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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가의 손님 초대 요리는
미슐랭 부럽지 않은 귀한 맛이다


조선 최고(最古) 조리서 수운잡방을 소재로 브랜드웹툰 제작하기


몇 년 전부터 새로운 홍보 방법으로 ‘브랜드웹툰’이라는 게 등장했다. 일반 웹툰과 형식은 같지만, 브랜드웹툰의 경우 발주처가 있으니 목적이 분명하다. 특히 MZ세대와의 접점이 높다는 게 PPL과는 또 다른 장점이다. 브랜드를 홍보하고 그들을 목적하는 지점까지 데려다 놓는 게 일이라, 웹툰의 제작 과정은 흡사 항구를 떠난 유람선이라고 할까. 스토리작가, 그림작가, 제작사가 항로를 선정하고 파도의 흐름을 잘 타야 빠르게 섬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섬이야말로 웹툰 제작진들에게는 이상향이다. 더 많은 독자가 그 안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 같다. 이런 마음을 담아 경북콘텐츠진흥원 주관하에 브랜드웹툰 《안동 선비의 레시피》가 완성되었고, 2022년 11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었다. 2021년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을 모티프로 한 웹툰이다.


〈『수운잡방』〉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수운잡방』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한문 필사본 조리서로 ‘격조 있는 음식문화를 적는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뜻이다. 행서로 쓴 상편 86종은 500여 년 전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 초서로 쓴 하편 35종은 그의 손자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각각 집필하였으며 모두 121종에 달하는 술과 음식 만드는 비법이 담겨 있다. 생전에는 서로 만날 수 없었던 할배와 손자가 요리 경연대회를 통해 2022년의 안동에서 만나게 된다는 타임슬립 설정이었다.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한 《안동 선비의 레시피》〉 (출처: 카카오페이지)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더보기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카카오페이지에서 당시 조회 수 75만 가까이 기록한 후 브랜드웹툰 최초로 시즌2로 제작돼 2024년 2월 연재되었다. 시즌2는 카카오페이지 브랜드웹툰 역사상 이례적으로 조회 수 130만에 근접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고 시즌1을 역주행시켜 5월 20일 기준 각각 79.7만, 133만을 기록 중이다. 국내 메이저 웹툰 플랫폼에 안착한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누구든지 언제나 볼 수 있어 진입 장벽도 없으며 연재 기간도 무한이다.


〈수운잡방 체험관에서 재현한 수운상차림〉 (출처: (사) 수운잡방연구원)


『수운잡방』 사본을 처음 접한 건 안동시 와룡면에 위치한 ‘수운잡방 체험관’에서였다. 각기 다른 서체로 된 누렇게 바랜 책에서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500년 전 선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빼곡한 한자에 담긴 정성과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싶었다. 후손인 안동 광산 김씨 예안파 설월당 종가의 종부이자 수운잡방 체험관장인 김도은 관장은 “힘들 때 할배들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겨난다.”라고 했다. 한겨울 설월당 종택 마당에 서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그녀는 시즌2 최종화에서 수운잡방 요리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분한다.


〈탁청정의 전경〉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에서 주인공이 500년 후 대한민국으로 타임슬립하는 무대였던 탁청정을 군자마을에서 볼 수 있었다. ‘한석봉’으로 알려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현판을 썼다는 탁청정에 앉아 시선을 두니 설렘과 걱정이 교차했다. 군자마을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로 원형을 보존해 이전한 것이다.




할배와 손자가 웹툰 속에서 상봉, 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낙동강을 지척에 둔 아름다운 외내 마을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김유와 김령. 1555년 김유 사후 22년 만인 1577년에야 김령이 태어났기에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수운잡방』을 웹툰으로 재구성하면서 가장 주목했던 지점이라면 시대를 초월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를 얼마나 흥미롭고 격조 있게 표현할 것인지였다. 김유가 남긴 조리서 낱장들을 정리하여 자신의 것과 함께 책으로 엮었던 김령으로서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무척 궁금했을 터. 아버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에게 듣는 것만으로는 성품이나 얼굴 생김새를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동 양반가의 음식을 주제로 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브로맨스, 쉽지 않은 주제였다.


