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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8) ]

마을 재부(財富)의 출입을 통제하는,
수구(水口)

임세권


재부의 상징, 물


후이저우 지역에서 마을에 들어가려면 대부분 조그만 하천을 건너게 된다. 또는 하천을 옆에 끼고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하천에 흐르는 물은 들어가는 사람과 반대로 마을 안에서 흘러나온다. 즉 사람은 마을로 들어가고 물은 마을을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는 대부분의 마을이 산에 의지해서 자리 잡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물길을 마을 안으로 돌려 마을에 인공수로를 만든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마을에는 물이 들어오는 지점과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이 있다. 이처럼 마을 입구에 물이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곳을 수구(水口)라고 부른다.

앞에 말한 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은 대체로 마을로 들어가는 마을의 입구에 해당한다. 전 세계 어디서나 물은 생명의 상징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인들은 실용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인지 물을 재물 또는 재부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이는 물론 풍수적 의미이다. 따라서 마을 밖을 돌아가는 하천을 인위적으로 마을로 끌어들이는 것은 마을 밖의 재부를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끌어들인 재부가 물길을 따라 그대로 마을 밖으로 흘러나간다면 일부러 물길을 마을 안으로 낸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마을 안을 통과한 물길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곳에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다리를 만든다. 물론 다리에 실제로 문을 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 입구의 물길을 가로막아 놓인 다리는 마을 안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의미가 있다. 후이저우 사람들은 옛날부터 수구에 재물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매년 수구재신(水口財神)에 제사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 수구에는 단순히 물이 나가는 문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후이저우 사람들의 풍수적 관념과 경제적 관념이 복합적으로 담겨있다고 하겠다.


청칸 마을의 수구, 융흥교(隆興橋)는 마을의 입구이며 마을의 물이 흘러나오는 출구 곧 수구이다.


우위엔현 홍관 마을의 수구, 통진교(通津橋)


마을의 기를 보호해주는 수구


후이저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구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산과 물과 나무가 그것이다. 산은 마을 뒤에서 마을의 배경으로 서있는데 그곳에서 물이 마을 안으로 흘러든다. 물이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곳은 바로 수구로서 마을에 들어오는 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큰 고목들이 몇 그루 또는 숲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마을에 가까이 접근하면 멀리 큰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밑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 물길을 거슬러 하천 옆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산 물 나무가 어울려 하나의 수구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수구가 단순한 마을 하천의 출구가 아니라 수구를 구성하고 있는 환경이 마을과 어울려 소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무는 나무 한 그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큰 숲을 이루는 경우도 많다. 이 숲을 수구림(水口林)이라고 한다. 수구림은 마을에 모여든 왕성한 기운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보호벽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수구는 물 즉 재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며 수구림은 마을을 왕성하게 발전하게 하는 기(氣)가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구림에는 은행나무, 종가시나무(櫧樹), 소나무, 느릅나무(楡樹), 녹나무(樟樹) 등이 많은데 녹나무 종류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녹나무 숲은 후이저우 옛 마을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멀리서 보이는 녹나무들은 그 마을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녔는지 짐작하게 한다.


황산시 치먼현 주커우 마을, 마을 뒤로 울창한 마을 숲이 보인다.
이는 수구의 반대쪽에 있지만 수구림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인위적으로 물길을 마을 안으로 돌아가게 만든 황산시 셔현 창시(昌溪)마을의 마을 숲


우위엔현 샤오치 마을 입구의 수구림


천인합일의 완성, 수구문화


수구는 흔히 원림(園林)이라는 말과 함께 수구원림(水口園林)으로 일컬어지고 있음은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림이란 자연환경을 다양한 건축적 요소 또는 정원적 요소들과 어우러지도록 배치된 자연과 인문이 조화된 인위적 공간이다. 인공적인 건축 또는 정원과 같은 요소들은 마을 사람들이 오랜 기간 이어받아 온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며 따라서 그 지역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하나로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수구가 원림과 합쳐짐으로써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통문화적 요소들이 더해져서 아름다운 인문 경관으로 태어난 것임을 말한다.

