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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9) ]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는
후이저우 차(茶)

임세권


물과 차는 같은 말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물은 대개 차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물 한 잔 마시자고 하는 말은 차 한 잔 마시자는 말과 같다. 그만큼 중국 사람들의 생활은 차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의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차를 담은 물병이다. 중국은 어떤 기관이나 상점이나 심지어는 기차를 타도 항상 뜨거운 물이 제공된다. 뜨거운 물이 없으면 차를 타서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차는 간단히 말하면 차나무 잎을 이용해서 만든 음료의 일종이다. 중국인들이 물을 그냥 마시지 않고 항상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중국의 수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는 대체로 발효의 방법과 정도를 기준으로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전혀 발효를 시키지 않은 차를 불발효차라 하는데 이는 발효를 막기 위해 찻잎을 증기로 찌거나 솥에서 덖어서 발효를 방지시킨다. 이렇게 하면 차가 본래 가지고 있던 녹색과 향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녹차라 한다. 유명한 것으로는 항저우에서 나는 롱징차(龍井茶)나 황산의 황산마오펑(黃山毛峰) 등이 있다. 이와 달리 찻잎을 50퍼센트 정도 발효시킨 반발효차가 있다. 푸지엔성과 타이완에서 즐겨 마시는 우롱차(烏龍茶)가 대표적이다. 발효차는 찻잎을 85퍼센트 이상 발효시킨 차로서 떫은맛이 나고 색은 붉은빛을 띤다. 홍차가 대표적이며 후이저우의 치먼홍차가 가장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후발효차라는 것이 있다. 이는 녹차처럼 효소를 파괴한 후 찻잎을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어 미생물이 번식하도록 하여 마지막에 발효작용이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황차(黃茶), 흑자(黑茶) 등이 있는데 윈난 지역에서 생산되는 푸얼차(普洱茶)는 흑차의 일종으로 후발효차를 대표한다.


후이저우의 봄은 노란 유채꽃과 함께 차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중국인들은 남에게 주는 선물로 자기 지역의 좋은 차를 첫째로 고른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좋은 차가 생산된다는 것은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된다. 후이저우 지역에서는 녹차 종류로 황산마오펑(黃山毛峰),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가 알려져 있고 발효차인 홍차 종류로 치먼홍차(祁門紅茶)가 있다. 이 세 가지 차는 모두 중국인들이 말하는 8대 명차 또는 10대 명차에 들어간다고 하며 후이저우 사람들은 이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후이저우 지역 곧, 지금의 안후이성 황산시와 쟝시성 우위엔현 등을 가면 산등성이 어디나 차가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차밭의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지고 그 부작용으로 산지를 훼손하는 일이 많아 정부에서 차밭을 새로 일구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차는 후이저우 사람들에게 생계의 수단으로 첫째가는 산업이다. 그들에게 차 농사는 수백 년 전부터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며 지금도 가장 많은 수입을 보장해주는 주력 산업이기도 하다.


도교본산 치윈산과 야생차


이처럼 후이저우 지역에서 좋은 차가 많이 생산되는 것은 후이저우의 자연환경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역을 다녀 봐도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을 보기 어렵다. 황허(黃河)나 창쟝(長江)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하천들도 대부분 붉은 흙탕물이 흘러간다. 그런데 후이저우 지역에서는 흙탕물을 볼 수 없다. 후이저우의 대표적인 강인 신안강(新安江)은 물론 황산시나 우위엔현의 어느 지역을 가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볼 수 있고 수질도 좋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좋은 차를 만드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영산수수(靈山秀水)' 즉 신령스러운 산과 빼어난 물이 바로 명차를 만들어낸 첫째가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환경이 좋은 탓에 후이저우 지역에는 지금도 야생차가 많이 분포되고 있다. 후이저우의 야생차 중에는 아주 독특한 종류도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윈산(齊雲山)에서 나는 야생차다. 슈닝현(休寧縣)의 치윈산 일대의 야산에는 잎이 넓고 낙엽이 지는 관목으로 나무의 높이가 2~4미터로 차나무로서는 큰 편이며, 잎은 거칠고 잎 면은 짙은 초록이고 잎의 뒷면은 흰빛이 나는 녹색인데 차 같기도 하고 차 아닌 것 같기도 한 매우 독특한 차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차 나무는 치윈산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치윈산은 중국의 4대 도교 성지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 산에는 도교 사원에 향(香)을 바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땀을 흘리고 산을 오르다가 옷을 벗고 쉬게 되는데 이때 시원한 바람에 감기가 들기 쉽다. 이에 도교 사원의 도사(道士)가 치윈산의 야생차로 향풍차(香風茶)라는 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공했는데 이를 마시면 감기도 안 들고 피로도 쉽게 가셨다고 전한다. 향풍차는 역사기록에 나오지는 않지만 감기, 기관지염, 혈압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은 후이저우의 좋은 차를 생산한 기반이다. 도교 성지 치윈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신안강


