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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고려 공민왕, 영호루(映湖樓)에 서다

앙상한 겨울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눈보다 하얗고 얼음보다 투명한 눈꽃이 눈부시게 빛나 눈물이 났다. 나는 조심스레 말에서 내렸다. 얼어붙은 강변에서 냉기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휘청했다. 개경(開京)에서부터 연〔輦, 임금이 거동할 때 타고 다니던 가마〕 대신 말을 타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여기까지 왔다. 해가 저물기 전, 복주목(福州牧)에 당도하려면 서둘러 소야천(所夜川)을 건너야 하는데, 나는 한 발도 떼지 못한 채 겨울 강가에 서 있었다.

그때 허름한 삼베옷을 껴입은 아낙네가 소야천 물에 들어가 허리를 숙였다. 뒤이어 한 명, 또 한 명의 아낙네들이 줄지어 강으로 들어가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버티고 섰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거센 바람이 강물과 만나 매서운 칼날이 되어 그녀들의 발끝을 도려내고야 말 것이다. 나는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군살 하나 없는 등이 떨리고 있는 것인지 내 다리가 떨고 있는 것인지 나를 위해 아낙네들이 만든 인다리를 건너며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공민왕의 부인, 노국공주가 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함〕 중 겪은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원나라 공주였던 그녀가 피란길 위에서 느꼈을 아픔과 고통, 처참함과 끔찍함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복주의 아낙네들이 보여준 헌신은 그녀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 봄날의 햇살이 아니었을까?

복주는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고타야(古陀耶)․고창(古昌)․영가(永嘉)․길주(吉州)․화산(花山) 등으로도 불리던 이곳, 안동은 고려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 때 ‘안동부’, 공민왕 때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후로 줄곧 ‘안동’이라는 이름을 품고 있다. 고려 공민왕과 안동의 특별한 인연을 따라가다 보면 안동웅부(安東雄府)와 영호루(映湖樓) 편액에 숨겨진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영호루

영호루 편액




안동 본관의 시작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한 왕건은 안동에서 다시 견훤과 싸워 승리했다. 고창전투(929~930)에서 승리한 고려는 이 여세를 몰아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안어대동(安於大東), 나라의 안정을 도모한 고을]로 승격시키고, 고창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에게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리고 ‘안동’이라는 본관을 하사했다. 지금도 안동태사묘에서는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고려 건국의 결정적 한 방이 되어준 안동은 고려 조정에 대해 언제나 우호적이고 충성을 다한 지역이었다. 고려 건국 이후 김사미(金沙彌, ?~1194)와 효심(孝心)이 난을 일으켰을 때 안동 사람들이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게다가 안동 출신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원 지배하에서 왜구를 정벌할 때 고려군 지휘관으로서 맹활약을 했다. 또한 안동은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忠烈王妃 齊國大長公主)의 탕목읍〔湯沐邑, 목욕의 비용을 충당하는 구실로 물자를 거두어들이는 읍〕으로 충렬왕비가 살아 있을 당시 경주와 함께 고려 왕실에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원군과 고려군이 일본으로 2차 정벌을 위해 출정할 때 충렬왕은 왕비와 함께 경상도를 순방했는데, 그때 충렬왕은 안동에서 30여 일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을 피해 몽진을 떠났을 때 안동을 처음부터 목적지로 정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몽진을 진행하면서 최종 피난처로 결정한 것은 고려 왕조의 수많은 위기 속에서 고려를 위해 충성을 바친 안동 김씨·안동 권씨 가문과 안동의 백성들이 보여준 의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갈 때 고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안동을 공민왕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홍건적의 고려 침입과 공민왕의 안동 몽진


1351년(공민왕 1) 중국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대홍수와 홍수 피해를 수리하기 위한 농민들의 강제 차출로 민심이 동요되었고, 결국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바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매고 이민족인 원나라 타도를 외친 홍건적이다. 이후 홍건적은 내부 분열로 원의 토벌 작전에 쫓기게 되면서 고려로 눈을 돌린다. 이들은 1359년(공민왕 8) 고려 침략을 시작했다.

