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물은 대개 차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물 한 잔 마시자고 하는 말은 차 한 잔 마시자는 말과 같다. 그만큼 중국 사람들의 생활은 차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의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차를 담은 물병이다. 중국은 어떤 기관이나 상점이나 심지어는 기차를 타도 항상 뜨거운 물이 제공된다. 뜨거운 물이 없으면 차를 타서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차는 간단히 말하면 차나무 잎을 이용해서 만든 음료의 일종이다. 중국인들이 물을 그냥 마시지 않고 항상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중국의 수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는 대체로 발효의 방법과 정도를 기준으로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전혀 발효를 시키지 않은 차를 불발효차라 하는데 이는 발효를 막기 위해 찻잎을 증기로 찌거나 솥에서 덖어서 발효를 방지시킨다. 이렇게 하면 차가 본래 가지고 있던 녹색과 향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녹차라 한다. 유명한 것으로는 항저우에서 나는 롱징차(龍井茶)나 황산의 황산마오펑(黃山毛峰) 등이 있다. 이와 달리 찻잎을 50퍼센트 정도 발효시킨 반발효차가 있다. 푸지엔성과 타이완에서 즐겨 마시는 우롱차(烏龍茶)가 대표적이다. 발효차는 찻잎을 85퍼센트 이상 발효시킨 차로서 떫은맛이 나고 색은 붉은빛을 띤다. 홍차가 대표적이며 후이저우의 치먼홍차가 가장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후발효차라는 것이 있다. 이는 녹차처럼 효소를 파괴한 후 찻잎을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어 미생물이 번식하도록 하여 마지막에 발효작용이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황차(黃茶), 흑자(黑茶) 등이 있는데 윈난 지역에서 생산되는 푸얼차(普洱茶)는 흑차의 일종으로 후발효차를 대표한다.
후이저우의 봄은 노란 유채꽃과 함께 차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중국인들은 남에게 주는 선물로 자기 지역의 좋은 차를 첫째로 고른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좋은 차가 생산된다는 것은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된다. 후이저우 지역에서는 녹차 종류로 황산마오펑(黃山毛峰),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가 알려져 있고 발효차인 홍차 종류로 치먼홍차(祁門紅茶)가 있다. 이 세 가지 차는 모두 중국인들이 말하는 8대 명차 또는 10대 명차에 들어간다고 하며 후이저우 사람들은 이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후이저우 지역 곧, 지금의 안후이성 황산시와 쟝시성 우위엔현 등을 가면 산등성이 어디나 차가 심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차밭의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지고 그 부작용으로 산지를 훼손하는 일이 많아 정부에서 차밭을 새로 일구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차는 후이저우 사람들에게 생계의 수단으로 첫째가는 산업이다. 그들에게 차 농사는 수백 년 전부터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며 지금도 가장 많은 수입을 보장해주는 주력 산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후이저우 지역에서 좋은 차가 많이 생산되는 것은 후이저우의 자연환경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역을 다녀 봐도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을 보기 어렵다. 황허(黃河)나 창쟝(長江)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하천들도 대부분 붉은 흙탕물이 흘러간다. 그런데 후이저우 지역에서는 흙탕물을 볼 수 없다. 후이저우의 대표적인 강인 신안강(新安江)은 물론 황산시나 우위엔현의 어느 지역을 가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볼 수 있고 수질도 좋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좋은 차를 만드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영산수수(靈山秀水)' 즉 신령스러운 산과 빼어난 물이 바로 명차를 만들어낸 첫째가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환경이 좋은 탓에 후이저우 지역에는 지금도 야생차가 많이 분포되고 있다. 후이저우의 야생차 중에는 아주 독특한 종류도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치윈산(齊雲山)에서 나는 야생차다. 슈닝현(休寧縣)의 치윈산 일대의 야산에는 잎이 넓고 낙엽이 지는 관목으로 나무의 높이가 2~4미터로 차나무로서는 큰 편이며, 잎은 거칠고 잎 면은 짙은 초록이고 잎의 뒷면은 흰빛이 나는 녹색인데 차 같기도 하고 차 아닌 것 같기도 한 매우 독특한 차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차 나무는 치윈산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치윈산은 중국의 4대 도교 성지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 산에는 도교 사원에 향(香)을 바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땀을 흘리고 산을 오르다가 옷을 벗고 쉬게 되는데 이때 시원한 바람에 감기가 들기 쉽다. 이에 도교 사원의 도사(道士)가 치윈산의 야생차로 향풍차(香風茶)라는 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제공했는데 이를 마시면 감기도 안 들고 피로도 쉽게 가셨다고 전한다. 향풍차는 역사기록에 나오지는 않지만 감기, 기관지염, 혈압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은 후이저우의 좋은 차를 생산한 기반이다. 도교 성지 치윈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신안강
치윈산의 차꽃