치윈산의 차꽃


당나라 때부터 이름난 후이저우 차


중국의 역사기록에 후이저우 차가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다. 당나라 루위(陸羽)가 쓴 다경(茶經)에 셔저우차(歙州茶)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의 셔저우는 바로 후이저우를 말한다. 또 당나라 사람 양화(楊華)의 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이라는 책에도 셔저우, 우저우(婺州), 치먼(祁門) 등의 차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당나라 때는 후이저우 지역이 차로 이름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때의 기문현신수창문계기(祁門縣新修閶門溪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 당시 후이저우 지역의 차 생산에 대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읍에 사는 사람 중 호적이 있는 사람은 5,400여 호인데 그들이 사는 범위도 넓은 편이다. 산이 많고 밭은 적은데 물은 맑고 땅은 비옥하다. 산에는 차를 많이 심어 남는 땅이 거의 없었다. 이 일대 천 리 안쪽으로는 차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그들은 차 농사로서 의식을 해결하고 부역도 했다. 치먼(祁門)에서 나는 어린 차의 싹(茗)은 색이 노랗고 향이 좋아서 고객들은 치먼의 차가 인근 다른 어떤 곳보다 좋다고 했다. 매년 2,3월에 다른 군(郡)에서 값비싼 은이나 견직물 등을 가지고 차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많았다.”


슈닝현의 산속에 있는 차밭과 차밭 가운데의 야생 차나무


이와같은 옛 문헌기록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후이저우의 차가 얼마나 유명했고 또 생산도 많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차는 현재의 쓰촨(四川)지역인 파촉(巴蜀)지방에서 기원한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최근 차를 마시는 문화가 시작된 것은 옛 월인(古越人)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근거는 옛 차의 생산지가 모두 월족(越族)이 살던 지역이라는 데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창쟝(長江) 중하류 또는 창쟝 이남 지역을 말하는데 후이저우도 옛 월족이 살던 지역에 속한다. 따라서 후이저우는 파촉이 등장하기 이전의 월족 지역에 속하며 이곳이 산이 많은 곳이라 이곳의 월족을 산월족이라 했고 이곳에서 생산된 차를 산월차(山越茶)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에 의해 후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차의 생산지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부터 휘주차는 생산량도 많았다. 송대 경제사의 대표적 사료인 송사 식화지(宋史殖貨志)에도 후이저우의 차가 많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으니 후이저우의 차 생산의 역사는 실로 오래며 그 명성도 또한 오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이저우의 차가 지금처럼 중국 차를 대표하게 된 것은 명 중엽 이후라고 한다. 원대 이후 명 전기까지는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차 잎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명 중엽 이후에야 차 생산이 다시 활성화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루위(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의 일부


후이저우를 대표하는 황산마오펑


후이저우의 차를 대표하는 것은 황산마오펑(黃山毛峰),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 치먼홍차(祁門紅茶) 세 가지다. 이중 황산마오펑과 타이핑허우쿠이는 불 발효차인 녹차이며 치먼홍차는 발효차에 속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황산마오펑이다. 황산마오펑은 후이저우 지역의 차를 상징하는 정도로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황산마오펑은 차의 상품 이름이다. 황산마오펑을 처음 만든 사람은 셰쩡안(谢正安)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황산마오펑을 만들고 셰위다(谢裕大)라는 차의 도매상을 만들어 운영했다. 셰위다는 후이저우의 차 판매상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다.

