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후이저우 이야기 (6) ]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융합체,
후이저우의 살림 집 2

임세권


미인들의 공간


집은 대체로 2층으로 되어 있고 명대에 지은 것은 3층도 있다. 이처럼 2층 이상의 집을 짓고 사는 풍습은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기온이 비교적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강남 지역에서는 일종의 고상건축(高床建築)이라고 볼 수 있는 2층의 목조집에서 생활했는데 사람들은 2층에서 지내고 아래층은 주로 가축우리나 창고로 사용한다. 후이저우 전통가옥이 남방의 고상식 가옥과 북방의 사합원 가옥이 결합된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사합원(四合院)이란 북경을 중심으로 중국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네 채의 집을 마당을 중심으로 네모나게 배치한 형식을 말한다. 이때 네 채의 집은 후이저우와 달리 독립된 건물로 분리되어 있다.

후이저우의 집들도 실제 생활은 주로 2층에서 이루어지는데 특히 부녀자들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아래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마당의 좌우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대체로 청당 좌우 측벽의 한쪽에 붙어 설치되었지만 경우에 따라 건물 내부에 설치된 집도 있다.

건물 내부에 설치된 계단 가운데 청칸 마을의 석주청은 계단을 나선형으로 설치하여 계단이 차지하는 면적을 최소화하였다. 석주청의 계단은 후이저우 가옥에서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대단히 특별하며 형태미가 주는 아름다움 또한 다른 집에서 접할 수 없는 각별함이 있다.


그림1 청칸 나윤곤가의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대부분의 계단은 이 위치에 설치된다.


그림2 나선형으로 설치된 석주청의 내부 계단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복도가 나오는데 복도는 규모가 큰 경우 2층의 사면을 돌아가며 설치되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문채를 제외한 3면에만 돌려져 있다. 2층에도 중앙부에는 청당과 같은 공간이 있어 가족들이 모일 수 있으며 안마당 즉 천정 쪽으로는 미인고(美人靠)라고 부르는 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젊은 여성들은 외부 남자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미인고에 앉아서 밖에서 들어오는 남자 손님들을 엿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미인고라는 의자의 이름도 아름다운 여인이 기대어 앉는 의자라는 뜻이다.

복도의 안마당 쪽으로는 분합문 형식으로 된 창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을 열면 위로는 하늘이 올려다 보이고 아래로는 천정이 내려다보인다. 문을 닫으면 아늑한 여인들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미인고가 있는 이층 중심부는 거실과 같은 기능을 하는 넓은 마루의 공간이 있다. 거실 양측에는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침실이 있다. 모든 침실들은 침대 하나와 화장대로 쓸 수 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한두 개가 놓이면 꽉 찰 정도로 면적이 좁다.

미인고가 있는 본채 중심부는 가족들이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거실 공간이다. 거실 뒤쪽으로 손바닥만한 창이 있어 빛을 받아들여 조명을 해주거나 환기도 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이층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집은 거의 없다. 먼지만 쌓인 이층으로 오르면 무너져 가는 옛 후이저우의 그림자가 어른댈 뿐이다. 젊은이가 떠난 집에는 이제 노인 내외가 사는 것이 고작이며 그나마 빈집이 태반이니 이 집들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본채 건물 좌우 측면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주로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인다. 명대 건물에서 보이는 삼층도 역시 창고 기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엌은 집 뒤나 측면의 공간을 활용하는데 설계의 주요 시설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집 뒤쪽에 따로 붙인 경우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후원의 채소밭으로 연결되어 음식을 만드는 중간에 채소도 바로 뜯어 조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안에 배치된 부엌은 비좁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림3 청칸 마을 루어룬쿤(羅潤坤) 가옥 2층의 창문 밑으로 미인고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 앉으면 아래 대문과 천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그림4 이층 분합문 창을 열면 하늘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다. 청칸 마을 루어룬쿤 가옥


