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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12) ]

후이저우를 밀어낸 황산

임세권


단하봉(丹霞峰)에서 본 황산 일출


오랜 후이저우, 새로운 황산(古徽州新黃山)


천년을 이어온 후이저우(徽州)라는 명칭은 단순한 지명으로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안후이성 남부 일대의 역사 문화를 통합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후이(徽)’라는 말에는 그곳 사람들의 긍지가 들어 있다. 안후이성(安徽省)이 안칭(安慶)의 ‘안(安)’과 후이저우의 ‘후이(徽)’가 이 합쳐진 이름이라는 것 만 해도 후이저우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말해준다. 후이저우부(徽州府)는 안후이 남부를 대표하는 행정구역으로 일 천년을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에게는 후이저우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라는 사실도 후이저우의 역사가 만들어온 문화적 자긍심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 후이저우라는 이름은 황산시에 속한 작은 구역인 후이저우구(徽州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제 옛 후이저우부를 나타내는 지역명으로 후이저우라는 이름은 없다. 후이저우는 송나라 휘종 황제 때 처음 등장했으니 천년 가까이 불려온 이름이다. 그런 ‘후이저우’라는 이름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주범은 바로 황산이다. 명청대 이 지역의 문화를 크게 번성시키고 후이상(徽商)의 존재가 중국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후이저우의 명성을 전 중국에 떨쳤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옛 후이저우 지역의 낙후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것은 황산 뿐이라는 믿음이 후이저우라는 이름까지 사라지게 한 것이다. 셔현(歙县)、이현(黟县)、슈닝(休宁)、치먼(祁门)、지시(绩溪)、우위엔(婺源) 등 일부육현(一府六縣)으로 일컬어지던 후이저우는 지시현과 우위엔현을 제외한 네 현을 합하여 1987년 황산시(黃山市)로 다시 태어났다. 돈벌이 되는 황산이 후이저우를 밀어낸 것이다.

오늘날 황산시 지역을 다녀보면 곳곳에 “옛 후이저우, 새로운 황산(古徽州新黃山)”이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황산시라는 낯선 이름으로 도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후이저우라는 이름이 아니면 황산시를 내세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황산시 사람들인들 어찌 후이저우에 대한 아쉬움이 없겠는가?


황산의 야생화 뻑꾹나리


황산을 천하 명산으로 알린 쉬시아커(徐霞客)


그러면 황산은 얼마나 대단한 산이길래 천년을 내려온 후이저우를 내 쳤는가? 지금 황산시를 찾는 사람의 대부분은 황산에 오르는 사람들이다. 황산은 안후이성이 전력을 투구하여 개발한 중국 최대의 관광지다. 황산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성공을 이루자 중국의 많은 명산들이 황산을 모델 삼아 관광지로 정비되었다.

중국의 명산으로는 일반적으로 오악(五岳)을 일컫는다. 오악은 동악(東岳)인 산동성 타이산(泰山), 서악인 샨시성(陝西省) 화산(華山), 남악인 후난성(湖南省) 헝산(衡山), 북악인 샨시성(山西省) 항산(恒山), 중악(中岳)인 허난성(河南省) 총산(嵩山)을 말한다. 이 산들은 고대로부터 민간에서 산신으로 숭배해 왔고 오행 사상과 제왕의 순렵(巡獵) 봉선(封禪)이 결합된 산물이다. 후에 도교가 계승하고 대부분 도교 명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이들 오악은 중국의 고대에서부터 신성한 산으로 숭배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중국의 산악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에 비하면 황산은 그 수려한 산세에 불구하고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황산까지 이르는 도로망 또한 근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가장 낙후한 곳이었다. 따라서 황산은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황산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명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때 쉬시아커(徐霞客, 1587-1641)라는 지리학자이자 문학가 그리고 일반에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여행가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남긴 여행기로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가 있는데 이는 단순한 여행기라기보다 중국 전역에 걸친 인문지리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정부는 서하객유기가 편찬된 5월 19일을 중국여유일 즉 ‘중국 여행의 날’로 정했으니 쉬시아커가 중국의 여행 또는 관광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시신봉(좌)과 옥순봉 사이로 황산의 기암괴석들이 펼쳐져 있다.


