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어버이를 섬길 날이 많지 않다
愛日堂애일당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 향교는 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지만, 지적 수준이 갖추어진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기초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집안에 서당을 설치하여 교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이 구별되지 않고, 공교육기관과 가정교육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남아들의 교육은 유교 윤리를 행동화함에 필요한 지식과 태도를 배우는 동시에 과거 급제라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수신(修身)과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입체적 인간교육이다.

조선사회에서 교육 내용은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를 유교적 가치와 이념으로 삼았던 풍토 때문에 자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훈이나 집안 대대로 이어져야 할 덕목 등이 편액으로 새겨지기도 했으며, 그 자체가 인성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편액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대대손손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길 바라며, 그 공간에서 가훈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5월호는 농암 이현보가 어버이를 위해 지은 애일당愛日堂을 소개하고자 한다.



애일당(愛日堂) /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 58.0x124.0x7.9 / 해서(楷書)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애일당’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효성이 남달랐던 농암 이현보(1467~1555)선생이 46세(1512년, 중종 7) 때, 고향에서 가까운 영천군수로 부임하고, 94세의 부친(李欽)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金緝) 등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노친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아래의 애일당(50.0x84.5x7)과 같은 글씨다. 하나의 글씨를 가지고 두 개의 편액을 만들었다. 양자의 차이는 좌우공간의 크기가 다르다. 이 편액이 애일당(50.0x84.5x7)에 비하여 자간 공간이 넓고 따라서 편액의 길이가 더 길다. 두 편액이 같은 글씨인데도 느낌이 다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간이 좁은 애일당(50.0x84.5x7) 편액은 글씨가 부각되고 서로 관계가 밀접한 반면 공간이 더 큰 이 편액은 원거리에 보이고 관계가 소원하며 상대적으로 정적이 된다. 글씨는 주변 공간과 중요한 관계에 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글씨 쓰기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편액의 각서자가 간혹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애일’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효지(孝至)」에 “이 세상에서 오래 할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이르니, 효자는 하루하루를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고 한데서 뜻을 취하였다.



애일당(愛日堂) /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 50.0x84.5x7 / 해서(楷書)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자가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鬢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참찬 흠의 아들이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국문학계에서는 「어부가(漁父歌)」와 「농암가(聾岩歌)」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현보 초상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효자는 날을 아낀다[孝子愛日]


농암은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항상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원하여, 7, 8차례나 지방관이 되어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양친이 집에 계실 때는 채색 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서 화락하게 하고,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며 섬기는 정성에 시종 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안 고을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서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고, 그가 안동에 있을 때에는 노인들을 봉양하는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이때 양친을 모시어 안팎 연회의 주인으로 삼아, 농암이 자제의 예로 축수하는 잔을 받들어 올려 그 화락한 경사를 지극히 하니, 보는 자가 다 탄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고금에 드문 일이라 하였다.


영천이씨 농암종택 전경


애일당이 있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이다. 1548년(명종 3, 82세)에 중창과 조선 후기에 개축하였으나,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농암유적지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도산면 가송리로 이건하였다.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원래 분강(汾江) 기슭 귀먹바위[耳塞巖] 옆 자연 암석 위에 지어졌던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안동댐 건설로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해 놓았다. 197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고  :   한국의 편액 사이트

“건장한 91세의 조모, 수령인 아들에게 바른 다스림을 할 것을 훈계하다”

김령, 계암일록, 1608-08-24~

1608년 8월 24일, 오시쯤 박율보(朴栗甫)가 김령을 찾아왔다. 어제가 그의 조모 생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는 연세가 91세인데, 여전히 시력과 청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치아와 모발도 건강하다. 조모는 매번 수령 아들을 이렇게 훈계했다.
“아주 삼가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네가 잘못 다스리면 읍민들이 반드시 ‘저 늙은 할망구가 죽어야만 우리 수령이 떠날 텐데.’라고 할 것이니, 두렵지 않겠느냐.”
친절하고 간절한 뜻이 사람을 경복(敬服)하게 한다.