셰쩡안은 셔현(歙县)의 차오시(漕溪) 출신이다. 차오시는 현재의 후이저우구(徽州区) 푸시향(富溪乡)에 속한다. 1875년 그는 신선한 어린 찻잎을 정선하여 수집해서 전통적 제작기술을 기초로 하고 차를 만드는 공정을 현대화시켜 독특하고 새로운 차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찻잎은 흰 털이 덮이고 뾰족한 산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인근에 있는 유명한 산인 황산의 이름을 붙여 황산마오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차밭과 유채밭이 어우러진 셰쩡안의 고향 푸시향(富溪鄕)의 농촌 풍경


그는 상하이에서 큰 차 사업장을 열고 무역을 시작하여 영국이나 러시아 등 유럽에까지 차를 판매하여 황산마오펑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샹하이에는 차오시로(漕溪路)라는 도로가 있는데 이는 바로 셰쩡안의 고향 차오시에서 따온 것이다. 황산마오펑은 청말 조정에 올리는 공품으로 선정되어 광쉬(光緖)황제가 극찬한 이후 많은 사람이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차는 영국 황실에까지 전해지게 되고 유럽에까지 명차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져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 신유당(愼裕堂)이라는 차 상점을 열고 191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신유당은 1930년대에 타오싱즈(陶行知) 황빈홍(黄賓虹) 등 유명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황산마오펑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 명차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1955년에는 중국차엽공사에 의해 중국 10대 명차에 들어가게 되었다.

셰위다는 최근 광대한 다원을 조성하고 박물관과 차를 판매하는 대형 매장을 만들어 옛 영화를 되살리고 있다.


황산시 후이저우구에 있는 셰위다차엽박물관의 내부, 중앙의 동상이 셰쩡안이다.


셰위다 차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차밭


원숭이가 선물한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


후이저우 사람들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녹차는 타이핑허우쿠이다.

후이저우의 타이핑현에서 생산되는 차로서 어린 찻잎의 끝이 뾰족한 싹을 따서 만드는 소위 첨차(尖茶)의 최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차는 맛뿐 아니라 찻잎에 들어있는 항균이나 항암 등의 요소는 물론 살이 빠지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청나라 함풍(咸豊)년간의 1859년 쩡셔우칭(鄭守慶)이라는 사람이 타이핑현 마추안(麻川) 강변의 산중 차밭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쩡셔우칭은 허우쿠이의 선조로 불리는데 그가 처음 만든 차는 이름을 타이핑첨차(太平尖茶)라고 했다. 지금 타이핑허우쿠이의 전신이다.

187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까지 타이핑현 사람들은 난징(南京), 양저우(楊州), 우한(武漢 ) 등지에 차 판매점을 개설하고 타이핑의 찻잎을 팔았는데 이들의 상업이 크게 번창하면서 타이핑의 차도 중국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이때 차 상인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타이핑현 허우깡(猴崗) 마을 출신인 왕쿠이청(王魁成)이 있었다. 그는 찻잎 생산의 경험이 풍부하고 특별히 찻잎의 가공에 뛰어났다. 그는 해발 750미터는 높은 산지에서 차를 재배하고 하나의 싹에서 두 잎이 나는 찻잎을 골라 차를 가공하고 규격화했다. 이렇게 생산된 차는 품질면에서 최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왕라오얼쿠이지앤(王老二魁尖) 또는 왕라오얼(王老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가 차를 생산한 곳이 타이핑현 허우캉(猴坑)과 허우깡(猴崗) 일대였기 때문에 차의 명칭을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차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황산에 바이마오허우(白毛猴)라는 원숭이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작은 털 원숭이 새끼를 낳았다. 어느 날 새끼 혼자 밖에 나가 놀다가 타이핑현(太平縣)까지 이르렀는데 짙은 안개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다. 어린 새끼 원숭이는 황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엄마 원숭이는 바로 나가 새끼를 찾았지만 멀리 간 새끼를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나선 며칠 뒤 새끼를 찾으려는 마음에 먹지도 못하고 여기 저기 헤매다가 타이핑현의 한 산마을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산마을에 한 노인이 야생차와 약재를 채취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음이 매우 착했다.