그가 처음 황산에 오른 것은 1616년으로 31세 때였다. 이때 남긴 “이 세상에 휘주의 황산 만한 곳은 없다. 황산에 올랐더니 천하에 산이 없더라. 이제 더 볼 것이 없다.”라는 그의 글귀는 황산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2년 뒤 다시 황산에 갔다. 그 때 그가 남긴 황산 여행 일기(游黄山日记)는 1618년 9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에 걸쳐 천도봉(天都峰)과 연화봉(蓮花峰)을 중심으로 시신봉(始信峰)·석순봉(石筍峰)·사자림(獅子林) 등 황산의 주요 봉우리를 오르고 구룡폭(九龍瀑)을 거쳐 타이핑현(太平縣)으로 내려간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그는 이 일기에서 “바위로 막혀 있는 곳은 바위를 뚫어서 길이 통했고 절벽이 험한 곳은 돌계단을 파내서 길이 나 있었다. 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려 있어 절벽을 오를 수 있었다.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서로 섞여 오색이 아름답게 어울려 있으니 마치 그림 같고 또 비단 수를 놓은 것같이 아름다웠다. 황산에 올라 본 것들이 일생을 통해 본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었다”고 적었다.

그가 황산에 다녀 온 후 남긴 황산의 예찬은 30세 전후의 젊었을 때이니 이후 그가 중국 천하를 돌아본 것을 생각하면 좀 지나친 과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22세 때부터 여행을 시작했고 28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여행기를 남기기 시작했으니 그의 말을 특별히 지나친 과장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후 쉬시아커의 명언으로 전하는 ‘오악에서 돌아오니 이름난다고 하는 산들이 눈에 들지 않더니, 황산에서 돌아오니 오악이 눈에 들지 않더라.’라는 말을 보면 황산이 적어도 오악에 못지않다는 것은 인정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란 산이 된 검은 산


황산의 본래 이름은 이산(黟山)이었다. ‘이(黟)’는 검다는 뜻이니 검은 산이라는 말이다. 황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산색이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푸른 하늘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재 마을인 홍춘이 있는 이현(黟縣)은 이산 즉, 황산에서 나는 청석을 이용하여 많은 석조 공예품을 생산하여 왔는데 이현이라는 이름은 이산이라는 이름과 서로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황산도경(黃山圖經)이라는 책에 황산의 옛 이름은 이산(黟山)이며 헌원황제(軒轅黃帝)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헌원황제는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그냥 황제(黃帝)라고도 부른다. 그는 중국에서 양잠을 시작하고 배와 수레를 만들었고 집 짓는 법이나 의술 등을 시작하였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헌원황제가 노년에 이르러 백성을 위해 아직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늙음을 한탄하고 불로장생약을 만들어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이산 즉 황산에 들어와 함께 데리고 온 부구공, 용성자와 함께 9년의 세월을 지내고 천신만고 끝에 불로장생약을 완성했다. 세 사람은 약을 먹고 모두 신선이 되었고 지금은 헌원봉(軒轅峰) 부구봉(浮丘峰) 용성봉(容成峰)이라는 산봉우리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서문 쪽에서 본 황산 원경, 옅은 안개 속에 검은 색 실루엣으로 드러나 있다.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이산을 황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747년 당나라 현종에 의해서이다. 즉 검은 산(黟山)이 노란 산(黃山)으로 바뀐 것이다. 황산에는 황색, 즉 노란 색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은 애초 황산이라는 말이 노란 색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당 황실은 도교에 심취하여 있었다고 하는데 이산을 황산을 바꾼 것은 이러한 당의 도교 숭상과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당의 황실에서 관심을 가지고 산 이름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은 이제 황산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의 유명 시인 리바이(李白)가 황산에서 지은 시를 남긴 것은 황산이 명산의 반열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섯 개의 바다로 둘러싸인 황산


황산은 모두 다섯 개의 바다로 이루어졌다. 다섯 개의 바다는 동해, 서해, 남해, 북해와 중심부의 천해(天海)를 말한다. 또 황산에 들어가기 전의 황산 입구는 전해(前海)라고 부른다. 황산의 정상부 능선에서 눈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산의 능선들을 보거나 그 능선들을 뒤덮은 구름의 바다를 보면 황산에서 내다본 주위 세계를 바다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중국인다운 발상이며 비유라고 생각된다. 산을 바다라고 하는 역발상 자체가 중국인이 비유의 천재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황산에 올라 사방 천지를 내려다보면 누구라도 그 비유를 과장된 헛말로 비웃을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명대 이후 황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처음 산 아래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옥병루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광각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이 옥병루에 당도한다. 황산의 최고봉 연화봉을 등지고 옥병루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남해이다. 쉬시아커가 이곳에서 처음 황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푸먼화상이 산봉에 문수원이란 절을 처음 지은 곳이기도 하다. 문수원 자리는 지금 옥병루 빈관이라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연화봉으로 오르는 백 개의 돌계단 백보운제(百步雲梯)