〈안동 광산 김씨 예안파 문중에서 보관해 온 선조들의 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하지만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것은 웹툰이 아닌가? 웹툰의 인기 코드인 타임슬립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 주요 장치로 월식을 활용한 건 주인공 김유(김이담 역)의 외조부가 세종 26년(1444)에 만든 한국사 최초의 역법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저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였다는 점을 참고했다.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벗들과 어우러져 유유자적하며 사는 게 좋았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베풀고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하며 살아가던 김이담은 월식의 밤 뒷마당에서 담을 넘어온 자객과 마주치고 절체절명의 순간 500년 후의 대한민국 안동으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그리고 낡아빠진 고택 감성의 '할매 찜닭' 식자재 창고에서 주인 할매의 손녀 한다경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것이 바로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 첫 화의 엔딩 장면이다.

거꾸로 시즌2에서는 여주인공이 김이담을 찾아 조선으로 타임슬립한다. 함께 출전한 ‘수운잡방 요리 경연대회’에서 최종 우승해 할머니의 낡아빠진 고택을 멋진 한옥스테이로 변신시키고 어엿한 사장으로 행복을 누리며 살던 그녀. 벚꽃이 날리고 낙엽이 져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건 훤칠하게 잘생긴, 진한 추억 남기고 떠난 조선 남자 김이담 때문이었다. 챗GPT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조선으로 타임슬립하긴 했으나 김이담이 아닌 손자 김령이 사는 세상! 부패한 고을 수령과 탐욕스러운 상단 객주 박수영의 농간으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풀려나려면 비위가 약한 수령에게 맛있는 요리를 갖다 바쳐야 하고, 이를 위해 두 사람이 협력하면서 가문의 갖가지 음식과 술이 세상에 나온다. 한편 김령은 『수운잡방』을 집필하던 어느 날 밤 잠결에 할아버지 김유와 상봉하게 된다.




조선시대 안동 양반가의 접객 음식과 술은 상당히 맛있다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 2를 통틀어 웹툰에 실린 『수운잡방』의 요리들은 화면으로 구현되었을 때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들을 우선하여 선별했다. 이때 가문의 종부인 김도은 수운잡방 체험관장이 만든 요리와 설명을 참고했다. 요리의 비주얼과 재료, 맛이 중요했던 이유는 주인공들과 반대 세력 간의 추후 이야기 전개, 웹툰을 볼 독자들의 반응이 터질 시기 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선시대 양반가의 소박하고 품위 있는 접객 음식들이 500년 후 웹툰을 통해 대중에 선보이는 역사적인 첫 만남이니만큼 그림작가들이 많은 공을 들였다. 삼색어알탕, 분탕, 전계아, 서여탕, 향과저, 황탕 등의 그림을 보고 먹어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왼쪽부터 삼색어알탕, 향과저, 분탕〉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이쯤에서 다들 500년 전 음식의 맛이 궁금할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양반의 식탁엔 어떤 음식이 오를까, 그 시대의 술은 어떤 맛일까 등.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타락〉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우선 『수운잡방』에는 요거트와 비슷한 ‘타락’이라는 게 있다. 요즘처럼 달콤한 맛은 아니어도 순하디순하고 달달한 스무디 느낌의 맛이 난다. 소젖을 체로 걸러 죽을 끓인 다음 항아리에 담고 본래의 타락, 없으면 탁주를 한 종지 넣어 따뜻한 곳에 두었다니 만드는 방식은 지금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세종대왕도 드셨다는 이 타락은 식전에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 신박한 가지 요리도 있다. ‘모점이’라 하여 가지를 4쪽으로 쪼개 참기름을 둘러 지져낸 다음 간장, 초, 마늘즙 섞은 것에 담가 열흘 이상 숙성시킨 요리다. 수운잡방 체험관에서는 구운 소고기 위에 올려 나오는데, 양질의 한우보다 가지가 훨씬 맛있을 정도였다.


