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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

‘빙옥처럼 깨끗하고 화살처럼 곧아라’

〈빙옥처럼 깨끗하고 화살처럼 곧아라〉 포스터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서 특별전 〈빙옥처럼 깨끗하고 화살처럼 곧아라〉를 전시중입니다. 이번 전시는 한양조씨 옥천문중에서 기탁한 자료를 통해 기탁 자료의 소중한 가치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전시실 전경


옥천문중은 지조와 절의로 상징되는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鄰, 1658~1737) 선생을 중심으로 합니다. 조덕린 선생은 외가인 하회에서 겸암 류운룡(謙唵 柳雲龍, 1539~1601)·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선생의 가학을 이어받았으며,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 선생의 학문을 계승하였습니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에 부름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사미정(四未亭) 편액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


지조와 절의로 상징되는 옥천 조덕린 선생의 삶은 1725년 사간원 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을사십조소(乙巳十條疏)」로 대표됩니다. 이 사건은 이후 조덕린 선생의 삶 전체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삶에도 영향을 주며 옥천문중의 영예와 시련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덕린 선생이 영조에게 올린 소장은 당쟁의 폐해와 시급한 사항을 10개조로 올린 내용입니다. 이 상소는 당시 집권세력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조덕린 선생은 68세의 고령의 몸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배에 풀려난 조덕린 선생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자 경상도 호소사가 되어 전란을 평정하는 데 앞장섰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공적으로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조덕린 선생은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며 제자들을 길러내며 영남 유생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덕린 선생이 살던 시대는 당쟁으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1736년(영조 12) 조덕린 선생은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노론의 탄핵을 받았고, 제주로 귀양 가던 중 강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조덕린 선생의 호패(號牌)


조덕린 선생의 신원을 촉구하는 통문(通文)


정권교체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 국왕에 대한 의리로 올린 소장이 논란이 되어 당쟁의 희생양이 된 조덕린 선생의 복권은 오랜 기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손자인 마암 조진도(磨岩 趙進道, 1724~1788)는 손자라는 이유로 과거급제가 취소되는 등 조덕린 선생의 상소사건은 후손들의 정계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8년(정조 2) 정조가 무신년을 맞아 60년 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을 표창하면서 호소사로 활동했던 조덕린 선생의 관직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1802년(순조 2) 다시 노론이 집권하면서 조덕린의 직첩은 환수되었고, 그 후손인 조언규(趙彦奎), 조병성(趙秉成), 조병희(趙秉禧) 대에 이르러 다시 조덕린 선생의 신원을 위한 활동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직접 상언을 올리고, 서원의 유림들과 함께 조덕린 선생을 신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결과 1899년(고종 36) 복관을 이루어냅니다.


조덕린 선생의 관직 진출을 보여주는 유물


『창주잡영(滄州雜詠)』


옥천문중은 누대에 걸쳐 옥천 조덕린 선생의 정신은 지켜왔습니다. 문중의 가학은 주실마을의 다양한 공간에서 계승되었습니다. 조덕린 선생이 주자의 창주정사(滄州精舍)를 모방하여 지은 창주정사는 『창주잡영(滄州雜詠)』과 함께 전해집니다. 정계 진출이 막힌 옥천문중 사람들은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주실 한양조씨만의 독특한 학문체계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이처럼 옥천문중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옳은 일을 찾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조덕린 선생의 신원 활동을 통해 맺어진 근기남인과의 교유를 통해 선진적인 학문의 폭을 넓혀가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근대교육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화운동, 의병운동, 독립운동을 견인하며 조덕린 선생의 강직한 지조정신을 계승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2023년 5월 28일까지 유교문화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Ⅱ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옥천 조덕린의 강직한 삶과 선조의 신원을 위한 후손들의 지속적인 정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이들을 불러 글을 읽게 하고 들었으며,
때때로 마음에 맞는 곳이 있으면
곧 흐뭇하게 즐거워하면서 먹는 것조차 잊었다.
지금부터는 동강(東岡)에서 늙어가는 삶이 비로소 내 것이 되어
서산(西山)의 지는 해에 오히려 남은 세월을 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조물주가 나를 편안하게 늙어가도록 해주고
내 말년을 두터이 해준 것이다.
다시 무엇을 하겠으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경술년(1730) 섣달 갑진일에 정사노인(精舍老人)은 쓰다

『창주잡영』「창주정사잡영(병서)(滄州精舍雜詠(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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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리
박나연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 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 ~ 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가뭄, 비를 기다리는 버드나무와 눈먼 무당의 기우제”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6-01-01 ~ 1786-01-06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국가 운영의 가장 큰 변수였다. 1614년 봄에도 가뭄은 찾아왔다. 기다리는 봄비는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고,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와 밀이 타들어 갔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농사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우제를 연달아 지냈다. 눈이 먼 무당이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쳤고, 방방곡곡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게 하였다.

4월 4일, 드디어 비가 내려 모두가 기뻐하였다. 빗줄기가 마치 삼대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랫동안, 고루 내리지 않았고, 닷새 후 방방곡곡엔 다시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다시 향을 사르며 버드나무를 꽂고, 아이와 눈먼 무당이 서교(西郊)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철 장인이 수리용 쇠못을 만들어주다”

금난수, 성재일기,
1596-01-01 ~ 1596-01-05

1626년 7월 15일, 을유. 맑음. 권별은 한익길의 집에 갔다가 곧바로 쇠못을 보고 오후에 올라왔다. 초간에 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왔다.

1626년 7월 25일, 을미. 맑음. 권별은 귀래곡 철장(鐵匠)의 집에 가서 못 90여 개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초간에 갔다. 밤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6일, 병신. 맑음. 서까래가 부족하여 수심에 가서 서까래 네 바리를 얻어 와서 곧바로 초간(草澗)으로 갔다. 임이섭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1626년 7월 28일, 무술. 초간에 갔다. 목수 진상이 와서 어제부터 연못의 방죽을 고쳐서 쌓고 있다. 여균·이망이 와서 만나보았다.

1626년 8월 3일, 임인. 맑음. 초간에 가서 제방 고치는 일을 마치고 물을 끌어댔다. 달보·경보·원백·여유가 와서 보고 갔다.

“기와장이가 닷새에 걸쳐 새 지붕을 덮다”

미상, 봉강영당이건일기, 1862-06-03

1862년 6월 3일, 기와장이[瓦匠]에게 지붕을 덮게 했는데, 이 일을 5일만에 마쳤다. 마친 날이 1862년 6월 3일이다.

“한 달에 걸쳐 사당 건물에 단청을 입히다”

미상, 봉강영당영건일기, 1866-05-01

1806년 4월 2일에 화공승(畵工僧) 2명을 시켜서 단청을 하기 시작했는데, 전후로 30여 일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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