옥병루에서 연화봉을 돌아 광명정을 넘어가면 시신봉 청량대 사자봉 등이 있는 북해 구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북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청량대라고 하는데 이곳은 지금 황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새벽마다 수많은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황산 북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길이 났는데 많은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송곡경구(松谷景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북쪽 사면은 황산의 뒷면이라 할 수 있다. 황산의 산세를 일컫는 말로 전산험 후산수(前山險 後山秀)라는 말이 있다. 즉 남쪽에서 황산을 오르는 길은 바위틈을 비집고 절벽을 오르내려야 하는 험로인데 비해서 황산의 북쪽 즉 뒷면을 타고 오르면 비교적 완만한 산세에 소나무와 계곡과 산위의 화강암 봉들이 절경을 이루어 수려한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청량대 쪽 능선에서 본 북해


청량대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르면서 온 길을 돌아보면 산골짜기의 넓은 터에 베이하이 빈관을 비롯한 여러 호텔들이 보이는데 이들도 주변 산세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사실 산 정상부에 호텔을 짓는다는 것은 자연의 훼손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은데 황산의 규모를 생각하면 산 속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면 산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관광객을 위해 최소한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늘어나는 호텔들을 보면 좀 지나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호텔들은 북해지역에서 골짜기를 따라 계속 이어지는데 시하이(西海) 빈관을 거처 파이윈러우(排雲樓) 빈관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파이윈러우 빈관에서 가까운 곳에 배운정(排雲亭)이라는 돌로 지은 정자가 있다. 정자 앞은 높은 절벽이며 이 절벽 위에 서면 서해대협곡이 펼쳐진다. 서쪽을 향해 터진 이 장소는 황산 일몰을 감상하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서해대협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서해대협곡은 황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황산에 갔다 왔어도 이곳을 지나지 않고서는 갔다 왔다는 말을 꺼낼 수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안전 때문에 폐쇄되니 서해대협곡을 보려면 겨울철을 피해야 한다.


북해풍경구의 호텔지역


황산의 서쪽으로 전개되는 풍경구 중에서 아름다운 곳의 하나는 백운경구(白雲景區)라는 곳이다. 이곳은 서해대협곡을 지나다가 보선교(步仙橋)라는 다리에서 서쪽으로 바로 내려가는 곳인데 황산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골짜기를 따라 길이 나 있어서 맑은 계류를 항상 옆에 두고 길을 갈 수 있다. 산 중턱의 조교암(釣橋庵)은 지금 백운암(白雲庵)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도교 사원이었던 곳이 청나라에 들어와서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백운암을 산 아래쪽에서 보면 문 양쪽으로 펼쳐진 석벽으로 인해 마치 큰 성문처럼 보이며 그를 둘러싸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양쪽의 흰 화강암봉과 계곡에 가득한 소나무들이 어울려 황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이 외에 백운령(白雲嶺)에서 바라보는 동해, 오어봉(鰲魚峰)에서 바라보는 천해 등도 황산의 대표적 승경으로 사랑받는다. 사람들은 황산의 다섯 바다를 보기 위해 산을 이리 저리 바쁘게 오르내려야 하는데 이를 “간해 ‘간해(赶海)’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서해대협곡의 거대한 암벽 허리에 걸린 잔도


구름 위에 떠있는 낭떠러지 길, 황산 잔도(棧道)


당나라 때 황산이 명산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황산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명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황산에 오르는 길이 전혀 없어 산 속의 도교 승려들이나 겨우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송대에 편찬되었다고 전하는 황산도경(黃山圖經)에는 산 입구에서 탕원(湯院, 현재의 황산온천 부근의 사원)을 거쳐 산으로 오른다고 되어 있으며 수레나 말만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이 황산에 간다는 것은 대체로 황산 남록의 온천에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산 밑의 사람들은 구름 위 봉우리는 사람이 오를 수 없으며 가끔 신선들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는 말이 전할 뿐이다.