〈왼쪽 전계아, 오른쪽 황탕〉 (출처: 카카오페이지 《안동 선비의 레시피》)


안동찜닭의 원조격인 ‘전계아’라는 요리도 있었다. 영계에 참기름을 두르고 볶아서 청주, 식초, 물, 간장을 넣고 졸인 후 다진 파, 후추, 형개, 천초가루 등을 친 요리. 요즘처럼 당면과 고춧가루는 안 들어 있지만 영계 특유의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과 담백함이 좋았다. 또, 노란 치자 물을 들인 ‘황탕’ 위에 고기완자 대신 신선한 한우육회를 올려 비벼 먹는 맛이 별미였다.


〈멥쌀로 빚은 삼해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수운잡방』 상·하권 통틀어 술 빚는 법이 60여 가지로 절반쯤 차지한다. 상권 서두에 나오는 ‘삼해주’는 꼭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그 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정월의 첫 해일(亥日)부터 세 번에 걸쳐 빚는 찹쌀 발효주로, 두 번 덧술하여 빚은 술의 향이 그윽하고 깊어 어쩐지 위로받는 기분이랄까. 이 술은 고려 때부터 제조한 우리나라의 전통 약주란다. 참보리로 만든 ‘진맥소주’는 40도쯤의 독주인데, 입안에 머무를 땐 독하고 향기롭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면 이내 편안해지는 희한한 술이다. 가문에서 약으로 썼을 만큼 사람을 살리는 술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500년 전 안동 양반가의 요리는 굉장히 ‘맛있다!’ 식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렸으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고 감칠맛이 뛰어나다. 당시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맛있었을지 모르겠다. 깨끗한 공기와 우물물, 맑은 햇살이 담근 장류, 청정지역에서 키운 한우, 유기농 채소와 과일 등을 식재료로 썼을 테니 말이다. 김도은 종부는 지금도 『수운잡방』에 적힌 그대로 요리를 한다고 했다. 조리도구나 열원, 화력, 식기, 페어링,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는 건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양반가의 선비들이 쓰긴 했지만 당시 사대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건 금기시하였기에 『수운잡방』 속 요리들은 대부분 남자 하인들 몫이었다. 분량상 삭제되었는데, 주인공이 저잣거리에 가는 장면에서도 ‘유사’라 불리는 집사와 동행한다. 조선시대 양반가, 특히 종가에서 장 보는 일을 도맡아 했던 집안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악덕 객주 박수영의 서찰로 대신


〈조선시대 사용한 안경집과 안경〉 (출처: 경기도 박물관)


웹툰에서 재미를 유발하는 소재로 쓰인 건 ‘이곳에는 있지만 그곳에는 없었던’ 것들이었다. 고춧가루가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에 전해져 생전에 먹어본 적 없던 김이담은 타임슬립한 안동에서 매운 찜닭을 먹고 고생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다경이 선물한 배낭 안에 라면·환타·안경·라이터·슬리퍼 등 현대문물이 여럿이었다. 시즌2에서는 여주인공 다경이 당시 면전이라 불리던 미얀마에서 사신 따라왔다가 낙오된 여인으로 나오는데 사또에게 이렇게 말한다. “면전에서는 콜레스테롤이라는 귀한 원기를 얻기 위해 일부러 기름진 쇠고기 부위를 골라 먹습니다.” 멍청한 사또가 콜레스테롤을 알 리가. 후훗. 작가로서 하고 싶었던 말은 나름 매력덩어리였던 상단 객주 박수영의 말로 대신했다. 옥에 갇혀서 후손들에게 남겼던, 다소 코믹한 상황에서의 서찰 내용인즉슨 이렇다.


