대와 청대의 건축의 변화가 그대로 나타나 한 곳에서 두 시대의 건축양식을 일별할 수도 있다. 어떤 집은 옛 영화를 고스란히 남겨 후손들이 조상 덕으로 먹고 살기도 하는데 어떤 집은 과거의 화려한 영화가 흔적만 남아 이제는 그날그날의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의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짝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오늘 많은 전통 가옥들이 관광객의 구경거리로 되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함만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전통문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보존하는 것이 마땅한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집에 살아야 하는 주민들의 삶은 어떻게 과거의 전통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바람직한가? 전통을 가장 큰 얼굴로 내세우는 안동에 살면서 늘 답답하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다.
그림13 조상이 남겨준 큰 집이 그냥 큰 ‘짐’으로만 남아 그 옆에 작은 집을 붙여 짓고 사는 사람도 많다.
황산시 셔현 진추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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