서해대협곡에 걸린 황산 잔도


황산에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만들어진 것은 명대의 고승 푸먼법사(普門法師)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법사는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명승지를 찾아 수행을 하라고 한 말을 지키기 위해 6년 동안 전국을 헤매다가 황산을 찾아냈다. 60세에 황산에 온 그는 인근 주민들과 함께 4년 동안 절벽을 뚫고 계단을 깎아 산정에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자광각(慈光閣)으로 이름이 바뀐 자광사(慈光寺), 영객송(迎客松) 근처에 있던 문수원(文殊院) 광명정(光明頂) 산봉에 있던 대비원(大悲院) 등의 사원을 지었다.

푸먼이 이 험한 곳에 와서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황산에서 가까운 셔현(歙縣) 사람 판즈항(潘之恒)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즈항은 당시 셔현의 이름난 문인이고 또 황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황산통이었다. 그는 황산의 온천 근처에 집을 짓고 많은 친구들을 불러 즐겼는데 이때 들어온 푸먼 법사의 후견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60세를 넘긴 노승이 험준한 화강암 위에 길을 내고 절을 짓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황산에 길을 내고 사찰을 건립한 후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그는 백성들의 재난을 구제하기 위해 북경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마지막에는 황산으로 돌아와 길에서 죽었다고 한다. 가히 황산을 위해 살다가 황산에서 죽은 것이다.


황산의 산길을 개척한 푸먼 법사의 묘탑


황산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사의 자재는 모두 인력과 동물들에 의해서 옮겨진다.


오늘날 황산을 찾는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에 걸린 잔도를 걸으며 경탄을 금치 못한다. 대체로 이 길들은 덩샤오핑의 지시에 의해 황산이 본격 개발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명대에 푸먼법사에 의해 시작된 일이었던 것이다. 이후 황산에서의 도교 사원은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으며 황산은 불교의 명산이 되었다.

황산 잔도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서해대협곡이다. 서해는 글자 그대로 서쪽 바다라는 뜻이다. 서해대협곡을 종단하는 것이야말로 황산 기행의 백미로 꼽힌다. 일기가 맑은 날 절벽의 중허리에 걸린 좁은 잔도를 걷다보면 정말 오금이 저린다. 잔도 위에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일 정도인데 아득히 아래에서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노라면 또 갑자기 보는 사람이 신선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천변만화하는 황산의 일기와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그리고 안개 속에 드러났다가 가려지는 절벽의 풍경들은 가히 황산 풍경의 최고 가경이라 할 만하다.


황산의 산봉들


황산에 들어가면서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이다. 처음 황산 밑에서 산 위를 보면 어마어마한 바위 덩어리에 기가 눌린다. 어릴 적부터 도봉산과 북한산을 보면서 자란 나는 바위 봉우리에 특별히 친근함을 느낀다. 그런데 황산의 바위를 올려다 본 순간 그것은 도저히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넘어선 풍경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처럼 그냥 그림 속의 미인처럼 실제 내가 그 속에 몸 담을 수 있다는 현실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황산의 바위는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생긴 모습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서 바위마다 풍부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황산이 세계자연유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동시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진 지질학적인 가치 뿐 아니라 산 속에 스며있는 다양한 인문학적 이야기 들 때문이다.

황산은 7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절반인 36개의 대봉과 나머지 절반의 소봉들이다. 이는 36이라는 숫자에 맞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황산에는 1,000미터 이상의 산봉이 77개 있다고 한다. 이 모든 봉우리가 화강암봉이다. 그중 가장 높은 것이 연화봉으로 해발 높이 1,864미터이다. 연화봉을 멀리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암석 덩어리들이 모여 하나의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바위들의 조합이 멀리서 보면 마치 연꽃이 막 벌어지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연화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름 위에 솟은 황산 최고봉 연화봉


연화봉과 마주보고 있는 황산 제3봉 천도봉


연화봉 동남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해발 1,830미터의 천도봉이 있는데 이 두 봉우리는 황산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전체 산봉들을 대표한다. 이 두 봉우리 사이에는 옥병봉이라는 두 봉우리보다 좀 낮은 산봉이 있다. 명나라 시기에도 황산에 오르려면 온천이 있는 탕천에서 산을 올라 처음 당도하는 곳이 바로 이 연화봉과 천도봉을 바라보는 옥병봉 밑이다. 따라서 산을 올라 처음 만나는 봉우리가 최고봉인 연화봉이 되는 셈이니 여기서 그냥 내려간다고 해도 황산을 올랐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또 두 봉우리는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봉우리 자체의 뛰어난 자태나 험준하기가 다른 봉우리에 비해 특별하므로 이 두 봉우리 만으로도 황산을 일컫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두 봉우리는 모두 황산의 삼대주봉에 속하는데 나머지 하나는 해발 1,840미터의 광명정이다.