황산에 사는 야생 원숭이


그는 산중에서 죽은 원숭이를 보고 산 언덕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몇 개의 야생차와 꽃나무를 원숭이 묘 옆에 심었다. 그가 묘를 완성하고 산에서 내려가려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 당신이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했으니 나도 반드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소.”

그러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냥 산에서 내려오고 이 일을 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음 해 봄, 노인이 다시 산으로 야생차를 채취하러 갔는데 산 언덕 전체에 푸르고 싱싱한 차 나무가 가득하게 자라고 있었다. 노인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노인에게 말을 했다.

“이 차나무들은 노인을 위해 내가 주는 것이요. 당신이 잘 키워서 이후 걱정 없이 먹고 살도록 하시오.”

이 때 노인이 비로소 이 차나무들이 자기가 무덤을 만들어준 원숭이가 준 것임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노인은 아주 훌륭한 야생차가 가득히 자라는 산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다시는 차를 채취하기 위해 산을 넘나들지 않아도 되었다. 또 자기를 도와준 원숭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산 언덕을 원숭이 언덕(猴崗)이라고 이름 짓고 자기가 사는 산마을을 허우캉(猴坑)이라고 불렀다. 이후 사람들은 허우깡에서 채취하여 만든 찻잎을 허우차(猴茶)라고 불렀다. 허우차의 품질은 다른 차에 비해 매우 좋았다. 모든 차의 우두머리라고 할 만했으므로 뒤에 이 차를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명절 무렵 청칸 마을의 차밭에서 농부가 찻잎을 따고 있다.


세계 홍차의 으뜸, 치먼홍차(祁門紅茶)


후이저우의 명차 중에서 특이한 것의 하나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후이저우의 홍차를 흔히 치먼홍차(祁門紅茶)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홍차의 원산지가 현재의 황산시 치먼현(祁門縣)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치먼홍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청말 광서 원년인 1875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홍차는 이미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제조되고 있던 발효차의 일종이었다. 1875년 치먼 사람 후위엔룽(胡元龍)이라는 사람이 다른 지방의 홍차 제조법을 참고하여 치먼에서 홍차를 가공하였는데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홍차를 판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875년 이전에 치먼현에서는 홍차는 만들지 않고 녹차만 생산하였다. 그런데 치먼현에 이웃한 이현(黟縣)에 위간천(余干臣,1850~192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후위엔룽이 홍차를 만들기 시작한 1875년 푸지엔(福建)에서 관직을 지내고 있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상업을 시작하였다. 그 이웃한 치먼현에서 홍차가 만들어지고 그 홍차가 시장에서도 잘 팔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홍차가 이윤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 가까운 즈더현(至德縣) 야오두지에(堯渡街)에 홍차 상점을 열었다. 그는 처음 그가 관직을 지냈던 푸지엔 지역의 홍차, 소위 민홍차(閩紅茶)를 모방하여 홍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치먼홍차를 완성한 위간천의 초상


푸지엔의 우이산(武夷山)은 중국에서 홍차가 처음 나타난 곳이다. 오늘날 치먼을 홍차의 원산지라 하지만 실제 홍차의 고향은 푸지엔 우이산인 셈이다. 우이산 홍차가 만들어진 시기는 명나라 때로 그때 홍차를 ‘정산소종(正山小種)’이라 했다. 이 정산소종이 1610년 유럽으로 들어가고 영국황실의 결혼 때 혼수품으로 들어간 후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퍼졌다고 하니 오늘날 영국의 홍차는 중국에서 건너간 것이다. 위간천이 관직 생활을 했던 푸지엔은 홍차의 처음 생산지였으니 위간천이 후이저우로 돌아와 푸지엔의 홍차를 모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1876년 위간천은 치먼의 시루진(西路鎭)에 홍차 판매의 분점을 열고 경영을 확대했고 국제 홍차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큰 주목을 끌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 영국 상인들이 좋아하였으며 영국 상인들은 이 차를 ’치먼‘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치먼 홍차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 처음 건너간 것은 푸지엔 홍차였으나 영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명품 차를 대하기 시작한 것은 위간천의 치먼 홍차였다. 이후 치먼은 세계 홍차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잔치 마을의 농민이 차를 건조하고 있다. 후이저우의 농가에서는 차를 건조하고 덖는 작업을 흔히 볼 수 있다.