홍건적의 침입에 고려는 잠시나마 대응하기는 했으나 결국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恭愍王, 1330~1374)과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순탄치 않을 겨울 몽진을 떠났다. 당시 공민왕의 몽진을 호종(扈從)한 신하는 겨우 서른 명 남짓이었다.

공민왕이 가는 곳마다 고을 관리들마저 모두 달아나고 없어 공민왕에게 굴욕을 안겼다. 공민왕은 파주와 이천, 충주, 조령을 지나 복주에 도착했다. 몽진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못 된 때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민왕 일행은 안동에 도착하기 직전 다리가 놓이지 않은 소야천을 건너야 했다. 그때 복주의 여인네들은 인교(人橋)를 놓아 노국공주가 무사히 소야천을 건널 수 있게 도왔다. 제 살길 찾아 도망가기 바쁜 여타 지역의 백성들과 달리 맨발로 나와 반갑게 맞이해준 복주는 종묘사직의 위기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공민왕의 심신을 달래준 곳이었으리라.




공민왕, 안동을 떠나며 친히 글씨를 남기다


1362년(공민왕 11) 1월 18일, 드디어 고려군은 홍건적 10만 명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했다. 선봉에 나선 이성계(李成桂)가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격파하자, 그 여세를 몰아 총공격에 나선 고려군은 홍건적의 괴수인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베어 죽였다. 전세가 꺾인 홍건적 잔당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고 함락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고려는 개경을 되찾았다.

2월 25일, 공민왕은 70여 일간의 몽진을 끝내고 안동을 떠났다. 공민왕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안동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왕을 모셨다. 이러한 안동 사람들의 충정을 잊지 않은 공민왕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 후 안동에 여러 하사품을 내렸는데 특히 ‘안동웅부’와 ‘영호루’의 공민왕 친필 편액 글씨가 대표적이다.

‘안동웅부’ 편액은 1362년(공민왕 11) 4월, 당시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하사한 것이다. ‘영남의 으뜸 가는 곳’이라는 뜻의 ‘안동웅부’는 600여 년 동안 행정과 역사의 중심지로서의 안동이 갖는 위상을 말해준다. 안동시청 웅부관 입구의 ‘안동웅부’ 편액은 모각본이지만 지역민과 안동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반겨주고 있다. 안동시립박물관에 송설체(松雪體)로 쓴 ‘안동웅부’ 진품이 있다. 이곳에 가면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남긴 화가이자 송설체에 능숙한 서예가였던 공민왕의 예술적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안동시청 웅부관

안동시청 안동웅부 편액

안동시립박물관 안동웅부 편액 (출처: e뮤지엄)


『고려사』에 “왕이 영호루에 가서 배를 타고 풍광을 구경한 후 강가에서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볼 때 공민왕은 낙동강에서 활을 쏘고 영호루에 올라 착잡한 심회를 달래며 시를 지었을 것이다. 국가를 초월한 고려시대 최고의 러브스토리, 공민왕에게 큰 힘이 되어준 노국공주가 1365년 아기를 낳다가 죽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안동 영호루에서의 추억은 그의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공민왕은 1366년 친히 붓을 잡고 ‘영호루’ 석 자를 써 내려갔다.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국가가 남으로 복주에 옮기고, 군사를 출동시켜 북벌하여 이듬해에 드디어 적(賊)을 경성(京城)에서 섬멸시켰다.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고 또 기쁨을 표시한 것이다. 병오년 겨울에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영호루(映湖樓)라는 석 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軍) 신(臣) 흥경(興慶)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신 사복(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누의 규모가 누추하여 임금이 하사한 현액(懸額)을 빛나게 할 수 없을까 걱정한’ 당시 안동 판관 신자전(申子展)이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에게 ‘영호루 기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이색은 공민왕이 안동 영호루에 글씨를 하사한 연유에 대해 밝히며 기문과 찬을 썼다.