황산 산봉으로 연화 천도 두 봉우리가 뛰어나긴 하지만 앞부분에서 반드시 말하고 넘어가야 하는 봉우리로 시신봉(始信峰)을 들어야 한다. 청나라 강희황제(1654~1722)때 황산 아래의 타이핑 현령으로 있던 천지우비(陳九陛)라는 사람이 처음 황산에 올라 쉬시아커가 황산이 천하에 가장 뛰어나다고 한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시신봉에 이르러 황산의 경관이 정말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쉬시아커가 한 말이 헛된 말이 아님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봉우리를 황산이 명산임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는 데서 시신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시신봉은 실제 봉우리는 산봉으로서의 자태가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거기서 내려다보는 넓은 경관은 가히 절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산의 여러 산봉을 한군데 모아 놓고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군봉정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이곳은 산봉이라고 할 수는 없고 능선 중에서 시야가 훤히 트인 곳이다. 황산에서 수많은 산봉을 이처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따로 더 없을 것이다. 군봉정은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군봉정에서 보는 낙조


삼절(黃山三絶), 괴석 운해 기송


이와 같은 큰 산봉을 보는 것이야말로 황산의 바위가 주는 웅대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작은 암봉이야말로 황산 기암을 보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이 작은 암봉들은 그 형태가 주는 재미 뿐 아니라 바위봉우리마다 그에 걸맞는 이야기들이 전해져서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황산의 산봉이 아닌 그냥 바위들 가운데 황산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것 중 첫째를 꼽는다면 당연히 비래석(飛來石)이 꼽힌다. 비래석은 광명정에서 배운정으로 통하는 능선 중간 바위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바위 덩어리이다. 마치 큰 돌기둥 같은 형상의 바윗돌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 어디에서 날아와 절벽 위에 내려선 듯 보인다. 높이 12미터의 이 바윗돌은 황산의 웬만한 능선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비래석은 그냥 황산의 이름난 바위봉우리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황산의 상징이 되었다.


구름위에 솟은 비래석


원숭이가 운해를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는 후자관해(猴子觀海)


비래석의 유래는 송나라 때 단푸(單福)라고 하는 석공이 자기 고향에 다리를 놓아주고자 하는 갸륵한 일과 관련된 설화에서 찾는다. 단푸는 고향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이 강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다리를 놓아주고자 했다. 자기의 딸과 세 제자가 멀리 있는 큰 산에서 채석을 하여 강가로 운반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네 사람으로서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 때 딸이 자기 몸을 팔아 해결하고자 했는데 팔 신선 중의 하나가 딸의 마음을 알고 부채를 이용하여 채석한 돌을 강으로 날려 옮겨주었다. 하나의 돌이 남았는데 이미 돌이 충분하므로 구름을 타고 다니다가 황산의 경치가 좋은 것을 보고 황산에 떨구어 황산의 아름다운 경치 하나를 보탰다는 이야기다.

비래석 외에도 황산의 기암괴석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앞에 소개한 당나라 시인 이백이 황산에 왔다는 이야기는 몽필생화(夢筆生花)라는 봉우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이백이 황산에 올라 시를 짓고 한잔 술에 취하여 시를 쓴 붓을 하늘로 던졌는데 붓이 땅으로 떨어져 꽂혀 바위가 되고 붓의 뾰족한 끝이 한그루 소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봉우리는 덩샤오핑이 머물었다는 베이하이 빈관 앞에서 보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또 서해대협곡이 시작되는 부분의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낭떠러지 길을 걷다보면 마치 장화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 한 흰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는 도교 사원에서 수련을 하던 젊은이들이 서로 친해져서 매일처럼 만나다가 스승의 엄한 벌을 받고 신발을 바위에 걸어놓고 절벽아래로 뛰어내려 후에 그들이 남겨놓은 신발이 바위가 되었다는 선인쇄화(仙人曬靴) 봉우리다. 선인쇄화는 신선이 신발을 말린다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붓이 바위가 되었다는 몽필생화(夢筆生花)