치먼의 홍차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치먼이 차나무가 자라는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먼 지역은 높은 산이 많고 숲이 발달했으며 기온이 따뜻하고 습도도 높다. 또 토양도 기름지고 비도 많이 오는 편이며 운무가 많이 끼는데 이러한 기후 조건은 차나무가 성장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환경이 좋은 치먼 서쪽의 리커우(歷口)와 주커우(渚口)는 지금도 홍차를 만드는 차 잎 생산의 중심지다. 치먼의 홍차가 색, 향기, 맛, 형태에서 최 상등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치먼의 홍차는 후윈룽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나 치먼 홍차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위간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이저우가 명차의 고향이라 함은 헛된 말이 아니다. 후이저우 즉 오늘날의 안후이성 황산시와 쟝시성 우위엔 지역을 다녀보면 조그만 산비탈에도 빈틈없이 심어진 차와 그 사이에 높이 자라고 있는 야생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청명이나 곡우 부근에 후이저우의 마을을 찾으면 마을 입구에 차잎 수매 상인들이 대기하고 있으면서 마을 주민으로부터 찻잎을 수매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있다. 이 찻잎들이 황산마오펑으로, 타이핑허우쿠이로, 치먼 홍차로 만들어져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 후이저우가 명차의 고향이라는 것이 과연 명불허전임을 실감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딴 찻잎을 수집하여 차 제조공장에 판매하는 장사꾼들이 마을 입구에서 수매하고 있다.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의병대장 서상렬의 인품을 논하다”

서상렬 초상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96-02 ~
1896년 2월, 예천에서는 태봉 전투에서 무너진 의병조직을 다시 재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 중심에는 대장으로 추대된 서상렬이 있었다. 그는 충주의 유인석을 도와 의병조직에 투신하였는데, 이후 경상도 지역으로 와서 의병군의 연합에 큰 역할을 하였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을 끌고 충주의 유인석과 부대를 합쳐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이 서상렬이란 사람은 기개가 매우 높고 또 사리분별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또 재주가 비상하여 부대를 조직하고 이끄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이리하여 그가 머물고 있는 동안 의병대에는 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의 인품에도 하자가 없지만은 않았다. 엊그제 서상렬이 부포를 떠날 때에 남진사의 막내 동생을 불러 말 머리에 세워 놓고는 군수전 5백냥을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흡족하지 않았는지 죄를 물어 남진사를 잡아들였다고 한다. 남진사는 며칠씩이나 서상렬에게 대접한 사람인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문죄까지 하려고 하다니 사람의 성품에 두려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또 어제는 신은 마을에 당도하여서 그 마을의 장영덕을 잡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관리를 지낸 이들을 잘 죽이고 군수금을 강제로 거두는 습관이 있으니, 좋은 장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자란 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의에 죽겠다는 각오는 실로 비장한 것이었다. 또 의병들을 이끌고 하는 행실을 보아도 다소 지나친 점이 있다 한들, 그가 비친 각오에 어긋나는 행동은 없는 듯하였다. 이와 같은 난세에 하나부터 열까지, 인품부터 재주까지 모두 갖춘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정구의 인품에 반하다”