“백곡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꾸준함의 중요성을 배우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0-12-24 ~

1800년 12월 24일, 맑은 날씨였다. 오늘은 명동에 사는 백곡 할아버지가 류의목의 할아버지를 보러 왔다. 류의목이 인사를 올리자, 백곡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요즘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어떠한 책을 읽고 있는지 등등을 물으셨다. 류의목이 대답하자, 백곡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그리곤 류의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일을 할때는 그치지 말고 꾸준히 해야 성취가 있는 법이니라. 예전 계미년에 온 고을에 천연두가 번진 일이 있었다. 내가 천연두를 피하여 정동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마을을 터놓고 이야기할 벗도 하나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였는데, 무엇인가라도 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버들 수십 묶음을 얻어 새벽에 일어나 저물때까지 자리를 짰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서툴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를 다 만들 수 있었지. 이후에 이와 같이 여러 번 반복하였다. 나중에는 제법 속도도 붙었지. 이리하여 꽤 많은 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마침 식량이 다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만든 자리를 장에 가서 내다 팔아서 쌀과 보리를 얻었는데, 이 식량이 꽤 많아서 천연두가 가시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오히려 남는 것이 있을 정도였지. 또 그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서 삼을 꼬는데, 내가 보니 밤새 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삼을 꼬다 남은 자투리가 버려지고 빠진 것들이 꽤 많았다. 이리하여 내가 아침 나절에 일어나서 버려지고 빠진 것들을 줍기를 여러 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돌아갈 무렵에 모은 양을 보니 열 묶음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베틀로 중포를 짜니 세 필이나 되었다. 일이란 모두 이와 같아서, 하루하루 할 때는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꾸준히 해가다 보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하다’ 라고 감탄하셨다.

“공부를 게을리하다 할아버지께 지팡이로 맞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9-17 ~

1801년 9월 17일, 맑은 날이었다. 오늘 류의목은 『서경』 문후지명을 읽었다. 밤에 법산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 무척 반가웠다. 보통 밤시간에는 독서를 하며 공부하였는데, 오늘은 책 앞에 앉지 못하고 칼로 감을 깎으며 법산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평소부터 익살이 많던 법산 아저씨인지라, 이야기를 듣다가 곧 웃고 떠들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평소 할아버지는 이 시간이 되면 늘 밤을 틈타 몰래 엿들으며 류의목이 공부를 하는지 여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문틈으로 류의목의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자, 문 밖으로 류의목을 부르더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매질을 하였다. 아울러 법산 아저씨를 향해 크게 책망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엄준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이 웃고 떠들며 하는 말이 서경에 있는 내용이냐?’ 라며 심하게 질책하셨다. 질책을 받는 동안 법산 아저씨는 방안의 벽 모퉁이에 움츠리고 있으면서 떨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명을 들을 뿐이었다.
한참 훈계를 하신 할아버지가 떠나시자, 비로소 법산 아저씨와 류의목은 다시 자리에 낮을 수 있었다. 한참 혼인 난 후라 바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였다. 법산 아저씨는 류의목에게 매우 미안해 하였는데, 실상 류의목 역시 같이 재미나게 어울렸던 터라 법산 아저씨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법산 아저씨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내가 내일 어찌 사람들을 보겠는가’ 라며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였다. 류의목은 비록 할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큰 일은 없을 거라 법산 아저씨를 위로하였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공부 시간에 잡담을 나누는 본인에게 큰 실망을 느끼며 밀려드는 자책감에 민망하였다.

“6살 아이가 성리학을 묻다”

朱子大全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장흥효, 경당일기, 1624-01-07 ~

1624년 1월 7일, 제자들이 몇 년째 자신을 찾아오면서 혼자 하는 공부를 넘어 함께 하는 공부로 발전하였다. 무릇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든 것을 혼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다고 하여도 읽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이래 여러 유학자들이 주석서를 내었고 주자는 그것을 자기 관점으로 다시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
장흥효도 나름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황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점을 제자들에게 자주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사달(四達)이라고 불리는 이제 겨우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와서 묻기를 “땅은 어디에 붙어있습니까?”라고 하기에 그는 “하늘에 붙어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단순하게 땅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어린 것이 이런 질문을 하다니, 질문 자체가 놀라웠던 것이다.
아이는 장흥효의 답변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하늘은 어디 붙어있습니까?” 장흥효는 “땅에 붙어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일기에 총명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외손자인 이휘일로 이황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불리는 이현일의 형이 된다.

“책을 널어 말리다”

김광계, 매원일기,
1607-05-25 ~ 1607-05-27

1607년 5월 25일, 요 며칠 날씨가 계속 맑았다. 김광계는 오전에 기제사를 지낸 후에 방으로 들어가 방안 곳곳에 있던 서책을 모두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책 말리기를 하려는 것이다. 꺼내 온 책을 마루며 마당이며 곳곳에 펴서 널어놓기 시작하는데 덕유(김광업) 형이 와서 찾아 왔다. 덕유는 김광계가 펼쳐 놓은 책을 간간히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이틀 뒤에는 집에 있는 옛날 책을 모두 점검하였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라 얼룩이 지거나 벌레를 먹은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