고을의 수령인 신군자전(申君子展)이 예전 제도를 고치니, 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각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빛 현액(縣額)과 위에서 광채를 다투니, 곧 무지갯빛인 듯, 용이 싸우는 듯 갑자기 호수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떨려 누각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 편안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진실로 그것을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백문보 『담암일집(淡庵逸集)』, 제2권 「영호루금방기」


고려의 문신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03~1374)는 영호루 편액의 위엄이 너무도 웅장하여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니 차라리 누각에 오르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고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영호루의 흔적을 찾아


안동 태화 소공원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이곳에 ‘영호루(映湖樓) 유허비(遺墟碑)’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원래 영호루는 영호루 유허비가 서 있는 곳에서 남쪽 20m 앞에 있었다. 1914년, 안동시 태화동 서악사에서 낙동강의 영호루를 촬영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호루의 사진을 보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우뚝 솟은 영호루의 위용이 범상치 않지만 낙동강에 인접해 있어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다.


서악사에서 바라본 영호루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의 안동 강변길이 조성되기 전, 모래밭이었던 낙동강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여름 큰비에 곳곳이 물에 잠겨 주민들을 애태우던 곳, 그곳에 서 있던 영호루 역시 홍수가 나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1547년(명종 2)의 대홍수와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은 영호루는 1792년(정조 15)에도 탁류에 휩쓸려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홍수가 날 때마다 영호루의 누대는 유실되었고 그때마다 중수를 거듭, 1820년(순조 20)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은 누대를 중수한 후 ‘낙동상류영좌명루(洛東上流嶺左名樓)’란 초대형 편액을 누대의 한쪽 면이 꽉 차게 걸었다. 그러나 100년 뒤인 1934년 7월의 대홍수로 영호루는 완전히 유실되었다.


영호루 유허비

낙동상류

영좌명루


1970년 영호루는 원래의 위치가 아닌 강 건너편에, 목조건물이 아닌 철근콘크리트 누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영호루 북쪽에 공민왕 친필 현판 ‘영호루’가, 남쪽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 ‘영호루’가 걸려있다. 그리고 누대 안에는 2점의 기문과 47점의 시판이 있다.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이곳을 지나간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시를 감상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서 “영호루는 영가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산의 기괴하고 거룩한 구경은 비록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는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나, 같이 낙동강의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 상산에 있는 관수루, 일선에 있는 월파정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甲乙)을 다툴 수 없다.”라고 했다. 김종직의 말처럼 영호루는 촉석루와 영남루에 비해 규모가 조금 작을지 모르지만 그 풍광만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600년 이상 이어져 온 영호루의 이야기가 가늠도 되지 않아 무심히 안동 시내를 바라보았다.


김종직이 쓴 영호루중신기

영호루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山水無非舊眼青       산과 물은 모두 예대로 있어 반갑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 또한 바로 소년 때 보던 정 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 있어
收抬絃歌慰我行       악기와 노래를 수습하여 내 걸음을 위로하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이 시는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이 1274년 원이 왜구를 정벌할 때 고려군을 이끌고 원군과 참전했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달리 산천은 예전 모습 그대로 그를 맞아준다. 원정을 떠나기 전의 불안한 마음을 노래로 달래는 김방경의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고려 후기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진압하고 일본 정벌을 지휘했던 무관 김방경의 인간적인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김방경이 쓴 시


飛龍在天弄明珠       나는 용이 하늘에서 밝은 구슬 희롱 타가
遙落永嘉湖上樓       안동이라 영호루에 멀리 떨어 뜨렸네
夜賞不須勤秉燭       밤 구경엔 구태여 촛불 켤 것 없어
神光萬丈射汀洲       만 길의 신광이 정주를 비추는 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한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정도전은 천상과 천하를 노닐던 용이 영호루 앞 낙동강에 여의주를 떨어뜨려 그 신비한 광채가 영호루를 환하게 비춰 밤에도 촛불을 켤 일이 없다고 표현했다. 영호루 앞의 낙동강을 바라보며 용을 떠올린 정도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일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정도전의 「영호루」를 감상하며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해 조선왕조를 열었던 혁명가 정도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정도전이 쓴 시