[정구 편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장흥효, 경당일기,
1617-09-16 ~ 1617-10-02
1617년 9월 16일, 장흥효는 안동 사람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이황의 유명한 제자로는 김성일, 류성룡, 정구 등이 있었다. 하지만 장흥효가 살았을 당시에는 김성일과 류성룡은 이미 사망하였고 살아 있던 것은 정구뿐이었다. 김성일과 류성룡이 꿈에 나타나 장흥효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면 유일하게 정구는 실제로 학문적 교류가 가능했던 인물이었다.
마침 김성일의 행장을 청하기 위해 정구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편지로만 서로 주고받다가 실제 만나게 되니 장흥효에게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학문적 성과도 성과이지만 실제 대 성리학자의 인품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정구의 행동거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장흥효의 눈에 들어왔다.
하루는 정구 선생이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편안하게 기거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대접하는 정성이 이와 같다면 평소의 행동거지도 알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특히 선생의 그러한 정성으로 사람들이 당연히 모두 그를 공경하고 복종하기 때문에 후에 선생의 견여(肩輿)를 들더라도 아무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선생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니 선생이 하는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장흥효는 선생의 일처리가 두루 넓고도 정밀하여 비록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물건의 작은 것, 심지어 한자의 한 획 정도의 미세한 일이라도 반드시 정돈하고 가지런히 하여 구차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칭송했다. 그에게 있어 성리학에서 바라보는 선생이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하나의 기대 같은 것이었다.

“이성구의 사람됨을 논하다”

[명가필보]에 수록된 이성구 필적
김령, 계암일록, 1631-10-07 ~
1631년 10월 7일, 안동에 황호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령은 6년 전 조정의 사건을 떠올리다가 생각이 이성구에 미쳤다. 그 때 22세 황호가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바로 이성구를 비롯한 대신들의 공격에 당돌한 상소로 반박한 사건이었다. 당시 주서였던 황호에 비해 이성구는 대사간이었으니 관직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시 생각해도 황호란 젊은이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성구란 사람의 아버지는 바로 그 유명한 이수광이었다. 이수광은 글에 능할 뿐 아니라 인품이 고결하여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 이성구의 동생인 이민구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성구 본인은 지난 광해군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비를 폐하자는 여론에 당당히 맞서 사람들이 모두 인재로 꼽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본래 이들 이수광 3부자는 남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주상이 반정을 일으키자 모두 변심하여 서인이 되었고, 곧 조정의 고위직에 올랐다. 서인으로 변심한 이후 남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인성군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또 인성군을 비호한 목성선, 류석 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4년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인성군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이성구는 심문하기를 매우 혹독하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백석정에 올라 죽은 벗이 그리워 통곡하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04-05 ~ 1582-05-13
1582년 4월 초, 권문해는 오랜 친구 강명원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명원의 형 강숙망이 죽은 지 한 달 만이다. 권문해는 친구 강명원의 죽음에 형제가 동시에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일만큼 참혹하고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더욱이 강명원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년전... 1년 만에 망자로 벗을 대하려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권문해는 강명원의 사망 소식을 듣고 4월 5일 명원의 집이 있는 문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권문해가 먼저 간 곳은 백석정(白石亭)이다. 백석정은 강명원이 지은 정자로 일찍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이곳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던 곳이다. 권문해는 이곳에서 목 놓아 통곡하며 슬픔을 토해냈다. 이어 명원의 형 숙망이 잠든 오룡동(五龍洞)에 가서 곡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뒤 백석정에는 명원의 빈차(嬪次)가 마련되었고, 친구가 저승에 잘 갈 수 있도록 제를 올리기 위해 1582년 5월 13일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권문해는 먼저 떠나는 친구 강명원과 그동안 함께 보낸 시간을 되새기며 덧없이 흘러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며 만시(輓詩)를 쓴다. 만시에는 강명원의 뛰어난 재능이 크게 펼쳐지지 못하고 일찍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냄을 안타까워한다. ‘어릴 적부터 글 쓰고 짓는 것을 좋아해 일찍이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과거에 급제하고, 곳곳의 마을을 다스리며 백성의 편안을 살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곧 세상을 등지고 백석정에 숨어 외로이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다. 세상살이에 눈 감고 귀를 닫으며 물결을 따르는 갈매기만이 그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재능이 곧 임금의 부름을 받을 것인데 술과 여색이 그를 세상과 이별시켰다.’고 적으며 ‘홀로 백석정에서 강을 내려다보자니 더욱 그립다.’며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죽은 아내를 기리는 만사를 짓다”