신선의 신발이 바위가 되었다는 선인쇄화(仙人曬靴)


좁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수백년을 살아가는 황산송


옥병루에서 광명정을 향하여 구름 속을 오르는 일백 계단의 사다리(百步雲梯)와 실처럼 좁은 하늘(一線天)을 만든 바위틈을 지나면 오어봉(鰲魚峰)이라는 기암의 봉우리를 만난다. 용이 되지 못한 잉어인 오어는 화재를 방지하는 신령한 동물로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황산의 오어는 바위 봉우리로 등장한다. 마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고래 같기도 하고 영화 괴물 속에 나오는 한강의 괴 물고기 같기도 한 이 바위는 허리를 뚫고 동굴이 형성되어 있어 동굴 속을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마치 고래 뱃속에서 나오는 듯 신비한 모습을 연출한다.

바위에 얽힌 이런 이야기는 바위가 조금만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빠지지 않고 붙어 있다. 붓걸이 같은 필가봉, 원숭이처럼 생긴 후자관해, 합장한 손모양의 합장봉, 일일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번거로울 정도다.

황산 삼절의 나머지 둘은 소나무와 구름이다. 황산의 소나무들은 중국에서 별도의 종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특수한 존재로서 황산송(黃山松)으로 불린다. 해발 6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수 백년의 수명을 한다. 이 소나무들은 뿌리를 바위에 붙이고 있으므로 뿌리의 모양이 바위 표면에 부채살처럼 둥글게 펴져 달라붙어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바위 절벽에 의지하여 몸을 허공에 띄우고 있는 이 소나무들을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에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황산송 중의 으뜸은 영객송(迎客松)이다. 옥병루 옆의 바위 절벽을 의지하여 줄기를 키운 이 소나무는 가지가 절벽 반대편 한쪽으로만 자라 마치 팔을 벌려서 옥병루를 찾아 산을 오르는 사람을 맞이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나무 자체는 다른 나무에 비해 특별히 큰 것도 아니고 모양도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닌데 나무 뒤로 옥병루와 함께 황산 최고봉인 연화봉과 천도봉이 있고 황산을 올라 처음 마주하는 바위봉 아래 있어 특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보인다.


옥병루에서 황산에 오른 사람을 맞이하는 영객송


영객송은 비래석과 함께 황산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모든 황산 소개의 책자는 예외 없이 영객송을 표지에 싣는다. 영객송은 황산시의 상징이며 안휘성의 상징이며 중국 국가의 상징이다.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벽에는 철화(鐵畵:철편을 붙여 만든 그림)로 된 영객송이 붙어 있다.

소나무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단결시킨다는 단결송(團結松), 영객송 근처에서 손님을 배웅하는 송객송,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아난이 특별히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우산같이 생긴 우산송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이 전에도 중국인들이 스토리텔링의 귀재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산 속의 바위와 나무에게까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중국인들에게 탄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위에 언급한 기암과 기송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형상과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어 산을 찾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이 두 가지 황산의 명물은 골짜기에서 생성되어 산을 이리 저리 감싸고도는 안개구름 즉, 운무가 없으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산의 경치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운무가 아닐까? 황산의 운무는 그야말로 천변만화하여 잠깐 동안에도 눈앞의 풍광을 수도 없이 바꾸어 준다. 황산을 찾을 때 날씨가 청명하여 멀고 가까운 산줄기와 바위봉우리 그리고 소나무들을 명징하게 볼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황산의 안개 속에 가려진 소나무와 바위가 언뜻 언뜻 안개를 뚫고 우리 눈앞에 갑자기 출현할 때 황산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바위와 소나무 구름이 어울어진 황산풍경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


서해대협곡의 낭떠러지 잔도를 걸으면서 발밑의 구름을 보면 잔도 위의 사람이 그대로 구름에 탄 신선이 되고 만다. 기암과 기송이 아무리 황산의 명물이라 해도 운무가 없으면 그 빛이 살아나겠는가? 안개는 황산을 돋보이게 하는 비단 옷이라 할 수 있겠다. 황산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비를 맞아도 좋으니 운무를 볼 수 있는 날을 택하는 것이 황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나 높은 산에 오르면 운무를 만난다. 그러니 황산의 운무라고 특별한 것은 아닐텐데 황산의 운무가 이처럼 황산삼절로 꼽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그것이 황산의 바위와 소나무를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황산삼절 즉 바위, 소나무, 운무는 각각 혼자서 잘났다고 뽐내지지 않는다. 바위에 소나무가 없다면 그 바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소나무가 그냥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면 그것이 여느 보통 소나무와 무슨 구별이 되겠는가? 소나무와 바위가 함께 어우러질 때 그 둘은 황산명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운무가 비단 옷을 입히면 비로소 황산은 세상 어느 산보다도 뛰어난 경관을 만들며 오악이 무색할 정도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헌원황제를 아이로 만든 황산 온천


