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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조선시대 승진마블, 종경도(宗卿圖)

김규만


이번 호 스토리이슈에서는 조선판 마블, 종경도(宗卿圖)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종경도(宗卿圖)는 조선시대 ‘관직도표’로서, 하위직부터 차례로 승진하여 고위 관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의 놀이판입니다. 조선시대 승진마블, 종경도(宗卿圖)에 대하여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종경도(從卿圖) <출처:국립민속박물관>


Q1. 이 물건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이 물건은 종정도(從政圖) 또는 승경도(陞卿圖)라 불리는 조선시대 관직놀이의 놀이판인 종경도(從卿圖)입니다. 종정도 놀이란 놀이판에 당시의 관직명을 차례로 적어 놓고, 윤목(輪木)을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말을 이동하여 하위직부터 차례로 승진하여 고위 관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입니다.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복잡한 조선시대의 관직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행해지던 놀이인 셈이죠.


Q2. 언제부터 행해지던 놀이인가요?


<용재총화(慵齋叢話)>의 내용을 보면 조선 초에 하륜(河崙)이 만든 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놀이판에 적힌 관직의 명칭은 조선시대 관직 명칭을 사용하였지만, 관직의 명칭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관직은 항상 변천하고, 그 당시의 관직 명칭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놀이용 관직을 따로 사용 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Q3. 이 놀이에 필요한 놀이도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종정도(從政圖)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놀이도구가 필요합니다. 놀이판인 ‘종경도(宗卿圖)’, 주사위 역할을 하는 ‘윤목(輪木)’ 그리고 ‘놀이말’입니다.

1) 놀이판(종경도)

놀이판은 당시의 관직 체계를 적어 넣은 관직도표로서 관직명과 상황을 써 넣습니다. 각 아래에는 1~5까지의 숫자와 관직 또는 상황이 쓰여 있으며, 이는 윤목(輪木)을 던져 나온 수에 따라 다음으로 어디로 승진할 것인지 좌천할 것인지를 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놀이판의 중앙에는 중앙관직을, 놀이판의 가장자리에는 지방관직을 배치합니다.

중앙부의 맨 꼭대기 부분에 가장 높은 관직을 배치하고, 중앙부의 가장 아래쪽에 가장 낮은 관직을 배치합니다.


놀이판(종경도)의 구성

2) 윤목(輪木)

윤목(輪木)은 나무로 만든 5각 기둥으로, 5개의 모서리에 1~5까지를 새겨 굴리면 모서리에 새긴 숫자가 보이도록 만든 것으로 주사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윤목(輪木)은 5각 기둥으로 5단계의 숫자가 존재하고, 주사위는 6각으로 6단계의 숫자가 존재하는 차이는 있지만 여러 사람이 행하는 놀이이므로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윤목(輪木) <출처:국립민속박물관>


3) 놀이말

일정한 형태가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나, 자기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이 구별되도록 표시를 합니다. 대부분 색깔을 달리해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Q4. 어떤 방법으로 놀이가 진행되나요?


이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분의 결정입니다. 신분의 결정은 첫 번째 굴린 결과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죠. 신분은 크게 유학(幼學), 진사(進士), 무과(武科), 문과(文科), 은일(隱逸) 등 5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신분의 5단계는 지역 또는 시기에 따라 가장 높은 신분과 가장 낮은 신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분이 결정되면 각자의 신분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관직까지 누가 먼저 오르느냐를 겨루는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됩니다. 각 신분에 따라 가장 높은 관직은 ‘영의정(領議政)’, ‘도원수(都元帥)’, ‘지사(知事)’ 등이 되지만 ‘봉조하(奉朝賀)’를 마지막 최고로 칩니다. 봉조하(奉朝賀)는 최고직위에 오른 사람을 명예직으로 은퇴시켜 은퇴 후에도 녹봉을 주고 대우를 받는 관직이기 때문입니다.


Q5. 특정한 놀이 규칙이 존재했나요?

1) 양사법

양사라는 것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뜻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탄핵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양사법은 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규칙으로, 이 사람이 지정하는 말들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해당 말을 움직이려면 규정된 수가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2) 은대법

은대는 승정원(承政院)을 뜻하는 것으로 승정원은 임금의 비서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명령을 하달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승정원 벼슬에 있는 사람이 규정된 수를 얻으면 아래의 모든 말들은 다음 번 주사위를 굴려 나오는 숫자를 자기네가 쓰지 못하고 승정원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전부 바쳐야 하는 식입니다.


Q6. 지역마다 놀이 방식의 차이가 존재 했나요?


지역마다 놀이방식의 차이는 크게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역 또는 시기에 따라 신분의 결정에서 어느 것을 높게 치느냐에 차이는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에는 만과라고 하여 한꺼번에 무관을 만 명을 뽑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급제자가 너무 많으니 벼슬을 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말에 한량이라는 것이 원래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한량입니다. 급제는 했으나 벼슬이 없어 놀고 있는 처지를 말하는 것이죠.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문과, 무과, 은일, 진사, 유학 중 무과를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Q7. 유사한 놀이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남승도, 부처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불도, 전국의 유명한 정자나 누각의 이름을 적은 누각도 등이 존재하였는데 모두 같은 맥락의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8. 이 놀이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의 관직체계는 등급이 많고,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따라서 양반집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놀이를 통해 관직의 체계적인 개념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죠. 단순히 관직을 얻어 승진을 하는 놀이가 아닌 파직, 귀양, 사약 등의 규칙을 넣어 책임감과 관직을 얻은 선비의 올바른 자세를 익히게 하기도 한 것입니다.