따라서 마을 입구의 역할을 하는 수구를 지나 물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거대한 고목들과 누각형 정자, 패방, 연못 등이 배치되며 또 탑이 세워지는 경우도 있다. 후이저우의 마을을 다니다 보면 마을 입구에 사찰과 관계없는 탑들이 산 위 또는 산밑 평지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풍수적 의미에서 세워진 수구탑(水口塔)으로 풍수적으로 마을의 빈 곳을 채우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또 마을 안으로 들어가도 아름다운 숲과 정자가 세워진 랑교(廊橋), 하천 중간 중간에 설치된 보로 인하여 작은 호수처럼 고여 있는 하천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을 안에는 마을로 들어온 물을 가두어 호수를 만드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또 마을 밖으로 나가기 전에도 호수를 만들어 물을 마을 안에 머물게 한다.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월소(月沼)와 남호(南湖)는 대표적인 예이며 청칸(呈坎) 마을이나 시디(西遞) 마을, 롱추안(龍川) 마을 등에서 볼 수 있는 호수들은 다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마을 안 호수, 월소(月沼)


우위엔현 져위엔향의 수구탑, 용천탑(龍天塔)


마을 입구의 수구로부터 마을 안쪽에 설치된 다리 및 여러 가지 환경조성물들은 모두 합쳐서 수구문화를 이룬다. 곧 수구는 그냥 마을 입구의 물이 흘러나가는 지점을 가리키는 단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수구문화는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미학적 감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 후이저우 지역의 주택은 높은 벽과 좁은 내부 공간으로 인해 생활을 폐쇄적으로 만들어주는데 마을 속에 조성된 수구문화의 여러 요소들은 이러한 후이저우 사람들의 답답한 생활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후이저우 지역에 이 지역 독특한 조경문화(造景文化)가 발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수구문화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다.


수구문화의 완성체, 탕모(唐模) 마을


수구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마을로 황산시 셔현(歙縣)의 탕모(唐模) 마을을 들 수 있다. 마을 동쪽에 있는 탕모 마을의 수구원림은 마을 입구의 수구림과 물가 돌다리 옆의 거대한 고목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물길을 거슬러 마을을 향해 발길을 옮기면 청대 강희년간(1662-1722)에 건축된 사제정(沙堤亭)이 나온다. 이 정자는 삼층으로 되어 있고 이층에는 회랑이 있어 올라가 한숨을 돌리면 멀리 물길을 따라 이어진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의 사백여 년 묵은 고목은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인지 암시해준다. 정자를 지나면 동포한림방(同胞翰林坊)이라는 패방이 있다. 이 패방은 청 강희년간에 이 마을 쉬씨(許氏) 형제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에 나간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 마을의 학문적 전통을 말해준다.

탕모 마을 수구원림을 빛내주는 것은 마을로 가는 중간에 있는 단간원(檀干園)이라는 큰 규모의 정원이다. 단간원은 마을에 상인 쉬씨가 돈을 많이 번 후 늙은 어머니를 위해 항저우(杭州)의 서호(西湖)를 본떠서 만든 정원이라고 한다. 정원에는 큰 호수와 여러 개의 정자, 돌다리 등을 놓아 아름답게 꾸몄다. 단간원은 하나의 독립된 정원으로서도 훌륭하지만, 수구와 하천, 천변의 수구림과 고목들 그리고 정자와 패방들과 한데 어울려 종합적인 수구문화를 완성하였다는 데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


황산시 셔현 탕모 마을의 수구와 고목


탕모 마을 길목의 사제정(沙堤亭)


탕모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동포한림(同胞翰林) 패방


쉬씨가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는 정원, 단간원(檀干園)


마을로 들어서면 고양교(高陽橋)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다. 명대에 건립된 이 다리는 두 개의 큰 무지개 모양의 교각이 있고 그 위에 다섯 칸의 정자형 건물이 세워진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한 돌다리다. 고양교는 마을 한복판에 위치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한다. 탕모에는 마을 입구의 수구를 지나면서 고양교를 포함하여 모두 열 개의 다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리가 있는 곳에는 보가 설치되어 흐르는 물을 일단 고이도록 한다. 이는 빨래를 한다든가 또는 여러 가지 용수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마을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마을의 재부를 한꺼번에 마을 입구의 수구에서 막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중간에서 부분적으로 차단하는 장치를 둔 것이다.

