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집에서 양자로 들인 정훈이 관아에 들렀다. 새해 인사를 올리기 위해 다녀갔는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또 찾아온 것이다. 집안에 뭔가 긴한 일이 생긴건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산비야, 그간 잘 있었냐?”
“오빠, 왔어?”
정훈은 산비보다 한 살 위였다. 본래 파주에 사는 다섯째 삼촌네 둘째였는데, 오달현이 포천 현감으로 발령이 나는 통에 한양 집안을 건사할 남자가 필요해서 양자로 들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먼 걸음을 또 했을까?”
“바, 바람은 무슨. 귀여운 동생 얼굴이나 볼까 하고 온 거지.”
“우엑.”
“하하, 오라비가 온 게 그리 못마땅하냐?”
“못마땅하기는. 그렇게 귀여운 동생에게 뭐 좀 가져오긴 했을까?”
정훈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더니 소맷자락에 손을 넣어서 꼼지락대다가 책 한 권을 꺼냈다.
“요새 인기 있는 소설이라고 하더라. 너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해서 가져왔다. 그, 뭐냐, 네가 보낸 하녀도 재밌었다고 하더라.”
별 일이었다. 여인네들이나 보는 언문소설책을 가지고 오다니? 정훈의 표정이 어쩐지 즐거워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째 잠을 잘 못 잔 것처럼 눈 밑이 컴컴했다. 여행이라고는 해도 한양에서 천리 길도 아닌데 왜 저렇게 피곤에 절은 모습인지 이상했다.
“어디 아픈 거 아냐? 안색이 안 좋은데?”
“아프긴. 그냥 안 쉬고 내쳐왔더니 조금 피곤한 거뿐이야. 오라빈 아주 멀쩡하단다. 하지만 조금 낮잠이라도 자볼까.”
정훈은 얼른 얼굴을 돌리며 사랑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산비의 손에는 난데없이 생긴 손때 묻은 소설책 한 권이 있었다. 한양에 세책가라는 것이 생겨서 책을 빌려볼 수 있다고 하더니 거기서 빌려온 책인 듯했다.
“구, 운, 몽?”
문제는 1권도 아니고 2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꺼내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산비는 책갈피 사이에 어떤 단서라도 끼어있을까 싶어 쭉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의 여백이나 제일 뒷장에는 낙서 같은 것들도 있긴 했는데, 역시 책값이 비싸다느니, 3권을 빨리 내달라느니 같은 시시껍절한 글밖에 없었다.
『구운몽(필사본)』(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서 아쉬웠다. 채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채비는 동헌 안채 일을 하던 하녀였는데, 객사에 벽서를 붙인 일 때문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동갑내기고 아이도 똘똘해서 말도 잘 통했는데 맹랑한 장난을 쳤으니 그대로 곁에 둘 수가 없었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절 회초리로 때리고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채비는 다시는 관아에 오지 말라고 하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싸릿대를 열댓 개나 가지고 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안 돼.”
“아가씨, 제발 저를 어여삐 여겨 이번 한번만 눈감아주세요. 대신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때리셔도 돼요.”
산비가 회초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치워라. 난 사람이 사람 때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부리기도 하는데, 때리는 게 뭐 어때서요. 이렇게 쫓아내시는 것보단 그게 나아요. 이렇게 쫓겨나면 저는 아무데도 못 가요.”
채비의 말도 맞는 말이긴 했다. 관아에 못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들 궁금해 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채비가 사고 친 내용이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어쩌자고.”
산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딱히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 자신은 양반가에 태어나고, 채비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 뿐이다.
“그럼 내가 널 한양 우리 집의 하녀로 쓰마.”
“네?”
채비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대신 할 일이 하나 있다.”
산비는 지필묵을 가져와 채비 앞에 놓고 말했다.
“네가 한 일을 여기 적어라. 객사 대문에 벽서를 붙였다는 자백서를 쓰란 말이다.”
“이것만 쓰면 됩니까?”
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비는 얼른 글을 썼다. 산비는 채비의 글 옆에 채비의 손을 대게 한 뒤에 손의 윤곽을 따라 붓으로 선을 그렸다. 도장이 없는 평민의 경우에 글쓴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손의 모습을 대고 그리게 한다.
문방사우가 들어 있는 상자(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산비는 본가에 대해서 이것저것 잘 일러준 뒤에 새해 인사를 왔던 정훈이 돌아가는 길에 채비를 따라가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뜻밖에도 채비가 정훈과 사이가 괜찮은 모양이었다. 자기가 읽던 책을 권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채비가 언문 소설을 보며 노닥거리다가 책을 빼앗기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야, 나쁜 쪽은 아닐 거라고 산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채비는 똑똑한 아이다. 주인과 사이가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산비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에는 자신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던가.
어찌 되었든 정훈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니 부디 잘 지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산비는 정훈을 다시 떠올리곤 안색이 안 좋으니 뭔가 만들어서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주(官廚, 관청의 주방)로 가보니 아직 때가 일러서 아무 준비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용무가 계신가요?”
부뚜막 쪽에 있던 하인 하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본가에서 오라비가 왔는데, 몸이 부실해 보여 군것질할만한 것이 있을까 와보았다.”
하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요기가 될 만한 것은 없는데, 설에 숙수(熟手, 전문 요리사)가 와서 만들어놓은 유과, 약과 등이 있습니다. 이거로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차려서 사랑으로 가져오도록 하게.”
지시를 내려놓고 산비는 바로 사랑으로 갔다. 채비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물어보고 본가의 일도 몇 가지 챙겨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댓돌을 보니 허름한 여자 신도 한 켤레가 있었다. 관주에서 보낸 간식이 먼저 도착했을까? 산비가 딱히 빨리 걸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길이 외길이라 하녀가 간식을 들고 지나쳐갔다면 못 보았을 리 없을 것이다.