권문해, 초간일기, 1582-10-20 ~
1582년 10월 20일,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아내를 묘소에 안치시키는 일을 마쳤다. 상여꾼이 부족하여 우여곡절 끝에 용궁에 있는 집안 묘소에 어렵사리 안장시킬 수 있었다. 권문해는 상여가 떠나기 전, 아내를 위한 만사를 지었다. 지난 30여 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함께 했던 시간들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 간간히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배어나오기도 하였다. 한평생을 권문해와 더불어 권씨 집안의 사람으로 묵묵히 살다간 아내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도 밀려들었다. 이내 마음을 고쳐잡고 촛불에 의지하여 붓을 들었다. 권문해가 지었던 어느 만사보다 오늘의 만사는 길고 애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정해져 부부가 나왔는데, 인륜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차례로는 첫 번째라네. 생명의 시작이요 복의 근원이니 사람도리의 지극함이라네. 내 나이 스물, 그대 나이 스물넷에 하늘이 그대를 베필로 정해주시니, 때는 계축년이었다네. 부드럽고 순한 용모, 곧고도 아름다운 덕으로 온 집안을 화목하게 하여 아내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네. 다투는 소리, 투기하는 말 삼십년 이래로 한 번도 귀에 들리지 않았네. 아! 나는 맏이이고 그대는 하나 뿐인 딸이라 아들 두고 딸을 두어 대를 이으리라 생각했더니, 나이는 쉰에 가까워 양쪽 귀밑머리 솜처럼 변하였는데, 한 아이도 보지 못하니, 사람일 가엾구나. 묵묵히 천도를 생각하니 낳아주는 이치가 극진하지 못하였네. 나무는 꽃과 열매가 있고 풀에는 풀뿌리와 껍질이 있으며, 물고기는 알이 배에 가득하고 메뚜기는 새끼가 아흔이나 되는데, 하늘은 어찌 그리 은혜롭지 않아서 우리에게는 유독 인색하신가. 죽은 뒤의 탄식이, 그대와 나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아! 자식 없는 자 장수한다는 것은 속언에서 늘 하는 말이고, 함께 늙자는 약속으로 장수하기를 바랐더니, 어찌하여 한 번 병들어 갑자기 죽기에 이르렀나. 나이는 50을 넘었으니 요절은 아니라지만 집에는 노모가 계시어 이미 100세가 가까웠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가벼려, 버리듯 남겨두었는가. 아침저녁 봉양과 맛난 음식 대접은 누가 드릴 거나. 돌아가신 뒤에 장사 지낼 일 누가 받들어 할까나. 생각이 이에 이르니 슬픈 눈물 샘솟 듯하네. 무심한 목석이 오래 남고, 가죽과 상수리나무가 가장 장수하네. 백성들은 저렇듯 많은데, 그대 홀로 무슨 허물을 지었나. 오호라! 아우에게 두 아들 있어 하나를 취하여 후사로 삼았네. 그대는 많이도 어루만지고 길러, 자신이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네. 이제는 글 읽을 줄도 알아 나이 이미 열둘이라. 상복을 입혀 그대의 상여를 모시게 하니 쓸쓸하다 말하지 말게, 자식이 없다 하나 자식을 두었다네. 날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며느리 보고 손자 두어, 그대 향불 받들고 후손을 남기기를 기약하네. 아! 저 용문을 보시게. 선고의 유택이라 그대 무덤으로 점지하여 그 곁으로 하였다네. 골 깊고 그윽하며 소나무 회나무 울창하여 그대는 곁에 모시면서 편안하고 편안하시게. 멀리 선산과 떨어졌다고 애달파 하지는 말게나. 삼종의 의리가 저승에 갔다고 다를손가. 상상과 양양 그리 멀지 않아 혼은 반드시 오고 가리니. 마치 물이 있어 아래위로 흘러 통하듯 하리. 그대 몸 차디찰까 염려하여 옷을 지어 보내셨네. 시어머니 손수 바느질하시면서 피눈물을 적시셨다네. 천추만세토록 그 옷 입어 싫어하지 마시게. 오호라. 사람이 죽고사는 것. 마치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것 같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길던 짧던 죽는 것은 한 가지네. 상여가 벌써 출발하였으니, 저승과 통하는 길 영영 막혔네. 한 곡조 해로곡에 길이 아파하며 말을 잊지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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