안과 밖을 소통시키는 공간들


이처럼 천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 형으로 둘러싸고 배치된 2층 또는 3층의 구조가 후이저우 가옥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집의 규모가 커지면 같은 구조의 집이 뒤쪽으로 한 채 더 배치된다. 뒤채로 가는 통로는 아래층 청당의 뒤에 문을 만들어 사용한다. 두 채가 앞뒤로 연결된 집을 이진식(二進式)이라 한다. 아주 큰 집은 세 채를 연결시킨 것도 있는데 이는 삼진식이라 한다. 큰 규모의 집에는 본채 주위에 건물을 붙여 관음보살을 모시는 종교적 공간을 설치하기도 하고 골목을 흐르는 수로의 물길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작은 연못을 만들기도 한다. 또 후원을 만들어 원림(園林)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공간의 연결은 사람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소통 공간이기도 하며 물길을 통해 집의 안과 밖을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그림5 2층 침실의 내부.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 마을 루어후이타이(羅會泰) 댁


그림6 복잡한 구조의 부엌. 화덕 아궁이가 벽을 타고 여러개 설치되어 있고 아궁이에서 벽을 타고
굴뚝이 올라가는데 이는 일종의 난방 시설을 겸하기도 한다. 황산시 셔현 진추안 마을.


그림7 집이 좁아 골목에 조리대를 설치한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황산시 셔현 위량 마을.


이러한 소통공간으로 들 수 있는 특수한 구조로는 수루(绣楼)라고 부르는 누각과 같은 형태의 공간을 들 수 있다. 이는 집의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이곳 역시 여인들의 전유 공간이다. 여인들은 이곳에 모여 앉아 수를 놓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면서 바깥 골목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길에 지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누각형 부속 건물을 일반적으로 여인들의 공간 특히 결혼 전의 규수들의 공간이라고 해서 소저수루(小姐绣楼)라고 한다.

황산시 이현 시디(西遞) 마을의 수루는 대부제(大夫第)라는 고택의 주인이 본체 옆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길 쪽으로 붙여서 지은 일종의 누각이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처마 끝의 날렵함은 여느 중국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과장이 없어 보기에 편안하며 시디 마을의 명물들 중 하나다. 동네 총각들을 수루 아래 길에 모이도록 하여 이층에서 비단수를 놓은 공을 던져 받는 사람을 배필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중국 어느 마을을 가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림8 수루에서 내다 본 시디 마을의 풍경


그림9 길에서 올려다 본 수루의 모습. 왼쪽에 '산시山市', 오른쪽에 '도화원리인가桃花源裏人家'현판이 보인다.


지금까지 말한 후이저우 집의 대강만 훑어보더라도 집의 구조나 규모 또는 집의 꾸밈 등을 볼 때 한 채의 집에 들어간 돈이 어마어마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집들이 수백 채씩 모여 큰 마을을 이루고 있음은 마을의 경제력이 엄청났음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이곳이 명‧청대의 중국 상인을 대표하는 휘상(徽商)의 고장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그 많은 마을의 집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집으로 손꼽히는 집은 단연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승지당(承志堂)이다. 청나라 말기인 1855년 지은 이 집은 건축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규모에서나 집의 짜임새나 구조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각종 조각 장식에서 후이저우의 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의 다양한 조각 장식들이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도 거의 훼손되지 않은 것은 가히 기적 같은 일이다.


승지당이 보여주는 후이저우 부자들의 은밀한 생활


승지당은 소금(海鹽)을 팔아 큰 부자가 된 왕딩구이(汪定貴)의 집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시장 급에 해당되는 오품동지(五品同知) 벼슬까지 돈으로 사서 부(富)와 명예를 다 이루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한 왕딩구이는 자신의 부와 명예에 걸맞은 크고 화려한 집을 짓게 되었다. 그 화려한 정도는 사람들이 이 집을 홍루몽 속에 나오는 화려한 저택에 버금간다고 하는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승지당은 큰 규모와 내부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민간고궁(民間古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승지당은 기본적으로는 전청(前廳) 즉 앞채와 후청(後廳) 즉 뒤채로 이루어진 이진식(二進式) 구조이다. 앞채와 뒤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공간이 배치되어 회랑식 구조로 보기도 한다. 앞채로 들어가는 입구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관음보살을 모신 불당이 있으며 그 옆으로 골목의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어당(魚塘) 즉 고기를 기르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둘레에는 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어청(觀魚廳)이란 공간을 만들고 미인고를 설치하였다. 이 집의 아름답고 내밀한 공간의 하나다. 관어청 뒤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젊은 첩실을 감추어 두었다고 전하는 작은 집이 있다. 주인이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젊은 여인이 관어청의 미인고에 기대앉아 물끄러미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 대궐 같은 집 뒤꼍의 또 다른 그늘이 보인다. 두 채의 집 사이 좁은 공간에 우물이 있어서 집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을 공급한다.


