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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 저자인터뷰

이상호,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개발팀의 이상호팀장님께서는 미시사적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살인사건을 다각도에서 재구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일상사의 지평을 넓히신 팀장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Q.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주제로 선택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시적인 사건을 복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의 양입니다. 지금도 미시사 연구의 표본처럼 알려져 있는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역시 당시 남아 있던 재판 기록들을 모아 그 사건을 그대로 복원했던 것이죠. 1751년 두 명의 기찰군관이 살해당했던 이 사건 역시 경상감사가 왕에게 올린 보고서가 매우 자세하게 남아 있었고, 또 관련 연구들이 충분해서 사건에 대한 복원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관련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선택했어요.


Q. ‘안음현 살인사건’이 기록된 여러 자료 중, 가장 인상 깊은 기록과 그것이 왜 인상 깊으셨나요?


이 책은 당시 경상감사였던 조재호(趙載浩)가 중앙정부에 올린 살인사건 보고서[장계]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이 장계는 조재호가 경상감사로 내려오면서 매일을 기록했던 『영영일기』와 함께 편집되어 있는 『영영장계등록』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사건 전체는 이 기록을 가지고 재구성을 했는데요. 특히 이 장계의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검시의 기록이에요. 아마 당시 시장을 비롯한 다양한 기록도 올려 졌을 텐데, 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장계에는 아마 정리된 내용일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세하게 시신을 검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인을 밝히려 했는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책에서는 가장 읽기 지겨운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선의 형사사건을 얼마나 신중하고 정확하게 하려 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요.


조선시대 시체 검안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Q. 조선시대 법의학에 대한 기존 연구들과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기존의 법의학 연구들은 대부분 조선의 ‘법의학 역사’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주로 세종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법의학 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의 사건 속에서 법의학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특히 살인사건의 경우 법의학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전후에서 사건을 다루고 이를 기반으로 한 판결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과정을 다루려고 하면 하나의 사건만 가지고 세밀하게 들여다 보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법의학 연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하나의 사건 속에서 법의학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요. 큰 틀에서 보면 조선시대 형사사건의 처리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에요.


Q. 이 책에서 자세히 나오는 형사시스템 중 쓰기에 가장 까다롭고, 어려웠던 내용은 어느 부분이셨나요? (형벌제도, 사법절차, 검시기록 등)


사실 제가 이쪽 전공이 아니어서 어느 하나도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는데요. 그래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보고, 선행 연구들을 통해 전체를 이해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형벌제도나 사법절차, 검시기록 등 다양한 관련 연구들을 확인해서 그 원칙과 적용이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공부하는 게 필요했어요. 그런데 정말 어려웠던 것은 이러한 원칙과 적용이 안음현 살인사건 내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지를 상상하고 이를 머리로 그릴 수 있도록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었죠. 신장만 해도 소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하려면 누가 읽어도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죠. 더불어 검시에 사용되는 자나 검시 순서, 그들이 들고 있는 척도는 어떠한 것인지 등도 동일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요. 배율을 높여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집필하는 게 제일 어려웠던 이유에요.


Q. 사인(死因)과 관련한 법의학적 소견, 의학적 지식과 법학적 지식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관련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법의학적 소견은 당시 기록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기록 역시 『신주무원록』에 따라 시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단 그 기록 자체를 신뢰해야 했고요. 다만 그들의 사인을 좀 더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의학을 하시는 분들의 자문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계에 시장을 요약한 내용을 중심으로 여쭈어 보았더니, 의외로 당시 초검관과 복검관이 내렸던 결론이나 현대 의학을 전공했던 분들이 내리는 결론이 비슷했어요.


Q. 후속 작품으로 생각하는 조선시대 일상사는 어떤 주제들이 있을까요?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이 서비스 하는 〈스토리테마파크〉는 일상사 기록 중심이다 보니, 이미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죠. 그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좀 더 배율을 높일 수 있는 주제들을 다루고 싶은데요. 특히 이번 집필 이후 몇몇 전문가들 역시 〈스토리테마파크〉 기록을 중심으로 집필을 계획하고 계시는데요. 관련 주제들을 보면 ‘세곡선 난파사건’이나 ‘무관들의 일상’, ‘만인소 운동’, ‘임진왜란 때 일상인들의 삶’, ‘선비들의 여행’, ‘투장 사건’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Q. 특별히 이 책을 권하고픈 독자가 있다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나요?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몰랐던 조선의 일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선시대 일상인들의 삶을 통해 현대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특히 이 책은 〈스토리테마파크〉도 그런 것처럼, 창작자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한 것이에요. 사건 전말 자체를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제공해 주면, 창작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특기인 새로운 스토리와 갈등 구조를 얹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요. 이 책은 팩트를 기반으로 하지만, 창작자들은 이러한 세부적인 지식에 바탕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극을 준비하는 창작자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양반 부인의 상을 치른 비부(婢夫)”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3-10-08 ~ 1773-10-10
겨울로 접어드는 10월, 하천(下川)의 족증조모 이씨(李氏)가 별세하였다. 올해 80세가 되었는데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식이 없이 쓸쓸하게 살고 있었고, 결국 임종을 한 자식도 하나 없었다. 친족들은 모두 원래 자식이 해야 하는 발상(發喪)은 누가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비부(婢夫) 복삼(福三)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 상차(喪次)에서 망자를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복삼이는 세 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를 불쌍하게 여긴 이씨 부인이 그를 거둬 키웠는데, 복삼이는 길러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다하기 위해 상차에 자리하여 곡을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천한 비부가 양반 부인의 장례에서 상주 노릇을 한다며 끌어내려하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는 복삼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천성이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복삼이는 신분이 달랐기에 이씨 부인의 수양아들로 인정받을 수 없었고, 부모를 잃은 자식이 입는 상복도 입을 수가 없었다.