客裏登臨感歎多  객의 몸으로 높은 데 올라 굽어보니 느낌과 탄식이 많은데
倦遊赢得鬢絲加  게을리 노느라 귀밑머리에는 흰머리 늘어가네
海天流落空懷國  바닷가로 흘러 떠돌면서 공연히 고국을 그리워하고
鄕郡歸來未有家  고향이라고 돌아와도 내 집이 없구나
百尺危欄浮碧落  백 척이나 높은 위태로운 난간은 푸른 공중에 떠 있고
九重宸翰耀金花  구중궁궐에서 내리신 임금의 글씨는 황금빛 꽃처럼 찬란하네.
長川迥與銀河接  긴 내는 멀리 은하수와 이어졌으니,
直欲迢迢一泛槎  곧 멀리멀리 한 개의 뗏목을 띄우고 싶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여말선초의 문신,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은 1368년(공민왕 17)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성균관 직강·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했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태조 2), 태조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렸다. 이후 예문관 대학사·중추원사·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당대 석학들과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새 왕조의 유학을 계승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온 권근이 영호루를 찾았다. 이 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관직을 지내느라 객지를 떠돌던 그가 고향 안동에 돌아와 느낀 감회를 표현했다. 비록 흰머리 무성한 노년이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공민왕 친필 현판을 보며 하늘의 은하수와 이어진 낙동강에 뗏목을 띄우고 싶다고 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다.


권근이 쓴 시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


1990년대에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운동회 날, 남학생은 차전놀이를 여학생은 놋다리밟기를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고적대 단원이었던 나는 놋다리밟기를 하지 않았지만, 아낙네 역을 했던 대다수의 친구들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공주를 흘겨보곤 했다. 우리는 놋다리밟기가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른 채 더위가 물러가지 않은 9월 한낮 운동장 흙을 째려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은 운동회 날, 차전놀이와 놋다리밟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안동시는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고창전투에서 유래한 남성 대동놀이 ‘안동차전놀이’와 고려 공민왕의 안동 몽진에서 유래한 여성 대동놀이 ‘안동놋다리밟기’를 진행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노국공주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경북도 내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안동놋다리밟기’ 행사의 공주를 선발했다.

설날, 시댁에 가면 내가 모르는 남편의 역사를 듣는다. 작년에도 들었고 10년 전에도 들었던 남편의 이야기는 이제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전설이 되어 전해진다. 노국공주가 소야천을 건너던 때의 이야기는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일제를 지나 대한민국에 전해졌다. 안동 영호루에 올라 안동을 내려다본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와 도로가 생겼지만 국난 극복을 위해 하나로 합친 우리의 마음은 낙동강을 따라 유구히 전해질 것이다.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 포스터 (출처: 안동문화원)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더보기
2.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더보기
3. 고려시대(https://db.history.go.kr/goryeo)더보기
4. 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더보기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6. 국립중앙박물관(https://www.museum.go.kr)더보기
7. e뮤지엄(https://www.emuseum.go.kr)더보기
8. 이원걸, 『안동 영호루』, 민속원, 2021.
9. 우진웅, 『영가지』, 민속원, 2022.
10. 이승한, 『몽골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 푸른역사, 2018.
11. 배영동 외 3명, 『고려 공민왕과 임시 수도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4.
12. 안동시·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고려시대의 안동』, 예문서원, 2006.
13.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안동역사문화기행』, 푸른역사, 2002.
“태사묘를 참배하다”

태사묘 숭보당 김수흥, 남정록, 1660-03-07 ~

1660년 3월 7일, 김수흥은 마침내 안동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사시관(賜諡官)의 임무를 띠고 영남으로 내려와 경주로 향하던 중, 안동의 태사묘를 참배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김수흥은 안동 김씨이고, 따라서 태사묘는 집안의 시조를 모신 곳이 되는 셈이었다.