중국의 역사기록에 후이저우 차가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다. 당나라 루위(陸羽)가 쓴 다경(茶經)에 셔저우차(歙州茶)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의 셔저우는 바로 후이저우를 말한다. 또 당나라 사람 양화(楊華)의 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이라는 책에도 셔저우, 우저우(婺州), 치먼(祁門) 등의 차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당나라 때는 후이저우 지역이 차로 이름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때의 기문현신수창문계기(祁門縣新修閶門溪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어 당시 후이저우 지역의 차 생산에 대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읍에 사는 사람 중 호적이 있는 사람은 5,400여 호인데 그들이 사는 범위도 넓은 편이다. 산이 많고 밭은 적은데 물은 맑고 땅은 비옥하다. 산에는 차를 많이 심어 남는 땅이 거의 없었다. 이 일대 천 리 안쪽으로는 차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그들은 차 농사로서 의식을 해결하고 부역도 했다. 치먼(祁門)에서 나는 어린 차의 싹(茗)은 색이 노랗고 향이 좋아서 고객들은 치먼의 차가 인근 다른 어떤 곳보다 좋다고 했다. 매년 2,3월에 다른 군(郡)에서 값비싼 은이나 견직물 등을 가지고 차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많았다.”
슈닝현의 산속에 있는 차밭과 차밭 가운데의 야생 차나무
이와같은 옛 문헌기록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후이저우의 차가 얼마나 유명했고 또 생산도 많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차는 현재의 쓰촨(四川)지역인 파촉(巴蜀)지방에서 기원한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최근 차를 마시는 문화가 시작된 것은 옛 월인(古越人)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근거는 옛 차의 생산지가 모두 월족(越族)이 살던 지역이라는 데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창쟝(長江) 중하류 또는 창쟝 이남 지역을 말하는데 후이저우도 옛 월족이 살던 지역에 속한다. 따라서 후이저우는 파촉이 등장하기 이전의 월족 지역에 속하며 이곳이 산이 많은 곳이라 이곳의 월족을 산월족이라 했고 이곳에서 생산된 차를 산월차(山越茶)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에 의해 후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오랜 차의 생산지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부터 휘주차는 생산량도 많았다. 송대 경제사의 대표적 사료인 송사 식화지(宋史殖貨志)에도 후이저우의 차가 많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으니 후이저우의 차 생산의 역사는 실로 오래며 그 명성도 또한 오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이저우의 차가 지금처럼 중국 차를 대표하게 된 것은 명 중엽 이후라고 한다. 원대 이후 명 전기까지는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차 잎 생산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명 중엽 이후에야 차 생산이 다시 활성화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루위(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의 일부
후이저우의 차를 대표하는 것은 황산마오펑(黃山毛峰),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 치먼홍차(祁門紅茶) 세 가지다. 이중 황산마오펑과 타이핑허우쿠이는 불 발효차인 녹차이며 치먼홍차는 발효차에 속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황산마오펑이다. 황산마오펑은 후이저우 지역의 차를 상징하는 정도로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황산마오펑은 차의 상품 이름이다. 황산마오펑을 처음 만든 사람은 셰쩡안(谢正安)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황산마오펑을 만들고 셰위다(谢裕大)라는 차의 도매상을 만들어 운영했다. 셰위다는 후이저우의 차 판매상에서도 으뜸을 차지했다.
셰쩡안은 셔현(歙县)의 차오시(漕溪) 출신이다. 차오시는 현재의 후이저우구(徽州区) 푸시향(富溪乡)에 속한다. 1875년 그는 신선한 어린 찻잎을 정선하여 수집해서 전통적 제작기술을 기초로 하고 차를 만드는 공정을 현대화시켜 독특하고 새로운 차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찻잎은 흰 털이 덮이고 뾰족한 산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인근에 있는 유명한 산인 황산의 이름을 붙여 황산마오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차밭과 유채밭이 어우러진 셰쩡안의 고향 푸시향(富溪鄕)의 농촌 풍경
그는 상하이에서 큰 차 사업장을 열고 무역을 시작하여 영국이나 러시아 등 유럽에까지 차를 판매하여 황산마오펑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샹하이에는 차오시로(漕溪路)라는 도로가 있는데 이는 바로 셰쩡안의 고향 차오시에서 따온 것이다. 황산마오펑은 청말 조정에 올리는 공품으로 선정되어 광쉬(光緖)황제가 극찬한 이후 많은 사람이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차는 영국 황실에까지 전해지게 되고 유럽에까지 명차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져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 신유당(愼裕堂)이라는 차 상점을 열고 191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신유당은 1930년대에 타오싱즈(陶行知) 황빈홍(黄賓虹) 등 유명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황산마오펑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 명차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1955년에는 중국차엽공사에 의해 중국 10대 명차에 들어가게 되었다.
