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0년(인조 8년) 9월 15일, 맑은 날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10일 경에 영덕수령 이안진(李安眞)이 도산서원을 찾아와 묶었다고 한다. 예안현감인 김진(金瑨)이 예전부터 그와 친분이 두터워서 김진 역시 도산서원으로 갔다. 그런데 예안현감은 친구를 맞으러 가면서 한 잔의 술과 한 홉의 쌀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를 도산서원에서 묵으니, 다음날 아침 도산서원의 원장이 새벽에 죽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아침밥을 하려고 하였는데, 예안현감은 친구 이안진에게 떠날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혹시 그가 더 머물면 자기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해서였다. 명색이 친구란 자에게 밥 한술, 술 한잔이 아깝다면 현의 백성들에게 쥐어짠 그 많은 재물은 대체 어디에 쓸 계획인지 모르겠다. 김령은 이러한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더 웃기는 것은 예안현의 관노 대남(代男)이란 놈이었다. 이놈은 현감이 도산서원에서 자던 날 밤, 안장을 갖춘 예안현감의 말을 타고는 부포에 위치한 사창가로 달려갔다. 서리들과 군졸들, 그리고 도산서원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예안현 소속 급창(及唱)이 이 사실을 고하였는데, 이를 다 들은 예안현감은 그를 크게 책망하지 않았다.
아! 어찌 이런 수령과 이런 관노가 있단 말인가. 기강은 크게 무너지고 명분은 크게 문란해져 예안현(禮安縣) 고을은 다시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몹쓸 땅이 되었으니, 모두가 이 예안현감 김진 때문이다. 이러한 행실을 한 이유는 그가 평소에 관아의 무리들과 이익을 같이 나누어 그들 관계가 마치 집안의 부자관계와 같았다. 이리하여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둔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예안현감 김진이 친구인 영덕 수령 이안진을 만나보는데 대접이 인색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안진(1576~1640)은 본관이 덕수(德水)이고 자는 보여(葆汝)이다.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이원상(李元祥)이고, 아버지는 전라도도순찰사 이광(李洸)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증영(李增榮)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31살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옥사와 폐모론이 일어났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그가 성균관 유생 300여 명을 이끌고 궐문에 나아가 항소하였다. 또한, 1618년 동학유생 조경기(趙慶起), 권념(權淰), 정복형(鄭復亨), 심지한(沈之漢), 구방(具枋), 노원범(盧元範), 이원충(李元忠)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동한 정조(鄭造), 윤인(尹訒), 이위경(李偉卿) 등을 참수형에 처하라는 소를 올렸다. 이안진은 이때의 상소로 당시 재위 중이던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상소에 참여한 21명과 함께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고 금고형에 성문 밖으로 쫓겨났다가 귀양 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의 주청(奏請)으로 같이 죄를 입었던 동학유생들과 함께 6품직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청양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공조좌랑,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제수되었다가 1635년(인조 13)에는 한산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한산 군수로 재직 중 군사 작전에서 솜씨 있게 일을 처리하여 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었다. 이후 관직에 물러나 제천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1639년 한성부 서윤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병으로 사양하자, 그의 고향인 제천과 가까운 정선 군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임지인 정선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갑작스런 병이 들어 1640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성품은 효우(孝友)가 돈독하고 언소(言笑)를 잊지 않았으며, 바른 행의(行義)가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공사에서는 매사 염정(廉靜)하고 엄하여 위엄을 갖추었다는 평을 들었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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