지금 황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황산은 바위도 좋고 소나무와 구름도 좋으나 다만 물이 적은 것을 결점으로 꼽을 수 있다. 오직 백운경구 만이 계류를 따라 산을 오르도록 되어 있어서 비가 올 때는 폭포도 만나고 또 맑은 물소리와 벗하며 산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래 황산을 오르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탕천 즉 온천지구를 통해서 옥병루쪽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다. 황산삼절에 온천을 더하여 황산사절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온천은 옛날부터 황산의 가장 중요한 요지로 꼽히던 곳이다. 헌원황제가 이곳에서 목욕하고 49일 만에 노인에서 아이로 돌아가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었다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명청대에 황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곳 온천에 오는 것을 의미했다.

온천 지구에는 유명한 황산 삼 폭이 있다. 황산 삼 폭은 구룡폭(九龍瀑), 백장폭(百丈瀑), 인자폭(人字瀑)을 일컫는다. 구룡폭은 아홉 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위에서부터 연이어 떨어지는 것으로 폭포마다 비취색의 못이 만들어져 절경을 이룬다. 이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구룡폭이다. 구룡폭은 규모에 있어서도 으뜸이지만 이곳은 유명한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황산에서 이들 폭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나 폭포 만 놓고 보면 규모나 경관적 측면에서도 중국의 대표적 폭포라 할 수 있다. 운곡사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거꾸로 산을 내려오다 보면 폭포를 볼 수 있는 관폭대(觀瀑臺)를 갈 수 있고 관폭대를 거쳐 산의 중턱을 가로질러 가면 구룡폭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황산 관광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어 아쉬움이 있다.


구룡폭포의 장관


*‘후이저우를 밀어낸 황산’으로 일년을 끌어온 후이저우 이야기를 끝맺는다. 후이저우는 한국으로 치면 안동과 같은 전통문화의 지역이고 주희의 조향이다. 지금도 유학사상을 생활 깊숙이 받아들이며 수 백 년을 이어온 동성마을들이 황산의 주위에 모여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유서 깊은 곳이다. 거기에 황산이라는 중국 제일의 명산이 있어 이제는 중국 뿐 아니라 세계인의 사랑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통마을들을 오늘 어떻게 지속시키며 미래사회가 과거를 안고 있는 마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그냥 중국의 한 관광지로 보기에는 너무 큰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한 지역의 문화를 일 년 동안 소개한 까닭이다.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조선의 신하 정탁, 명나라의 군사 호환 - 서로 만나 전쟁의 정세를 논하다”


정탁, 용만견문록
1593년 9월 말,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에서 파견된 대군들이 9월 초·중순을 전후로 하여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왜적들은 남쪽 해안에 남아 있었고, 명나라는 총병(摠兵) 유정(劉綎)의 일만 여 병사를 남겨 이를 막고 있었다. 이때 의주에는 유정의 군사(軍師 작전 참모)인 호환(胡煥)이 병 때문에 경상도로 가지 못하고 머물러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찬성(左贊成) 정탁(鄭琢)은 자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군사들을 전송하러 의주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의주에서 서로 만나 한 눈에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정탁은 조선의 신하로서, 호환은 유정의 군사(軍師)로서 전쟁의 정세를 논하였다.
정탁은 아직까지 왜적의 정세가 걱정스러웠다. 비록 왜적들이 남쪽 해안가로 밀려나 곤경에 빠진 채 머무르고 있지만, 이 전쟁은 왜적들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정탁은 마음이 급하였다. 왜적들을 계속 놔두면 다시 힘을 길러 침략을 할 것임 분명하였다. 이에 정탁은 호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략가가 마주앉은 풍경 - 유성룡의 소매 속 지도와 명나라 장수가 부채에 써내려간 시”