    리  :  김규만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팀장)

“예조정랑이 되자마자 청탁을 받다”


권상일, 청대일기,
1720-01-21 ~ 1720-01-22
1720년 1월 하순, 정기 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권상일은 지난해 성균관 직강으로 내부 승진이 된 상태였다. 그는 꽤 성균관에 오래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직강이 되었던 그가 정기 인사 대상에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인사대상에 올라 있었다. 예조정랑 수망에 권상일, 부망에 홍구, 말망에 여길에 올라와 있었다. 결국 예조정랑은 권상일이 낙점되었다. 예조는 성균관의 상급 관청이었으므로 같은 5품직이라고 하더라고 성균관보다는 예조가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리였다. 또한 예조참판과 예조참의 또한 새로 교체되었으므로 예조 관원의 절반 이상이 이번 인사에서 새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가 예조정랑으로 부임한지 하루도 안되어 청탁이 들어왔다. 역관과 의학 5~6명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 청탁 편지는 대개 취재(取才)와 고강(考講)에 대한 것이었다. 본래 과거는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그런데 기술직 관원인 사역원(司譯院)의 역관, 전의감(典醫監)의 의학, 관상감(觀象監)의 역학 등은 모두 취재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다. 그런데 그 취재 담당 기관이 예조였던 것이다.

“이괄의 난 (5) - 피난하는 임금의 가마를 뒤따른 자들, 승진 리스트에 오르다”


김령, 계암일록, 1624-03-08 ~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이 인조반정에서의 공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 요소로 경계하는 조정의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으킨 난은 순식간에 조선을 강타했다. 영변에서 시작된 난은 보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도성까지 내려왔고, 국왕 인조는 급기야 파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변란의 공과 죄를 물어 체직과 임명이 계속되었다.
이 때 인조의 파천 시 어가(御駕)를 호종하고 수행한 공으로 4품 이상의 관리는 모두 승격을 시켜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기까지 승진 리스트에 오른 관리가 모두 1백 5명이었다.
대간(臺諫)에서는 이를 논계하여 상이 너무 남발되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이 결정을 거둬달라는 대간의 논계는 4품 관리는 통정대부로 올린 것만 개정하자고 청하는데 그쳤다. 임금의 가마를 따랐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귀와 김류가 관직임명을 두고 갈등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7-27 ~
1625년 7월 27일, 아침에 부슬부슬 비가내렸다. 식사 때쯤 그치더니, 이 비로 냇물이 불었다. 저녁에는 김시익이 찾아와 같이 보리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김령은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에 남이공이 대사헌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것은 전적으로 김류를 통해서인 듯 하였다. 박정, 유백중, 나만갑 등은 모두 이귀와 친한 이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외직을 제수받았다. 이를 전해듣고 이귀가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귀가 주상전하의 면전에서 김류를 욕하자, 주상전하가 하교하여 ‘이귀가 공믈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며 조정을 업신여겼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고 명하시고는 또 ‘박정 등의 일은 훈신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조정이 불안한 것인데 죄과가 가볍지 않으므로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우의정 신흠 등이 차자를 올려 겨우 주상전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유배의 명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이 일로 김류 역시 사퇴하여 갈리고 오윤겸이란 이가 이조 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의 군적 어사도 뽑았는데, 경상좌도는 이경여이고, 우도는 김시양이란 이가 뽑혔다. 영의정 자리는 이미 봄부터 비어있었는데 여태껏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의 정승자리는 비어 있고, 또 반정의 공신들 사이는 저렇듯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었다.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인사 대상에 오르다 번번히 떨어지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19년 7월 22일, 정기 인사 기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사를 담당해야 하는 이조참의가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으므로 이조참의를 교체시켜 이병상(李秉常)을 임명했다. 그래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사가 열렸다. 이날 인사에서 권상일은 그토록 바라던 지방관 후보에 올랐다.
강진현감의 말망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망은 실제 거의 가망이 없었다. 3후보 중에서 가장 꼴지가 말망이었기 때문이다. 병조좌랑이었던 김성발이 1순위인 수망으로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와서 벼슬살이 하면서 단지 쇠잔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부친을 영화롭게 모시려 했지만 지금 또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튿날 다시 정사가 진행되었다. 강진현감으로 임명된 병조좌랑을 대신하기 위한 인사로 권상일이 2순위인 부망에 올랐으나 낙점되지 못했다. 다음날 또 정사가 진행되었다. 다른 병조좌랑 한자리에 그가 3순위 말망에 올랐고 또 한번은 예조정랑 자리에 2순위 부망에 올랐으나 그는 낙점을 받지 못했다. 다시 성균관에서 몇 개월의 관직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복직 (2) - 성주목사로 복직 될 뻔 했으나…”


권문해, 초간일기,
1582-11-20 ~ 1583-01-16
1582년 11월 20일, 권문해는 공주목사 재직 시절의 모든 사건과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책임을 벗게 되자 관직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주목사로 추천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성주목사로 세 번이나 추천을 받아 후보에 오른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탄핵을 받아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때 권문해가 성주목사의 세 명의 후보자 중 말망(末望)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 후보자 모두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임금을 모셨던 사람들로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가장 첫 번째로 추천을 받아 수망(首望)에 오른 윤희길(尹希吉)이 성주목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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