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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식산, 은거의 삶을 말하다

〈식산, 은거의 삶을 말하다〉 포스터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 특별전 〈식산, 은거의 삶을 말하다〉를 전시중입니다. 이번 전시는 연안이씨 식산문중이 기탁한 자료를 선별하여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전시실 전경



식산문중은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 연안이씨의 영남 입향조인 조선 후기의 거유(巨儒) 식산 이만부(李萬敷, 1664~1732) 선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만부 선생의 조부 근곡 이관징(李觀徵) 선생은 조선 숙종시대 대표적인 정치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부친 박천 이옥(李沃) 선생은 미수 허목(許穆)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근기 남임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장가였습니다.



식산정사(息山精舍) 현판



17세기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잦은 환국으로 극심히 혼란스러웠고, 사회적으로도 대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이 심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정계에 진출하여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지, 산림에 기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할 것인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이만부 선생의 조부와 부친이 전자를 추구하였다면, 이만부 선생은 과거를 포기하고 상주에 은거하여 후자에 뜻을 두었습니다. 이만부는 상주 노곡에 식산정사(息山精舍)를 짓고 원림을 경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펼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거문고를 뜯기도 하는 소박한 일상 속에서 '쉼'을 즐겼습니다.



「식산정사도(息山精舍圖)」 중 간지정(艮止亭)



이만부 선생의 호(號)에는 '쉬다', '숨 쉬다'를 뜻하는 '식(息)'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만부 선생은 자연과 더불어 노래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숨 쉬었고, 절도 있는 일상을 살면서도 숨 쉬듯 자연스러운 학문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학자의 삶에 충실했던 이만부 선생은 1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서법과 예술 활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식산집(息山集)』


『식산당전법(息山堂篆法)』



이만부 선생의 후예들은 선조의 정신을 가학으로 이어나갔습니다. 손자 강재 이승연과 증손자 임하 이경유, 후손 반농재 이병연, 현문 이건기를 비롯한 뛰어난 후학들은 이만부 선생의 널리 공부하고 세밀하게 검증하는 공부법을 계승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학과 수양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술과 수준 높은 예술 활동을 펼치며 상주지역의 문화를 고양시켰습니다.



『반농재유고(半聾齋遺稿)』, 이병연(李秉延)의 자화상


『금오시첩(金吾詩帖)』, 이건기의 의금부 계회도(契會圖)



이번 전시는 2022년 6월 26일까지 유교문화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Ⅱ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 속에서 휴식하듯이, 편안히 숨 쉬듯이 식산문중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함께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한가히 거처하는 즐거움은 별다른 일이 없다.
일찍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하고 거처하는 곳에 물을 뿌려 쓸고
아침 해가 뜨면 방안에 들어와 화로를 피우고
안석을 바르게 정돈하고 책을 펼쳐 반복하여 침잠하면서
옛 사람들의 마음 쓴 곳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즐거움이 있으니,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고 혼자서 묵묵히 알 따름이다.

『식산집』「한거지락(閑居之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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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리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유교문화박물관,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

작호도(鵲虎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남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수마트라·중국·만주·한국·시베리아 흑룡강 연안에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나 일본·대만 등에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 이야기도 이러한 분포지역에 따라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이나 궁궐 안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신비의 동물로 여겨진 호랑이”

〈호랑이와 매〉(출처: 고판화 박물관) 권상일, 청대일기, 1753-06-06

1753년 6월 6일, 권상일은 어느 날 이웃 마을의 소식을 들었다. 상주의 인근 고을이었던 용궁현의 월오리라는 곳에 호랑이가 출현했던 것이다. 마을 앞산에 조그마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호랑이가 출현하여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 호랑이가 나타나게 되면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몸을 피하지 않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호랑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기한 대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양반들에게야 호랑이는 백성을 위해서 해로운 대상이므로 당연히 없애야 하는 포호(捕虎)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호랑이는 신비의 동물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호랑이를 보러온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물려서 부상을 입은 자가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권상일이 잘 알고 지내던 안필세도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이었던 권상일에게 호랑이는 당연히 처치해야 할 동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사실에 너무 놀라고 그 피해 사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호랑이(출처: 픽사베이) 오희문, 쇄미록, 1597-03-07 ~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원수를 갚은 호랑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5-27 ~

노상추가 사는 선산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사는 남 씨 일가와 심 씨 일가가 호환(虎患)을 입었다는 소식이 선산 일대에 쫙 퍼졌다. 노상추도 전해 들은 이 소식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남 씨네 집 아들과 심 씨네 집 아들은 어느 날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는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예민했다. 두 사람은 포효하는 호랑이로부터 달아나면서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죽였다. 큰 호랑이는 죽이지 못했지만, 마을에서는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이 천행이라며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로부터 달아난 날로부터 나흘 후, 호랑이가 남 씨‧심 씨네 집이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는 먼저 심 씨의 집에 들어가 외양간에 묶여 있던 큰 소를 죽였다. 그리고 죽인 소를 먹는 대신 온 집안을 들쑤시며 간장 항아리와 가마솥 등의 물건을 모두 깨부쉈다. 그 뒤에는 남 씨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있던 남 씨의 처와 며느리,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을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승려 한 명과 호랑이를 죽이러 온 포수 한 명을 죽였다.

이 모든 일을 한 다음 호랑이는 남 씨의 집 방에 들어가 누운 채 나오지 않았다. 소와 사람들을 물어 죽이기는 했으나 먹지 않은 점은 호랑이의 행동이 결코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방에 누워 있었다는 점이 기이했다. 결국, 관에서는 별포수(別砲手)를 파견하여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잡은 호랑이의 크기는 턱밑 길이가 세 뼘 반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조선시대 사냥꾼 부대의 존재”


일기에는 백두산에 당시 오랑캐 사냥꾼의 움막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냥꾼들이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장기간 사냥을 다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냥꾼들은 비단 일반 사냥꾼뿐만 아니라 군부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 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이는 사냥꾼들이 지닌 탁월한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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