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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망허산의 호랑이

망허촌에 호환이 났다. 망허산을 넘어오던 소금 장수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소금 짐만 고갯마루에 떨어져 있어서 다들 놀랐잖아. 그런데 익재 아저씨가 향촌 갔다 오다가 썩는 냄새를 맡고 뭔가 싶어 가봤다가 반쯤 뜯어먹힌 시체를 발견했다지 뭐야?”

세책방 집 목금이 소식을 듣자마자 친구인 정 진사 댁 백이에게 달려와 종알종알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맹호도(猛虎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넌 그런 이야기 무섭지도 않냐?”

“이야기가 무서울 건 뭐 있어? 호랑이랑 만나면 무서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강심장이야, 강심장.”

“그게 문제가 아니야. 거기 시체 옆에 누군지도 모를 백골들이 널려 있었대!”

백이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무, 무서워! 그만 이야기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제 마을에 무슨 일 생기는지도 말 안 할게.”

백이는 조용히 귀에서 손을 내렸다.

“무슨 일?”

“안 듣는다면서?”

“빨리 말 안 하면 간지럼 태운다?”

“와, 이 사람 보소. 내 유일한 약점을 건드리겠다고?”

“어서!”

백이가 곧 간지럼을 태울 듯이 양손을 치켜올리자 목금이는 벌써 뒤로 나자빠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그만! 말해줄게. 착호군을 불러올 거래.”

“착호군이 뭐야?”

“호랑이를 잡는 군사야. 사또 나리가 감영에 말해서 병사들을 불러올 거라네.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은 그거 못마땅한가 봐. 착호군이 오면 마을 사람들한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해서 되게 힘들어진대.”

“그래도 우리 고을을 위해서 호랑이를 잡아주러 오는 거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것참 큰일이네. 착호군이 오기 전에 호랑이가 떠나줬으면 좋겠는데.”

백이의 말에 목금이 손뼉을 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중 착호군 출신의 영규의 모습 (출처: 넷플릭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호랑이가 떠나면 착호군이 올 필요도 없고. 한번 그렇게 해볼까?”

“뭐야?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

“안 될 것도 없어. 옛날에 호랑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가능할 거야.”

백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군데?”

“강감찬 장군님.”

“강감찬? 그게 누군데?”

목금이 혀를 찼다.

“우리나라에 외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다섯 분 있는데, 을지문덕은 수양제의 백만대군을 무찔렀고, 안시성 성주는 당 태종을 물리쳤고, 강감찬은 거란을 귀주에서 물리쳤지. 또 김윤후는 몽골 장군 살례탑을 쏘아죽이고, 박의는 청나라 노이합적(누르하치, 청태조)의 사위 양고리를 쏘아죽였어.”


강감찬 표준영정 (출처: 문화유산포털)


“늘 말하지만 넌 참 대단해. 그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책 좀 보라니깐. 우리 집에서 빌려보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귀찮아. 난 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래서 강감찬 장군님이 호랑이를 부렸다는 거야?”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감찬 장군은 원래 하늘의 문곡성이었는데 우리나라에 온 거래.”

“잠깐만! 문곡성은 문신의 별인데 왜 장군님이 문곡성이야?”

“오호라, 너도 그걸 아는구나. 원래 강감찬은 문신이야. 장원급제한 사람이거든.”

“장원급제! 그런데 왜 장군이야?”

“문무가 다 뛰어나서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장군으로 활약했으니까 그렇지.”

“굉장하네.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나가면 장수요, 들어오면 재상이라 했는데 강감찬이 딱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어쩌다 호랑이를 부리게 된 거래?”

“강감찬이 한양 판관으로 있을 때 호랑이가 엄청 많았대.”

“한양이면 임금님 계신 도성인데 거기에 호랑이가 많았다고?”

목금이 혀를 끌끌 찼다.

