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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대구 양반 최흥원의
가정경영 분투기


조선시대의 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생산의 공간이자 사회화의 공간이었다. 유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집은 조상을 모시는 종교의 공간이기도 했다. 집은 사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이 공존했으며, 개인의 사회적 위상은 집의 위상과도 맥락을 같이했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가진 조선시대의 집은 어떻게 운영했을까?


〈최흥원이 살았던 대구 백불암 고택〉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 중기 이후 양반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여성은 안채를 중심으로 일했고, 남성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성의 역할이 임신과 출산, 음식과 의복 마련 등 가족의 생존과 관련된 안살림에 집중된 반면 남성은 가족의 생존과 더불어 집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대구부 해안현 칠계[일명 옻골, 오늘날 동구 둔산동]에 살았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은 31세(1735)부터 82세(1786)에 사망하기까지 50여 년간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역중일기(曆中日記)』로 불리는데, 일기에는 가장(家長) 최흥원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지식인 최흥원의 농사 경영과 살림살이



최흥원이 일기를 쓸 당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1682~1765)는 살아 있었다. 36세(1740)에 부인과 사별했으며, 두 명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도 부인이 사망한 다음 해에 죽었다. 최흥원에게는 세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인근에 따로 살았다. 최흥원 4형제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가운데 일상과 경제를 공유했다. 경제권의 상당 부분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관리와 분배의 중심에는 최흥원이 있었다.

오늘 막내아우를 시켜 다시 경산에 가서 끝내지 못한 대(臺)의 흙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나는 말을 달려 북산에 들어갔는데, 동촌의 장정 수백 명이 이미 와 있었다. 우각사(牛角砂)를 거의 반쯤 조성하도록 해 놓고, 둘째 아우를 남겨서 대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1748년 8월 16일-

돈 25냥을 둘째 아우와 막내 아우에게 보내서 나눠 쓰게 했다.

-1761년 1월 30일-


최흥원은 수시로 아우들에게 돈과 곡식을 주었다. 아우들은 이것으로 생활하는 한편,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집안일을 분담했다.


〈함양 일두 고택 사랑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최흥원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집에 머물 때는 그들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손님이 돌아갈 때는 곡식이나 노잣돈을 주는 등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알고 지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들조차 최흥원의 집에 들어와 기꺼이 묵기를 요청했으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최흥원의 집을 여관처럼 드나들었으니 최흥원의 인심이 소문났기 때문일 것이다.

최흥원은 지식인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본성을 함양하고 싶었지만, 가족 부양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식인이자 학자로서의 삶 보다는 식솔들의 끼니를 걱정하고 농사를 관리하며 자제들의 출세를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우선이었다. 그에 따른 번뇌가 삶을 관통했지만, 내면의 욕망보다는 현실적 책임에 더욱 충실했다. 최흥원이 끼니를 책임져야 할 ‘식구(食口)’는 가족과 노비들이었다. 오늘날은 ‘가족’과 밥을 같이 먹는 ‘식구’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의 ‘식구’는 가족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비가 크게 내려서 강물이 불어 넘쳐 갯가의 보리가 모두 잠겼다.
우리 집에서 잃어버린 것을 계산하여 보니 거의 40여 섬이 되었다.
백여 명의 입이 먹고 살아갈 방책이 없으니 가슴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45년 6월 9일-


〈김홍도 《논갈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은 백여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씨 뿌리기, 곡식이 익어 가는 상황, 추수와 수확량 등을 꼼꼼하게 챙겼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 아들 사촌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최흥원은 노비의 관리 감독에도 신경을 썼다. 농사는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했으며, 이들은 집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일에 동원되었다. 1745년 홍수 때 종들을 갯가에 보내 물에 잠긴 보리를 건져 수습하게 했는데, 다섯 말이 넘었다. 한 톨의 곡식이라도 건질 수 있어 재앙 중 다행이라고 여겼다.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최흥원에게 공물을 바쳤으며, 옻골 주변의 동화사, 부인사, 은해사, 파계사 등의 중들도 수시로 최흥원에게 물건을 바쳤다.


〈1805년 한글 책력〉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농작물 수확과 노비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지인들의 선물과 부조도 최흥원의 경제생활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최흥원의 집에는 며칠이 멀다 하고 선물이 도착했다. 지인들은 닭, 꿩, 술, 인삼, 숭어 등의 음식 재료 혹은 편지지, 붓, 책력 등을 주었다. 물론 최흥원도 친척, 이웃,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온정을 베풀었다. 최흥원은 노동력뿐만 아니라 곡식, 목화솜, 책, 소나 말 등의 탈것, 혼인이나 장례에 필요한 물품 등을 이웃과 함께 나누었다. 가족 너머의 친척 및 이웃들과의 물질적·정서적 교류는 최흥원 본인과 가족의 보호 장치이자 무형의 자산이기도 했다.




제사 주재로 사제의 역할 수행


〈최흥원의 신주가 봉안된 백불암 종택의 사당〉 (출처: 영남일보)


유교에서는 집에 사당을 지어 조상을 모셨다. 집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조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상이 세상을 떠나면 신의 존재로 제례를 통해 후손과 만난다. 최흥원은 종손으로 각종 제사를 주재했다.