마을 중심의 고양교를 지나면 하천의 폭이 넓어지고 고양교에서 일단 차단된 물이 호수처럼 길게 고여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고요한 수면에는 하천 양쪽에 있는 후이저우 특이한 건축들이 그대로 비쳐서 아름다운 반영의 풍경을 만든다. 하천 한쪽의 길에는 긴 회랑을 만들어 지붕을 씌었는데 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물가 쪽으로는 미인고(美人靠)라는 긴 의자를 설치하여 마을 사람들이나 길 가던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마을 입구에서 들어와 다시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는 이 길은 이 지역의 역도(驛道)로서 사람들의 통행이 작았으며 따라서 천변에는 민가 건물 뿐 아니라 가게나 사당 등 다양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살펴본 것처럼 탕모 마을은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고 하천을 따라 도로가 연결되었다. 또 도로에는 무려 열 개나 되는 다리는 물론 도로 주변으로 정자 패방 단간원 같은 대형 정원과 사당 등이 배치되어 아름다운 수향(水鄕)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마을의 구성요소들은 후이저우의 수구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수구문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탕모 마을 중심에 있는 고양교(高陽橋)


탕모 마을에는 모두 열 개의 다리가 있다.
이들 다리는 모두 재부의 상징인 물을 일시적으로 머물게 하는 기능을 한다.


탕모 마을의 마을 안 수변풍경, 오른쪽으로 미인고가 설치된 수가(水街)가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간신배들의 뼈를 서늘하게 한 윤선도의 상소”

김령, 계암일록,
1617-01-09 ~ 1617-01-16
1617년 1월 9일,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이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이 과거시험에서 사사로운 농간을 부려 오로지 자기 당(堂) 사람만을 뽑았다고 하자, 이이첨과 그 일당들은 일제히 변명하였고, 오히려 상소한 원이곤만 형신(刑訊)을 당하였다.
정국이 이러하자 당시 서른 살이었던 진사 윤선도(尹善道)가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이이첨의 무리 때문에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이첨이 권력을 쥐고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도 임금께 아뢰어 조정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이 소가 올라가자 이이첨의 무리들은 크게 놀랐다. 승정원과 양사(兩司) 뿐 아니라 성균관 사학(四學)의 무리들도 윤선도를 죄주어야 한다고 청하며 이이첨을 칭찬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이이첨을 필두로 한 대북파의 위세와 권력의 융성함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공론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윤선도의 말은 하늘과 땅의 사람과 귀신이 모두 알만한 바로써, 가깝고 먼 곳에서 이 말을 듣고 통쾌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강직한 기상은 틀림없이 간신배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을 것이다.
주상이 윤선도의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명하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병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고,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언로(言路)보다 더 큰일은 없으니 감히 가볍게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기자헌이라는 자는 음침하고 간휼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이이첨이 과거시험문제를 미리 유출하는 부정행위를 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밝혔는데, 이 때 기자헌은 이이첨과 같이 일을 꾸며 아들을 장원급제시킨 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일을 논하라 하니, 그 부끄러움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가 수의(收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윤선도의 상소에 힘입어, 이이첨의 권력 독점과 국정 농단을 논박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대북파에서도 역시 다투어 상소하여 윤선도를 죄주기를 청하였다. 결국 윤선도는 아주 먼 변방에 안치되었고, 이이첨의 잘못을 고한 자들은 차례로 보복을 당하였다.

“파직되고, 파직을 청하다 - 당파 간의 진흙탕 싸움”

김령, 계암일록,
1614-05-23 ~ 1614-05-26
광해군의 즉위 전, 선조가 나이가 찬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로 세우려 할 때,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대북파의 우두머리가 된 이이첨이 류영경(柳永慶)을 탄핵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도왔다. 이때부터 벌어진 당파 간의 진흙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신하들이 서로 헐뜯고, 죄를 지우고, 변명을 하는 통에, 조정은 진흙탕과 같았다.
1614년 5월 23일, 사헌부 정언 류효립(柳孝立)은 계사를 올려 부응교 한찬남(韓纘男)의 죄를 물었다.
“부응교 한찬남은 거칠고 비루한 자입니다. 훈련도감의 도청(都廳)이 되어서는 제멋대로 일을 결정하여 장인바치들을 부리고, 또 그들을 여기저기 아는 곳에 보내어 온갖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를 주상께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간 이정원(李挺元)이 이를 적극적으로 막아 나섰습니다. 사사로운 무리를 비호하고, 공론을 무시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보잘 것 없어서 생긴 일이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한편 이정원은 “류효립은 자신의 발언을 공론이라고 하는데, 신은 의아할 따름입니다. 더 이상의 변론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전에 이미 그의 아우 충립에게도 배척을 당하였고, 오늘 또 류효립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라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당파 간의 대립,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다 - 계속되는 탄핵 상소”