묘는 안동 객사의 북쪽에 있었는데, 사당은 세 칸 규모로 세워져있었다. 김수흥의 조상인 김태사의 신위는 동쪽에 있고, 권태사의 신위가 중앙에, 장태사의 신위는 서쪽에 있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권씨 집안의 자손을 실무자로 삼고, 고을의 호장이 그 하급실무자가 되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손들이 가장 성대하였기에 중앙에 신주를 모시고, 술을 따라 올릴 때에도 권태사에게 먼저 드렸는데 이런 전통이 오래되어 감히 고치지 못하였고, 제사 때 실무 역시 권씨가 아닌 다른 성에서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방명록에 이름을 썼다. 방명록을 쓰자 고을의 호장이 오래된 기물 한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기물이 들어있었다. 옛적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이곳 안동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난이 끝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때 안동의 호장에게 하사한 물건들이라고 한다. 물건들의 품질이 모두 좋아 보였고, 종이에는 어보가 찍혀있는 것도 있었다. 김수흥은 태사묘에 들러 시조 할아버지와 전왕조의 임금의 자취를 모두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

“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허목(許穆) 초상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정몽주 초상 (출처 : 위키백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구강서원을 새로 건립하다”

구강서원 전경 권상일, 청대일기,
1736-05-06 ~ 1736-05-07

1736년 5월 6일, 맑은 날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구강서원(鷗江書院)에 갔다. 구강서원은 울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1678년에 지방 유생들의 발의로 정몽주와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리고 1694년에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런 구강서원의 재사를 새로 지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지역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의 원장과 재임, 유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모두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술상은 간단히 차려 먹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기 전에 편액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동재(東齋)는 상지(尙志), 헌(軒)은 인지(仁知), 서재(西齋)는 경신(敬身), 헌(軒)은 광제(光霽), 문(門)은 유승(由承)이라 하였다. 묘(廟)와 정당(正堂)은 이전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묘는 숭곡사(崇谷祠), 동쪽 협실(夾室)은 사성(思誠), 서쪽 협실은 양호(養浩), 정당은 지선(止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현판을 써서 걸기로 하였다.

“야은 길재의 유허를 찾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묘소
송달수, 남유일기, 미상

1857년 송달수는 경상도 선산 고을에 도착하였다. 세상에 알려지길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가 바로 여기에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금오산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서 발붙일 곳이 없어 어떻게 기어 올라가야 할지 난감한 길이 한참을 이어졌다. 거기서 몇 리를 가니 채미정이 있었다. 채미정 옆에 야은 길재의 유허비가 서 있었다.

유허비에는 숙종이 지은 어제시가 있었는데, 야은을 위해 읊은 것으로서 따로 누각 하나를 채미정 뒤에 만들어 봉안해 두었다. 빽빽한 대나무와 소나무가 채미정을 푸르게 두르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높은 절개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채미정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는 오산서원이 있었다. 이 곳 서원에서는 야은만 제사를 모시는데,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한 서원이었다.

사당을 참배하고 절하기를 마치고는 사당을 둘러보니 오른쪽 가장자리 산기슭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양청천이 쓴 글씨를 베껴 바위에 새긴 것이었는데, 필력에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뒤에는 유성룡의 글을 음기로 새겼다.

사당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는 야은의 묘가 있었고, 언덕 너머에는 여헌 장현광의 묘소가 있었다. 일찍이 선조인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와 보고 감흥을 일으켰단 이야기를 들었으니, 단지 선현의 유풍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경치 역시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사찰 신륵사 방문기 -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은
비석의 이름들”

신륵사 강월헌 김령, 계암일록, 1605-02-01 ~

1605년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김령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했다.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

김령은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다.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웠을 것을….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구나.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은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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