정탁, 피난행록,
1592-12-29 ~ 1593-01-05
1592년 12월 29일 왕세자의 분조(分朝) 일행은 안주(安州) 등을 거쳐 평안북도 영변(寧邊)에 도착하였다. 영변에 도착한 왕세자 광해군은 오던 길에 머물러 있던 명나라 장수들에게 왕세자로서 위문을 해야 했다. 이에 1593년 1월 3일 좌찬성 정탁(鄭琢)을 시켜 안주에 있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문안케 하였다. 정탁은 급히 안주로 가서 이여송을 문안하였다. 그런데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은 안주에서 함께 평양 탈환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정탁은 돌아와 그들이 논의했던 일을 1월 5일 승정원(承政院)을 왕세자에게 보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93년 1월 3일 제독 이여송이 안주에 왔다. 그는 오자마자 통역관 진효남(秦孝男)을 불러 체찰사 유성룡에게 가서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라고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성룡은 곧바로 관대(冠帶)를 갖추고서 제독이 있는 막사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통역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하라고 하였다.
“깊고 어두운 밤 감히 배알을 청해서는 아니 되나 일이 군사기밀과 관련되어 있어 대인의 앞에 나아가 대인이 물어보는 것에 따라 말씀드리려 합니다.”

“명황제가 전쟁을 독촉하다”


정경운, 고대일록, 1593-08-24 ~
1593년 8월 24일, 명나라 신종(神宗)이 강화회담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을 독책하는 사신을 보내 군사들을 재촉하여 왜를 정벌하게 하고 3만의 병사를 더 파견해 섬멸을 하도록 했다.

“청과 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 병자호란에 맞서는 원칙주의 성리학자 김상헌의 강한 주장”


미상, 법성일기, 1636-12-17
1636년 12월 17일에 청나라가 침입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 김상헌이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가서 임금을 알현하고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당연히 먼저 싸우고 화친은 뒤에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 이하의 신하들이 세자(世子)를 청나라의 병영에 볼모로 보내어 청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려 하므로, 선생이 간절히 책망하기를, “어찌 신하로서 세자를 적에게 주는 의(義)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의 말하는 태도가 준엄하여 대신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곧장 대궐에 나아가 죄를 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청이 쳐들어오자 청과 싸우자는 척화론과 청과 화의를 맺자는 주화론이 있었다. 주화론자들이 세자를 볼모로 보내어 청에게 화의를 청하려고 하였던것을 김상헌이 적극 저지한 것이다. 당시 척화론은 조정의 대세였고 대표주자는 김상헌이었다. 명분을 저버릴 수 없고 청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의 원칙을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대마도 유배 의병들, 고국에서 보내 온 의복을 수령하는 문제로 일본군과 담판하다”


임병찬, 대마도일기, 1906-09-16 ~
1906년 9월 16일, 일전에 고국에서 우편으로 발송한 동복 때문에 대마도 유배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담판이 있었다. 이날은 날씨마저 음산하고 싸늘했는데, 점점 겨울이 찾아오는 것처럼 날씨가 추워졌기에 그만큼 동복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하지만 일전에 이즈하라 우체국으로부터 담배 때문에 옷 보퉁이가 압류되어 있었고 이 압류가 해제되지 않아 의병들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이즈하라 우체국 측에서는 규정대로 물건 값의 27배를 세금으로 납부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의병들은 물품을 검사하는 일본군 위관에게 청하기를,
“옷 보퉁이를 풀어서 담배만은 돌려보내고 의복만 찾도록 해 주었으면 다행이겠고, 그렇지 않으면 3보퉁이에 들어 있는 담배가 값으로 치면 10전(錢)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세금(稅金)으로 2원 70전을 마련해 줄 것이니 옷 보퉁이는 돌려보내지 말고 기어코 찾도록 해 달라.”
하였다. 이후에도 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말이 오갔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의병들은 답답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세 보퉁이에 담긴 의복과 담배 가격의 27배에 달하는 돈을 의병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협상하는 외에 달리 방법도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겼던 일본군 검사 담당 위관은 말하기를,
“보퉁이를 풀고 물건을 나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전례가 없고, 세금(稅金)을 바친 후에 물건을 찾아온다는 것은 우편국(郵便局)으로 하여금 나가사키 관세소(長崎管稅所)에 보고하게 하면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회답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여러 차례 의병 측에서 청해서 겨우 얻어낸 대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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