그림10 승지당 어당과 관어청


그림11 승지당 내부의 우물


그림12 승지당의 관음보살을 모신 불당


앞채와 뒤채가 붙은 본채의 오른쪽으로는 배산각(排山閣) 탄운헌(呑雲軒) 등의 작은 건물이 있다. 이 두 공간은 모두 놀이 공간인데 배산각은 마작을 하는 곳이고 탄운헌은 ‘구름을 삼키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담배나 아편 등을 즐기는 곳이다. 마작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즐기는 국민 놀이라 할 수 있고 아편은 청나라 말기 영국인들에 의해 들어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결국 중국을 망하게 한 마약이다. 탄운헌은 당시 중국의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탄운헌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문을 나서면 넓은 마당이 길게 터졌는데 여러 가지 화초를 심어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었다.

후이저우의 살림집들을 보면 조금 큰 집이라 해도 내부의 공간이 좁아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승지당 같은 대 저택을 들어와 보면 역시 큰 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온갖 사치와 환락을 집안에서 즐길 수 있게 다른 세상을 만들어 살았음을 알게 한다.

살림집은 그 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삶과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또 상징적인 공간이다. 어떤 집에서는 명대와 청대의 건축의 변화가 그대로 나타나 한 곳에서 두 시대의 건축양식을 일별할 수도 있다. 어떤 집은 옛 영화를 고스란히 남겨 후손들이 조상 덕으로 먹고 살기도 하는데 어떤 집은 과거의 화려한 영화가 흔적만 남아 이제는 그날그날의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의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짝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오늘 많은 전통 가옥들이 관광객의 구경거리로 되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불편함만을 안겨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전통문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보존하는 것이 마땅한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집에 살아야 하는 주민들의 삶은 어떻게 과거의 전통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바람직한가? 전통을 가장 큰 얼굴로 내세우는 안동에 살면서 늘 답답하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다.


그림13 조상이 남겨준 큰 집이 그냥 큰 ‘짐’으로만 남아 그 옆에 작은 집을 붙여 짓고 사는 사람도 많다.
황산시 셔현 진추안 마을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투장사건(1) 손씨 일가,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고 아비를 남의 산에 몰래 묻다”

김령, 계암일록,
1622-12-29 ~ 1623-01-20
1622년 12월 29일, 안동의 손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 서북쪽 1리쯤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다. 이 무덤이 온 동네를 덮어 누르니 마을 사람들에게 큰 방해가 되었다. 윗마을에는 여염집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에 손흥겸(孫興謙)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 문제의 무덤 바로 옆에 묘를 쓰려고 하였다. 이런 추세라면 그 산 근처는 모두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기에 광산 김씨 일가에서는 이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손씨 일가는 이 뜻을 따르지 않았다.

“투장사건(2) 교활한 손씨 일가, 관리를 등에 업고 반격을 시작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3-02-04 ~ 1623-04-11
예안현 마을의 뒷산에 몰래 무덤을 쓰고 이에 대해 불법이라는 판결까지 받은 손씨 무리들은 2월 초, 마을에 들어와 종일토록 나가지 않고 버텼다. 애걸복걸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는 “무덤을 다시 파내어 강제로 옮기라”고 판결을 내렸다. 사건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손씨 무리는 무덤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고, 돌과 흙을 져 나르며 봉분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를 저지하고자,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마을 장정 50여 명이 한 데 모였다. 손씨 무리의 도발에 격노한 몇 장정들이 무덤가로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손씨 무리가 스스로 상복을 찢고는 “오천(烏川) 양반이 종들을 거느리고 무덤을 파헤치고 있다, 그들에게 맞아서 옷이 이처럼 찢어졌다.”며 교활하게 굴었다. 특히 김령은 그들에게 심한 욕을 들어야했다.