“저기요, 백이 낭자. 그때는 고려 시대잖아. 도성은 송도, 그러니까 개성이었지. 그때 한양은 아직 작은 고을이었나 봐. 호환이 심하다는 말을 들은 강감찬은 아전을 불러서 편지 한 통을 주고 북문 밖 골짜기를 나가서 바위에 앉은 노스님에게 전하라고 했대. 그러자 편지를 읽어본 노스님이 아전을 따라 관아로 들어왔어.”

“호랑이를 쫓아내라는데 웬 스님을 불렀대?”

“들어봐. 노스님이 들어오자 강감찬은 호통을 쳤어. ‘너는 짐승 중의 영물인데 감히 사람을 해치다니 어쩐 일이냐! 너희 무리를 데리고 이곳을 속히 떠나도록 하라!’ 그런 거야.”

“그 노스님이 무슨 재주로? 아니, 노스님이 짐승 중의 영물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그게 이상해서 그렇게 강감찬에게 물었어. 그러자 강감찬이 다시 노스님에게 말했어. ‘어서 네 본모습을 보여라.’ 그러자 노스님이 글쎄, 순식간에 호랑이로 변한 거야. 강감찬이 그만하라고 하자 다시 사람 모습이 되었어.”

백이가 혀를 내둘렀다. 목금은 계속 이야기를 했다.

“그다음 날 아침에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수십 마리 호랑이를 끌고 강을 건너 사라졌다는 거지. 그 뒤에는 한양에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대.”

“그런데 옛날이야기잖아. 강감찬이 지금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호랑이를 떠나가게 할 수 있어?”

“다 방법이 있지. 강감찬은 문곡성의 화신이었다고 했잖아. 문곡성은 북두칠성 중 네 번째 별이야. 그러니까 별의 힘으로 호랑이를 부릴 수 있다는 거지.”

“그럼 문곡성을 내려오게 하는 거야? 그럴 수가 있어?”

목금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정도의 힘은 없어. 대신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같이 가볼래?”

“호랑이한테 가자고? 안 돼, 안 돼. 그건 무리야.”

“에이, 나도 호랑이한텐 안 가. 강감찬도 호랑이 앞에 간 건 아니잖아. 그냥 망허정까지만 가면 돼.”

백이는 주저하다가 결국 목금이를 따라나섰다. 한참 망허정을 향해 산길을 올라가다가 백이가 문득 생각난 듯이 목금이에게 물었다.

“이미 시간이 늦었는데, 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지?”

“아니, 없어. 해가 져야 별이 보이잖아.”

“뭐야? 안 돼! 해지면 내려가기도 힘들단 말야.”

“괜찮아. 그럴 줄 알고 우리 불돌이도 챙겨왔다고.”

목금이 들고 가던 바구니 속에서 양수지조(陽燧之鳥) 불돌이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밤길에 돌아갈 때는 불을 뿜어서 앞길을 밝혀줄 것이었다.

산고개에 있는 망허정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목금이는 망허정 안에 28개의 초를 원형으로 둘러놓았다. 그리고 원 안에 일곱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이게 다 뭐야?”

“스물여덟 개의 초는 하늘에 있는 28 별자리를 가리키는 거야. 태양이 도는 길을 따라 스물여덟 별자리가 있거든. 그리고 원 안에 있는 동그라미는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거야. 북두칠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고 기원을 올리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거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백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북두칠성이라고? 아까 문곡성을 부르는 건 안 된다면서?”

“북두칠성을 부르려고 하는 건 아니야.”

그러면서 목금이 바구니에서 불돌이를 꺼냈다. 불돌이는 신이 난 듯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옛날 제갈공명은 칠성단을 쌓아서 동남풍을 불렀고, 북두칠성을 따라 걷는 보강답두(步罡踏斗)로 수명을 연장하고자 했었지. 내가 하려는 건 하늘을 지키는 개, 천구(天狗)를 부르는 거야.”

“천구가 뭐야?”

“항아리 같은 머리를 가지고 꼬리는 석 자에 불타는 몸을 지니고 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개야. 사실은 별이지. 천구를 부르면 호랑이는 놀라서 이 산을 떠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때였다. 송낙을 쓰고 진회색 장삼을 걸친 노승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나무아미타불, 낭자분들이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왜 있는 것이오?”

