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탄생함에 있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슬프고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젊은 시절과 비교하여 한 없이 나약해진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선인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선인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떠난다면 남겨진 후손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어 죽음이 두렵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막연한 두려운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유훈을 통해 후대에도 계승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자신이 닦은 학문을 유훈을 통해 후대에 계승하고자 했던 편액을 조명하고 선인의 일화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유훈이 담긴 ‘독서종자실’ 편액은 경상북도 성주군 한개마을에 건립한 응와종택 사랑채에 걸려있습니다. ‘독서종자’는 ‘글을 읽는 씨앗’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응와 이원조가 할아버지 이민겸의 자녀 교육과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학문을 기념하고 자손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대하며 건 편액입니다.
조선시대 웰-다잉(Well-Dying)이라는 주제를 맞이하여, 선조의 유훈 ‘독서종자’라는 가르침을 대대로 실천한 성산이씨 응와종가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경원사(景源祠) (출처: 성산이씨대종회)
경북 성주군은 성산이씨의 성역이자, 1천여 년 이상 터 잡고 살아온 곳입니다. 성주읍 경산동 324번지의 성산재(星山齋)에는 성산이씨 시조 이능일(李能一)의 위패를 모신 경원사(景源祠)가 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습니다. 고려 건국 후 태조왕건의 딸 정순공주와 결혼하여 임금의 사위가 되었고, 벼슬은 정1품에 해당하는 사공(司空)에 이르렀습니다. 성산재 안에는 그가 물을 마셨던 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개마을 전경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응와종택 북비(北扉) (출처: 경북나드리)
성주군에 위치하는 한개마을은 영남지방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이어 세 번째로 민속마을(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개마을은 1445년에 이우(李友, 1905~1950))가 처음 들어온 이래로 현재까지 성산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마을을 빛나게 한 인물은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 1713~1773)입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 위에 영조가 이석문에게 큰 돌을 올려놓으라고 지시하자 “신은 죽더라도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시를 어긴 이석문은 이튿날 곤장 50대를 맞고 벼슬을 강탈당한 뒤에 고향인 성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절의(節義)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노론 인사들이 집 앞을 지나자 남쪽으로 있던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북문은 북비(北扉)라 편액하고 이석문의 의리와 지조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만귀정(晩歸亭)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개마을 성산이씨 집안은 대가 끊이지 않고 가학을 이어가며 후손이 대성하길 원했습니다. 이석문 이후 응와 이원조에 이르기까지 두 아들이 양자로 나가고 양자로 들어와 두 집의 가계를 계승했습니다. 이원조도 큰 집의 대를 잇기 위해 이규진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할아버지 이민겸(李敏謙, 1736~1807)의 엄격한 자손 교육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스승과 제자가 돼 학문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 이규진(李奎鎭, 1763~1822)에 이어 이원조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바탕으로 아들과 손자들은 가족 간의 교육을 통해 집안 대대로 학문을 전승해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원조는 1809년에 18세로 문과에 급제해 좌부승지, 군자감 정, 병조 참판 등의 내직과 제주 목사, 경주 부윤 등의 외직을 거쳤습니다. 만년에는 성주군에 만귀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이처럼 이원조는 20대 초반부터 18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여년을 내직과 외직에서 종사하면서 수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서적을 남겼고 후학을 양성하며 강학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원조의 후손으로는 조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 있습니다. 그는 이원조의 학문과 성산이씨의 가학을 계승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일체 나가지 않았으며, 수많은 저술을 하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 노사 기정진, 녹문 임성주 등과 함께 조선 이학육대가(理學六大家)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원조의 손자 이관희(李觀熙, 1824~1892)가 있습니다. 그는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을 때 사람을 대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모두가 그의 덕에 감탄하여 ‘살아있는 부처[活佛]’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일화는 1894년 동학당이 마을을 약탈하자 몸소 그 소굴에 가서 의로써 무리들을 깨우치니 모두 감복하여 스스로 멈췄다고 합니다. 그 외 한주 이진상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1847~1916)가 있습니다. 그는 유림의 일원으로서 을사조약을 반대하다 옥고를 치렀고, 1913년부터는 중국에서 한국의 자주 독립운동을 역설하다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했습니다. 이처럼 선조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알리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채에 걸린 ‘독서종자실‘ (출처: 부산일보 2018.09.05)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 / 82.5x24.3 / 예서 / 성산이씨 응와종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아, 사람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계승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비로소 ‘종자(種子)’라는 이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서책에서 옛 도를 찾아 참으로 ‘독서(讀書)’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또한 각자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이에 기록하여 후손들을 기다린다.
출처: 「독서종자실기」, 『응와선생문집』
편액의 의미를 알면 선현들이 지향했던 삶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응와종택 사랑채에 걸린 ‘독서종자실’은 이원조의 유훈을 담은 편액으로, ‘독서종자’는 대대로 글을 읽는 씨앗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이민겸의 자녀 교육 및 가학을 기념하고 자손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대하며,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이를 받들어 학문 정진과 자녀 교육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죽음에 직면하면 크게 슬퍼하거나 암울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담담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이를 유훈으로 남겨 후대에 전승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응와 이원조는 선조의 가정교육에 감사함을 보답하는 동시에 후손에게 가법(家法)으로 오랫동안 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독서종자’라는 유훈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음을 막연한 두려운 대상으로 보지 않고 가학을 전승하는 태도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현재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누군가는 가깝게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멀게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받아들여야하는 숙명이기도 합니다. 응와 이원조가 죽음에 다다랐을 때 남긴 유훈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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