셰위다는 최근 광대한 다원을 조성하고 박물관과 차를 판매하는 대형 매장을 만들어 옛 영화를 되살리고 있다.
황산시 후이저우구에 있는 셰위다차엽박물관의 내부, 중앙의 동상이 셰쩡안이다.
셰위다 차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차밭
후이저우 사람들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녹차는 타이핑허우쿠이다.
후이저우의 타이핑현에서 생산되는 차로서 어린 찻잎의 끝이 뾰족한 싹을 따서 만드는 소위 첨차(尖茶)의 최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차는 맛뿐 아니라 찻잎에 들어있는 항균이나 항암 등의 요소는 물론 살이 빠지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청나라 함풍(咸豊)년간의 1859년 쩡셔우칭(鄭守慶)이라는 사람이 타이핑현 마추안(麻川) 강변의 산중 차밭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쩡셔우칭은 허우쿠이의 선조로 불리는데 그가 처음 만든 차는 이름을 타이핑첨차(太平尖茶)라고 했다. 지금 타이핑허우쿠이의 전신이다.
187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까지 타이핑현 사람들은 난징(南京), 양저우(楊州), 우한(武漢 ) 등지에 차 판매점을 개설하고 타이핑의 찻잎을 팔았는데 이들의 상업이 크게 번창하면서 타이핑의 차도 중국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이때 차 상인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타이핑현 허우깡(猴崗) 마을 출신인 왕쿠이청(王魁成)이 있었다. 그는 찻잎 생산의 경험이 풍부하고 특별히 찻잎의 가공에 뛰어났다. 그는 해발 750미터는 높은 산지에서 차를 재배하고 하나의 싹에서 두 잎이 나는 찻잎을 골라 차를 가공하고 규격화했다. 이렇게 생산된 차는 품질면에서 최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왕라오얼쿠이지앤(王老二魁尖) 또는 왕라오얼(王老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가 차를 생산한 곳이 타이핑현 허우캉(猴坑)과 허우깡(猴崗) 일대였기 때문에 차의 명칭을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차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황산에 바이마오허우(白毛猴)라는 원숭이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작은 털 원숭이 새끼를 낳았다. 어느 날 새끼 혼자 밖에 나가 놀다가 타이핑현(太平縣)까지 이르렀는데 짙은 안개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다. 어린 새끼 원숭이는 황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엄마 원숭이는 바로 나가 새끼를 찾았지만 멀리 간 새끼를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나선 며칠 뒤 새끼를 찾으려는 마음에 먹지도 못하고 여기 저기 헤매다가 타이핑현의 한 산마을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산마을에 한 노인이 야생차와 약재를 채취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음이 매우 착했다.
황산에 사는 야생 원숭이
그는 산중에서 죽은 원숭이를 보고 산 언덕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몇 개의 야생차와 꽃나무를 원숭이 묘 옆에 심었다. 그가 묘를 완성하고 산에서 내려가려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 당신이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했으니 나도 반드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소.”
그러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냥 산에서 내려오고 이 일을 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음 해 봄, 노인이 다시 산으로 야생차를 채취하러 갔는데 산 언덕 전체에 푸르고 싱싱한 차 나무가 가득하게 자라고 있었다. 노인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노인에게 말을 했다.
“이 차나무들은 노인을 위해 내가 주는 것이요. 당신이 잘 키워서 이후 걱정 없이 먹고 살도록 하시오.”
이 때 노인이 비로소 이 차나무들이 자기가 무덤을 만들어준 원숭이가 준 것임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노인은 아주 훌륭한 야생차가 가득히 자라는 산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다시는 차를 채취하기 위해 산을 넘나들지 않아도 되었다. 또 자기를 도와준 원숭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산 언덕을 원숭이 언덕(猴崗)이라고 이름 짓고 자기가 사는 산마을을 허우캉(猴坑)이라고 불렀다. 이후 사람들은 허우깡에서 채취하여 만든 찻잎을 허우차(猴茶)라고 불렀다. 허우차의 품질은 다른 차에 비해 매우 좋았다. 모든 차의 우두머리라고 할 만했으므로 뒤에 이 차를 타이핑허우쿠이(太平猴魁)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명절 무렵 청칸 마을의 차밭에서 농부가 찻잎을 따고 있다.