불돌이가 후다닥 바구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희는 호랑이 때문에 왔어요.”

백이가 미처 목금이 말리기도 전에 대답해 버렸다.

“오호라, 호랑이 때문에? 그 ‘보강답두 이십팔수진’은 뭔가 불러낼 생각으로 만든 것이오?”

이번에도 백이가 냉큼 대답했다.

“천구를 부를 거예요. 하늘에서 불개가 내려오면 멋지겠죠?”

노승은 석장을 정자 기둥에 기대고 걸터앉았다.

“나무 관세음보살, 그런 일을 하면 아니 되오.”

이번에는 목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안국병법』에 보면 천구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천하에 큰 병란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소. 호랑이 몰아내려다 나라에 난리가 나면 그게 더 큰 일 아니겠소?”

“그게 정말이에요?”

“노승이 뭘 알겠소마는, 신라 혜공왕 때 천구 셋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천지가 진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하더구려.”

“머리가 항아리 같고 꼬리가 석 자나 되는?”

“나무아미타불, 바로 그렇소. 그때 96명의 대신들이 서로 싸우는 천하대란이 벌어져서 피가 강처럼 흘렀소이다. 낭자분들이 또 그런 일을 보고 싶은 거요?”

“그건 아니지만,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이 호랑이들을 부린 게 별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서...”

노승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감찬 장군이라, 그 양반은 문곡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지. 그렇다고 그 별의 힘으로 호랑이를 부린 건 아니오. 그렇게 힘으로 억누르려 했다면 호랑이들도 가만있지 않고 대판 싸웠을 것 아니겠소? 호랑이가 뭐가 두려워서 강 장군의 말에 따라 조용히 떠나겠소?”

백이가 물었다.

“그럼 호랑이들은 왜 떠난 거예요?”

“호랑이는 자연의 일부지. 본래 호랑이와 인간은 서로 말할 수 없는 사이라오. 비바람이 쳐서 사람을 해친다고 해도 비바람과 서로 말할 수는 없지 않소? 호랑이도 그와 같소. 호랑이는 그저 배가 고파서 사냥을 할 뿐, 선악을 구분하지는 않는다오.”

노승의 말이 끝나자 목금이 말했다.

“그렇지만 호랑이가 사람들을 구해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는 일도 많던데요?”

“사람 중에도 뛰어난 이가 있듯이 호랑이 중에도 뛰어난 영물이 있는 법이라오. 그런 뛰어난 것들끼리는 때로 서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이라오. 강 장군도 언젠가 그런 영물 호랑이와 교분을 텄을 것이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단지 한 사람의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사람의 원한은 단지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에 동정하는 모든 사람의 원한이 될 수 있어요.”

“나무 관세음보살, 낭자의 말씀이 맞소. 그렇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거라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호랑이들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지 않소. 결국 그래서 호랑이는 천하를 지배할 수 없는 것이라오.”

“하지만 영물인 호랑이는 무리를 이끌 수 있는 거겠죠? 강감찬 장군의 말을 들어준 호랑이처럼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오.”

목금은 백이를 툭툭 치더니 일어나 노승에게 큰절을 올렸다. 백이도 얼떨결에 같이 절을 올렸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의 호랑이들은 스님께서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노승이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내가 호랑이라는 건 대체 어찌 알았소?”

목금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불돌이가 놀라서 숨는 걸 보고 알았어요.”

“선재로다. 하지만 연기(緣起)의 법은 홀로 있지 않으니 무엇을 이 몸에게 해줄 수 있으리오?”

목금이 씩 웃음을 머금었다.

“아까 『안국병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책은 신라 때 만들어진 거죠. 실제로 보신 적은 없으실 것 같은데요?”

노승의 얼굴에 처음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그 책을?”

“우리 집엔 없는 책이 없지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그 책을 선물해드릴게요.”

노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망허산에 호랑이의 자취가 사라졌다. 물론 착호군이 올 일도 없어져 버렸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 (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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