“가친께서 돌아가시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5-05-13

금난수(琴蘭秀)의 부친인 금헌은 1575년 올해 정월부터 심기가 고르지 못하였다. 식사도 점점 양이 줄고 가래와 천식이 아주 심하였는데, 이러한 증세가 오래도록 나아지지 않는 염려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차도가 없이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자 금난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부친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에서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예서에서는 임종이 가까워지면 천거정침(遷居正寢)이라고 하여 병이 깊어진 환자를 정침으로 옮기도록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금난수도 이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었다.
금난수는 임종에 대비해 부친의 처소를 안방으로 옮겼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히 부친이 쾌차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금헌은 5월 13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세상을 떠났다. 오랜 병환 기간이 있었기에 부친이 조만간 먼 길을 떠나실 것을 예감했음에도 애통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금난수와 가족들은 그 애통함에 연거푸 곡(哭)하였다. 집안을 이끌어야 했던 금난수는 정신을 차리고 부친께서 다시 살아나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초혼(招魂)을 진행하였다. 가친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간 자가 부친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소리가 금난수의 귀에 들렸다. 금난수는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시신을 살폈으나 깨어나시지 못했다. 이제는 금난수도 부친이 돌아가셨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난수는 주상(主喪)이 되었고, 금난수의 처 횡성 조씨는 주부(主婦)가 되었다. 금난수는 집안사람들 중 주상인 자신을 도와 상사(喪事)의 일을 처리할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과 사서(司書, 조문객의 출입 등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사화(司貨, 초상에 쓸 물건 또는 재물의 출납 등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를 정한 다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아내가 병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3-19 ~ 1643-08-18

1643년 봄부터 김광계의 아내는 병이 깊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먹고 마시지도 못하였다. 김광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 또 김광계가 존경하고 따르던 재종숙의 대상이 다가오자, 김광계는 아끼는 이를 또 잃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걱정하였다. 더욱이 아내가 병에 걸려 있어 부정이 탈까 싶어 재종숙의 궤연에 전을 올릴 수도 없었다. 여러모로 한스러운 상황이었다.
김광계는 종 무생(戌生)을 용성(龍城)에 보내 약을 처방받아 오게 하였는데, 의원은 김광계의 아내의 병세를 듣고 가감승마갈근탕(加減升麻葛根湯)을 처방하였다. 이 약은 신열을 내리고, 입이 헐고 목구멍이 아픈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다. 김광계는 걱정도 되고, 자신의 노구도 병을 옮을까 싶어 강재(江齋)로 나와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동생 김광악, 김광실, 김광보, 조카 김민 등 여러 사람이 김광계를 매일같이 찾아와 아내의 병세를 전하였는데,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들이었다.

“하회누이의 부고가 오다”

최흥원, 역중일기, 1756-05-06 ~

1756년 5월 6일. 최흥원은 아침 날이 밝기 전부터 서둘러 10말의 쌀과 5냥의 돈, 2마리 닭과 함께 5홉의 꿀을 종 한선이를 시켜 하회마을로 가져가도록 하였다. 며칠 전 하회마을로부터 걱정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를 가진 최흥원의 누이가 전염병에 걸려 유산을 하였다는 것이다. 유산뿐 아니라 몸 상태가 매우 위중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이때 까지만 해도 누이가 위기를 잘 넘기고 일어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재낭이의 지아비를 하회마을로 보내어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누이의 증세가 심각해져 그사이에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최흥원은 당장이라도 누이의 증세를 확인하기 위해 하회로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으나, 최흥원 본인도 병중인 상황에서 함부로 길을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오전에 한선이를 보내 여러 물건을 보내고, 누이의 증세를 다시 확인해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후 무렵, 한선이가 돌아오기도 전에 하회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결국, 누이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상에, 이것이 무슨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매우 애통하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최흥원은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께는 대체 어찌 말씀드린단 말인가! 병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데, 이제 딸자식의 죽음까지 듣는다면 어머니께서 차마 견딜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최흥원은 소식을 전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언제까지나 숨길 수도 없는 법. 최흥원은 이윽고 결심하고 어머니 방의 문을 두드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누이의 부고를 전하던 최흥원은 어머니와 함께 통곡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 병으로 딸을 잃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2-05-20 ~ 1592-06-03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근심이 많은 때에, 전염병까지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피난을 온 외지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모두 씻고 먹는 것 역시 부실한 만큼 전염병이 퍼지기도 쉬웠다. 금난수의 가족이 피난하고 있는 고산(孤山)에서도 병자가 나왔다. 이광욱과 혼인한 딸 계종(季從)이 앓기 시작한 것이다. 사위인 이광욱은 이때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모를 챙기기 위해서인지 따로 있었는데, 부인이 심하게 앓는다는 소식에 고산으로 와서 부인의 병세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약재를 구하기도 어려운 흉흉한 상황이었다. 계종은 약 한번 변변히 써 보지 못하고 남편이 돌아간 다음날 저물 때쯤 허망하게 사망하였다. 돌아갔던 남편이 황망하여 바로 찾아왔으나 이미 부인의 시신은 차게 식은 뒤였다. 전쟁 중이라 시신을 시댁으로 보내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금난수는 몸소 딸의 장례를 지휘하였다. 사위와 사돈, 그리고 형제인 금경과 금업, 부모인 금난수와 그의 부인만 참여한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가 끝난 뒤, 아들들은 자신의 부인이 있는 곳으로, 사위는 자신의 부모가 있는 곳으로, 모두 각자의 집안을 챙기러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금난수는 딸의 관을 뗏목에 실어 강을 건너게 한 뒤 소를 빌려 장지까지 운반하였다. 쓸쓸한 장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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