“투장사건(3) 손씨 일가, 사헌부 뜰에 주저앉아 통곡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3-04-17 ~ 1623-10-28
예안현 뒷산에 투장(偸葬)한 손가 무리의 극악무도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서 이 사건으로 사헌부에 소장을 제출하기까지 하였다. 1623년 7월, 사헌부에서는 경상도로 문서를 발송하여 김령 집의 종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김령은 몹시 놀랍고 통탄스러웠다. 그들이 이토록 악행을 저지르니, 형편상 서울로 가서 대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령의 아들 요형을 비롯한 광산 김씨 집안의 젊은이 몇이 상경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상경한 김에 과거 시험도 볼 예정이었다.
1623년 8월 16일, 상경한 아들 요형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조정이 어지러워 투장 사건에 대한 결정을 바로잡을 틈이 없었으나, 여러 지인들이 힘써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사헌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해당 도에서 바로 처결하라고 판결하였고, 소장의 말미에 “투장이 만약 확실한 것이라면 죄를 다스린 뒤에 강제로 옮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를 듣고 있던 손씨 무리의 사람들은 사헌부 뜰에서 통곡을 하고, 광산 김씨 일행을 향해 무도한 말을 쏟아내었다.

“권력을 이용한 군수의 간통사건에 대해 감사가 직권으로 파직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09 ~
1751년 7월 9일, 흥해군수(興海郡守) 이우평(李字平)이 전 도훈도(前都訓導) 서원석(徐元石)의 아내인 양민(良民) 잉질낭(芿叱娘)을 환곡(換穀)의 책임으로 잡아들였다가 용모에 반하여,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남몰래 간통하고 그 일을 덮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조재호 경상감사는 원석(元石) 부부와 연루된 개개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와 친히 조사하고 심문하니 이우평이 겁을 주어 잉질낭을 간통한 사정이 평문(平問)에도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유부녀를 겁주어 간통한 일은 자체로 처벌의 법률이 있어 사람에 있어서도 용서받기 어렵거늘 흥해군수 이우평은 자신이 관직의 우두머리에 있으면서 고을 백성의 아내를 위협하여 간통하였으니, 그 한 짓을 논함에 참으로 추하고도 부도덕하기에, 이같이 간악하고 음탕하며 불법을 저지른 사람에게 결코 잠시도 군수의 직책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조재호 감사는 흥해군수 이우평을 직권으로 파직시키고 그에 대한 연유를 임금께 장계로 올린다. 또한 가을이라 사무가 바쁘니 후임자를 선출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구운학은 병으로 죽고 김태건은 사형으로 최종 판결이 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10-12 ~
1751년 10월 12일, 변사체로 발견된 도기찰 김한평과 사후 김동학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김한평은 칼에 맞아 죽고 김동학은 맞아서 죽은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안음현감이 고현면 기찰 김태건과 북리면 기찰 구운학을 다시 추궁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운학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사건관련자들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안음현감은 김한평과 김동학의 시신 초검의 결과를 정리하여 시장(屍帳)을 첨부하여 복검관(覆檢官)은 인근에 있는 함양(咸陽) 부사(府使)를 청한다고 하는 첩정을 올렸다. 이후 복검관 함양부사 김주익(金柱翼)은 안음현감의 공문(公文)에 의거하여 복검의 결과가 초검과 같음을 알리면서 김태건과 구운학의 변고는 금전을 약탈하는 일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고 달리 원수(怨讐)로 인할 것이 없으니 분명히 인정(人情)과 사리(事理)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들의 전후 진술 중에 또한 앞장서 모의하고 먼저 범행한 일을 서로 미루기를 반복하니 엄히 조사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뒤따라 초검관 안음현감 심전(沈錤)의 첩정이 올라왔는데, 죄인 구운학이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끝까지 죄가 없음을 주장하던 구운학은 병으로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김태건으로 극형인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