소리가 작아서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들리질 않았지만 높낮이로 보나 신발로 보나 여자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산비는 문밖에서 소리를 냈다.
“오빠, 산비 왔어.”
“어? 어! 어, 잠시만.”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안에서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뭔가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 들어간다.”
“자, 잠깐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결국에는 체념한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가니 과연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구석으로 몸을 돌리고 있는데 장옷이 없는 걸 보니 민가의 여자인 것 같았다.
“손님이 있었네. 그런 줄도 모르고.”
뻔히 알았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아, 음음, 저기 손님은 아니고, 저기 뭐냐하면… 아참, 글패야. 놀음패, 사당패 하는 그런 것처럼 글패.”
무슨 예를 들어도 놀음패, 사당패람. 산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글패?”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야.”
“책을 읽어줘? 오빠는 책 못 읽어?”
“읽기야 하지. 하지만 실감나게 잘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다고.”
“실감나게?”
“그렇지. 이게 소설 아니냐. 그러니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감정을 넣어서 착착 읽어주면 그, 그게 그러니까 아주 듣기 좋고, 내용도 귀에 팍팍 들어오고 그런다 이거야.”
“정말?”
산비는 다시 한 번 구석에 몸을 돌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명옷을 입고 있다. 장사를 하는 거라면 조금은 더 괜찮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책 읽어주는 여인, 글패(출처: MBC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2019)
“그렇게 좋은 거면 나도 한번 들어보고 싶네. 어디 한번 읽던 거 계속 읽어봐라.”
“어, 어, 그게… 아참, 지금 시간이 다 됐어. 이게 시간제로 하는 일이거든.”
산비가 씩 웃었다.
“괜찮아. 나도 돈 있어. 품삯은 얼마나 되는데?”
산비는 여자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잘 읽으면 행하(行下, 팁)도 따로 챙겨주마. 어서 읽어 보거라. 책은 가지고 있는 거겠지?”
“어, 어, 그럼 뭐… 한, 한번 읽어보려무나.”
결국은 정훈도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낭독을 허락했다. 여자는 부스럭 거리며 책을 꺼내드는가 하더니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컬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오나 뒷간을 좀 다녀왔으면 합니다.”
산비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목소리가 은쟁반에 구슬 굴러갈 줄 알았더니, 완전 거칠기 이를 데가 없구나. 그런 목소리로 낭독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더냐?”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정훈이 얼른 변명처럼 말했다.
“오늘 아주 격정적으로 읽어서 목이 좀 쉰 모양이네. 어서 뒷간에 다녀와라.”
여자는 몸도 돌리지 않고 벽을 보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더니 스르르 방문을 빠져나갔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산비도 몸을 일으켰다.
“나도 돈 좀 가지러 다녀올게.”
정훈의 눈이 반짝했다.
“같이 갈까? 돈은 어디에 두고 있어?”
“내 돈이야 내 방에 있지.”
“아, 그렇지. 네 돈.”
정훈의 목소리에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네 방에 책도 좀 있지?”
“당연히 있지. 그건 왜…”
산비는 그 순간 머리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사랑방을 뛰어나와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마침 자기 방에서 나오는 글패 여인을 딱 붙잡을 수 있었다.
“너!”
산비가 헐떡이며 말했다.
“왜 돌아온 거니, 채비야.”
손을 뿌리치려고 하던 글패 여인은 그 말에 맥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고개를 드는데 조금 화장이 바뀌긴 했지만 얼굴을 감출 정도는 아닌, 하녀 채비가 거기 있었다.
“잘 계셨어요, 아가씨.”
“찾았니?”
“네?”
“네가 쓴 자백서 찾아내려고 돌아온 거잖아? 찾았니?”
“아니에요, 그런 거.”
채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가씨는 진짜 너무 머리가 좋으시네요. 그것도 찾았으면 했어요. 하지만 그거 찾으려고 온 건 아니에요.”
“그럼 뭘 훔치려고 여길 다시 온 거야?”
“훔치는 건… 맞긴 하지만, 저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고… 정훈 도련님을 위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거 정말 절대 비밀 지켜주셔야 해요. 그럼 말씀 드릴게요.”
산비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네가 나랑 협상을 하겠다는 거야?”
“아가씨!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정훈 도련님이 큰일 났어요.”
채비가 쨍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박하다가 빚을 크게 졌어요!”
“뭐? 도박?”
“집안에 어른이 안 계시니, 어린 도련님이 그만 도박에 재미를 붙여서 결국 식리인(殖利人, 고리대금업자)에게 빚까지 냈어요.”
도박하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산비가 어질어질해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식리인은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다. 빚을 갚지 못하면 악랄한 방법으로 재산을 차지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어쩌다가 그런 곳에까지 손을 벌렸단 말인지. 그러니 그게 걱정이 되어서 잠을 잘 못 잔 덕에 저렇게 눈 밑에 그늘까지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걸 어찌 해결하려고 여길 온 것이냐?”
채비가 우물쭈물 말을 못했다. 산비가 엄하게 다그치자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사또 나리가 뇌물을 바친 장부가 있을 것이니, 그걸 가지고 뇌물을 받은 나리들에게서 돈을 좀 받아 내볼까 했죠.”
산비는 더욱 어지러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그걸 생각이라고 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협박을 해도 그 상대가 달랐을 것이다. 산비가 채비의 어깨를 붙들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는 무슨 나리. 그 장부를 가지고 아버지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겠지?”
채비가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이 아가씨는 속일 도리가 없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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