최흥원은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가운데 단순히 시속(時俗)만을 따르지 않고 예법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고민했다. 예법에 밝은 선학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제례 예법을 만들기도 했다. 설날에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시속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나, 결국은 도축 금지법을 위반하는 일이다. 최흥원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를 사서 쓰면 불결하다고 여겨 법을 어겨 가면서 소를 잡았는데, 이는 국가를 속이는 행위이고, 고기를 사서 쓰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최흥원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최흥원은 제수를 마련하거나 제수 품목을 대부분 직접 정했다. 제수 마련을 위해 대구부 시장, 하양 시장, 자인 시장 등에 심부름꾼을 보내, 송아지, 소고기, 생선, 전복, 과일 등을 구하기도 했다.




혼인과 교육으로 집의 품격 올리기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경사스런 일을 골라 그린 《평생도(平生圖)》〉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최씨 옻골 입향조 9세 최동집부터 11세까지는 주로 대구의 양반들과 혼인했다. 대구 지역 양반과의 관계망 형성을 통해 지역에서의 기반을 구축했다. 12세부터는 안동 지역의 양반과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영천, 성주, 경주 등 혼인 대상이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4세 최흥원 역시 안동의 명망 있는 가문과 혼인하려고 노력했다. 12~13세가 안동의 의성 김씨와 중첩 혼인을 했다면, 14~15세는 안동 지역에서 의성 김씨와 쌍벽을 이루는 하회의 풍산 류씨와 거듭 혼인했다. 아들 주진은 하회의 풍산 류씨와 혼인했고, 매부와 종매부도 풍산 류씨였다.

최흥원 대에 이르러 옻골 최씨는 영남 지역에서 최고의 혼반(婚班)을 형성했다. 이는 가격(家格)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혼인 대상은 영남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최흥원이 퇴계학파의 주류에 편입되려고 공을 들인 만큼 당시 서인(西人)이 많은 대구 혹은 상주지역과는 혼담이 거의 없었다.

최흥원은 사돈과 형식적인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 및 정치를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돈 집안끼리 비슷한 학문적 성향을 띄었다. 혼인을 매개로 집단 지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혼인은 학문적 위상과 사회적 위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혼인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였다.

공부를 통한 입신양명은 집의 품격을 높이는 핵심 요소이다. 최흥원이 자제 교육에 정성을 다한 것은 당연하다. 그 역시 뛰어난 학자였지만, 아우, 아들, 사촌, 조카들이 영남의 훌륭한 학자에게 배울 수 있도록 했고, 인근 사찰에서 조용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으며, ‘북계정사’라는 교육 공간도 마련했다. 좋은 책은 말할 것도 없고 문방사우도 부지런히 마련했다. 그러나 최흥원의 노력만큼 자제들의 과거 합격 운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의학지식으로 가족 질병 구하기


〈약장(藥欌). 다리를 두 마리의 박쥐문으로 만들어 쌍복(雙蝠)을 기원하였다.〉 (출처: 허준박물관)


최흥원은 아버지가 병상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병명·진료 기록·복용한 약·증세 등을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주치의처럼 아버지를 보살폈고, 병의 진행 과정을 진료 일지처럼 상세하게 기록했다. 어머니는 1765년에 사망했는데, 1737년부터 어머니의 질환을 언급했다. 일기는 날씨를 기록한 다음 어머니 병의 증세 혹은 안부 등을 적는 방식이었다. 최흥원은 어머니가 아플 때 약을 짓거나 의원을 부르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체력 증진을 위해 밥상에 신경을 썼다. 육류·생선·해산물 등을 끼니마다 마련하고자 했고, 옻골 인근의 시장뿐만 아니라 동해까지 사람을 보내 반찬거리를 구했다.

최흥원은 의학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병의 진행 상태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대변을 조금 보셨는데, 건조했다”, “밥을 드신 뒤에 대변이 꽤나 미끄럽게 잘 나왔다”고 기록하는 등 변의 상태로 병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1739년 1월 24일 일기에는 “어버이를 모시는 자는 의학을 몰라서는 안 되지만 의학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다. 최흥원이 의학 공부를 한 것은 효행의 연장이었다.

어머니께서 편한 날이 없으시고 둘째 아우의 병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니,
너무 애가 타서 흰 머리털이 하루에 한 길은 자라는 것 같다 …
막내 제수씨가 또 크게 아프니, 이게 무슨 증상인지 또한 염려스럽다.

-1742년 7월 14일-


집에는 거의 매일 아픈 사람이 있었다. 특히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하는 전염병은 삶을 위협하거나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747년 1월에도 천연두가 유행하여 둘째 아우와 조카 및 몇몇 종들이 생사를 오갔다. 최흥원은 사방팔방으로 여러 가지 약재를 구하여 둘째 아우의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동생이 건강을 회복한 이후 최흥원은 도움을 주었던 이웃, 친척, 노비들의 따뜻한 손길을 잊지 않았다. 잔치를 열어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후 최흥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새로운 일상으로 복귀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기획한 전통생활사총서 8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이처럼 최흥원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정성을 다했던 생활밀착형 양반이었다. 82세로 죽을 때까지 관료 진출 및 향촌 활동을 자제하고 성실하고 묵묵히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옻골 최씨를 영남 지역에서 명망 있는 가문으로 만들었다. 『역중일기』는 그것의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이다.




집필자 소개

김명자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안동 하회의 풍산류씨 문중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와 안동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2023), 『하와일록-소년에서 유학자로, 조선 사대부 청소년의 성장 과정과 세상 읽기』(2022, 공저), 『Collect and Preserve-Institutional Contexts of Epistemic Knowledge in Pre-modern Societies』(2021, 공저) 등이 있다. 일기자료를 통해 일상사 및 지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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