후이저우의 명차 중에서 특이한 것의 하나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홍차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후이저우의 홍차를 흔히 치먼홍차(祁門紅茶)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홍차의 원산지가 현재의 황산시 치먼현(祁門縣)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치먼홍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청말 광서 원년인 1875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홍차는 이미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제조되고 있던 발효차의 일종이었다. 1875년 치먼 사람 후위엔룽(胡元龍)이라는 사람이 다른 지방의 홍차 제조법을 참고하여 치먼에서 홍차를 가공하였는데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홍차를 판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875년 이전에 치먼현에서는 홍차는 만들지 않고 녹차만 생산하였다. 그런데 치먼현에 이웃한 이현(黟縣)에 위간천(余干臣,1850~192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후위엔룽이 홍차를 만들기 시작한 1875년 푸지엔(福建)에서 관직을 지내고 있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상업을 시작하였다. 그 이웃한 치먼현에서 홍차가 만들어지고 그 홍차가 시장에서도 잘 팔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홍차가 이윤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고 가까운 즈더현(至德縣) 야오두지에(堯渡街)에 홍차 상점을 열었다. 그는 처음 그가 관직을 지냈던 푸지엔 지역의 홍차, 소위 민홍차(閩紅茶)를 모방하여 홍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치먼홍차를 완성한 위간천의 초상
푸지엔의 우이산(武夷山)은 중국에서 홍차가 처음 나타난 곳이다. 오늘날 치먼을 홍차의 원산지라 하지만 실제 홍차의 고향은 푸지엔 우이산인 셈이다. 우이산 홍차가 만들어진 시기는 명나라 때로 그때 홍차를 ‘정산소종(正山小種)’이라 했다. 이 정산소종이 1610년 유럽으로 들어가고 영국황실의 결혼 때 혼수품으로 들어간 후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퍼졌다고 하니 오늘날 영국의 홍차는 중국에서 건너간 것이다. 위간천이 관직 생활을 했던 푸지엔은 홍차의 처음 생산지였으니 위간천이 후이저우로 돌아와 푸지엔의 홍차를 모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1876년 위간천은 치먼의 시루진(西路鎭)에 홍차 판매의 분점을 열고 경영을 확대했고 국제 홍차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큰 주목을 끌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 영국 상인들이 좋아하였으며 영국 상인들은 이 차를 ’치먼‘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치먼 홍차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 처음 건너간 것은 푸지엔 홍차였으나 영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명품 차를 대하기 시작한 것은 위간천의 치먼 홍차였다. 이후 치먼은 세계 홍차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잔치 마을의 농민이 차를 건조하고 있다. 후이저우의 농가에서는 차를 건조하고 덖는 작업을 흔히 볼 수 있다.
치먼의 홍차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치먼이 차나무가 자라는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먼 지역은 높은 산이 많고 숲이 발달했으며 기온이 따뜻하고 습도도 높다. 또 토양도 기름지고 비도 많이 오는 편이며 운무가 많이 끼는데 이러한 기후 조건은 차나무가 성장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환경이 좋은 치먼 서쪽의 리커우(歷口)와 주커우(渚口)는 지금도 홍차를 만드는 차 잎 생산의 중심지다. 치먼의 홍차가 색, 향기, 맛, 형태에서 최 상등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치먼의 홍차는 후윈룽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나 치먼 홍차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위간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이저우가 명차의 고향이라 함은 헛된 말이 아니다. 후이저우 즉 오늘날의 안후이성 황산시와 쟝시성 우위엔 지역을 다녀보면 조그만 산비탈에도 빈틈없이 심어진 차와 그 사이에 높이 자라고 있는 야생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청명이나 곡우 부근에 후이저우의 마을을 찾으면 마을 입구에 차잎 수매 상인들이 대기하고 있으면서 마을 주민으로부터 찻잎을 수매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있다. 이 찻잎들이 황산마오펑으로, 타이핑허우쿠이로, 치먼 홍차로 만들어져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 후이저우가 명차의 고향이라는 것이 과연 명불허전임을 실감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딴 찻잎을 수집하여 차 제조공장에 판매하는 장사꾼들이 마을 입구에서 수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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