권문해, 초간일기, 1581-03-12 ~
1581년 3월 12일, 권문해는 조보(朝報)를 펼쳤다. 이조좌랑 이경중(李敬中)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는 소식이 눈에 띄었다.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이 단독으로 왕에게 다음과 같은 계를 올렸다.
"이경중은 본디 학식이 없는 데다 행실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무리들은 으레 남의 앞을 막아 가리고, 경망하고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급진적인 그 무리들은 흔히 파당을 맺어 기세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주위에서 분하고 억울해하며, 정의의 이름으로 용납하지 못할 바입니다. 결단코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여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이전에는 우경선(禹景善)이 수원부사로 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했는데, 이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자 인심이 불안하고 두려워 선비들의 기상이 꺾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정인홍의 소행으로 벌어진 사태이다.

“임금의 옷을 두고 심각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다”

권방, 천휘록, 시기미상
1789년, 정조의 기유년(1789) 가을 천원(遷園)시에 생원 유헌주(兪憲柱)가 의논을 내서 말하기를 “이번 천원시의 복제(服制)가 지나치게 과중하여 상소를 하여 대궐에 호소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약재(藥齋)에서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중대한 일은 경솔하게 변통할 수가 없으니 집강(執綱: 태학의 임직의 하나)에게 전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재임(齋任)에게 알리러 즉시 반촌(泮村)에 들어갔다.
장의(掌議) 한계중(韓啓重)이 의논을 제기하기를 “생원 유헌주가 이번 복제의 일로 해서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이에 앞서 예당(禮堂)이 이미 경연에서 품의하여 다시 정하였으니, 유생들의 반론 제기는 그 연유를 상세히 듣지 못한 까닭인 듯하다. 국가복제의 사리와 체면은 각별히 소중하니,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말했다 하여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반론을 낸 생원 유헌주에게는 벌을 주어 경계함이 마땅하므로 우선 출재(黜齋)를 시켜야한다.”고 하였다. 재회(齋會)시에 의논하기를 “생원 유헌주는 출재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이미 망녕되게 이 의논을 내었으니 마땅히 바르게 경계를 하여야 한다.”라는 죄목으로 영구 삭제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서일방(西一房) 공사(公事)시에 장의 이회보(李晦保)가 발론하기를 “지난번 유헌주가 제기한 의논은 정정당당하니 처벌해서는 않되며 전 재임(齋任) 한계중이 임의로 처벌한 것은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재회(齋會가 하나의 결론을 낸 뒤에 “정론을 부호하지 않고 어찌 박벌(薄罰)을 사칭하겠는가?”라는 죄목으로 한계중을 처벌하고, 헌주는 즉시 형벌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골이 깊어진 동인과 서인의 갈등”

권문해, 초간일기,
1583-03-19 ~ 1583-04-12
1583년 3월 19일, 병조판서 이이(李珥)과 예조참판 정철(鄭澈), 점치 남언경(南彦經)이 남언기(南彦紀)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뜻과 유학적 사상을 함께하는 이들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권문해와는 그 뜻을 달리하는 서인(西人)쪽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함께 보기를 청하였다. 다소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뜻이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눌 줄 알았던 권문해는 초대 자리에 응하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권문해는 먼저 일어나 돌아왔다. 이이와 남언경, 남언기는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이이와 정철, 남언경을 비롯하여 세종의 현손 경안부령 이요(李瑤)도 함께 한 자리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요(李瑤)가 임금과 독대하며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등 이황(李滉)의 문인 및 제자 10여명의 동인(東人)을 헐뜯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권문해를 비롯하여 동인(東人)쪽 사람들은 병조판서 이이(李珥)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여겼다. 동인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4월 12일, 이요(李瑤)가 임금 앞에서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 이발(李潑), 김효원(金孝元) 등을 헐뜯고, 이이(李珥)도 상소하여 동인을 헐뜯었던 사실이 밝혀지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고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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