반성문

후손들은 보아라.
차가운 거적때기를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달리 보이는구나.
비단옷에 매일 진수성찬 하며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명예를 얻지 못하였고,
부당하게 그것을 탐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여태껏 돈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으나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공익을 위한 일에 진심으로 마음을 쏟는다면
명예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임을 내 이제야 깨닫는다.
이 글은 즉, 다시 태어난다면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처절한 반성의 글이니라.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후손들은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

-선조 36년 안동상인 박수영 저-


《안동 선비의 레시피》는 시즌2까지 끝이 났다. 가보를 넘어서 국가 보물로 지정된 『수운잡방』의 명성과 역사적 가치에 누를 끼칠까 늘 경계했었다. 그래서 시즌3를 보고 싶다는 독자들이 많았던 건 큰 위안이다. 만약에 시즌3이 만들어진다면 그땐 『수운잡방』 레시피의 절반을 차지하는 술을 소재로 하면 어떨까? 맛을 보아야 글을 쓴다는 엉성한 핑계를 대며 이 술 저 술 맛보는 즐거움을 상상해 본다. 세상에 없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건 참 설레는 일이다.




집필자 소개

조윤서
조경란
동아일보 출판국 객원기자로 월간 〈음식과 사람〉을 통해 전국의 식당들을 취재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지, 네이버시리즈에 웹소설 및 웹툰 『대표님 길들이기』, 『널 찾느라 400년 : Oh My Prince』등 연재. 2021년부터 브랜드웹툰 스토리 작가를 겸업하며 카카오페이지에 『안동 선비의 레시피』 시즌1·시즌2, 부산 연제구 홍보웹툰 『오방 맛보러 온나』, 역사소설 정기룡 각색 웹툰 『제가 조선의 운명을 바꿔보겠습니다』 등을 연재했다.
“딸의 혼례식-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 받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년 3월 26일~3월 27일

1616년 3월 26일, 잔치를 위해 요리사[숙수(熟手)] 이복(李福)이 김택룡의 집에 와서 이진동과 함께 요리를 했다.

다음 날 27일, 김개일과 김경건이 신랑 집안의 손님들을 맞기 위해 택룡의 집으로 왔다. 잠시 뒤 혼서(婚書)가 도착하였는데, 사위의 이름은 ‘근오(謹吾)’였다. 택룡은 언복(彦福)을 시켜서 사위를 마중하도록 했다. 오후 세 네 시쯤 되자[신시(申時)], 사위가 도착했다. 신랑을 수행하여 함께 온 사람[요객(繞客)]은 참봉 권호신과 그 아우 즉 신랑의 아버지 준신, 그리고 중방(中房) 이지남(李智男)이었다.

곧 합근례를 행하고, 예작(禮酌)을 차려 베풀었다. 택룡의 아들 김숙도 참여하여 행했다. 저녁이 되어 혼례식이 끝나고 신랑 집안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이 날 광주의 성안의가 택룡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택룡이 혼례 때문에 너무 바빠서 답장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을 시켜 사정을 직접 전달하게 하고 더불어 호도와 포육(脯肉)을 보냈다. 혼례에 손님으로 온 생원 홍이성의 처와 그 아들 · 김개일의 처와 그 아들 · 남석경의 처 · 이여의 처가 택룡의 집에 남아 모두 모였다.

“아버지와 봉황의 꿈”

최흥원, 『역중일기』, 1738년 7월 11일

1738년 7월 11일, 흐린 날이었다. 최흥원의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키가 몇 자나 되는 큰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다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최흥원이 사는 칠계 동네 집 앞 감나무 위에 어떤 새가 날아와 앉았다. 머리의 벼슬은 닭과 같았고 꼬리는 긴데 마치 수꿩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최흥원이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최흥원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봉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흥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새는 날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새의 꼬리 쪽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있어서 꼬리를 헤치고 보니, 새끼 세 마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이 이를 보고 신기해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며 수근 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흥원이 다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온데간데없고, 그 와중에 그만 꿈을 깨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3년이 되신 아버지를 꿈에 뵌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꿈에서 봉황이라고 하는 새까지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인가....

최흥원은 머릿속으로 기다려질 만한 경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남붕, 『해주일록』,
1932년 10월 10일~10월 13일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든든한 아들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년 4월 18일 1635년 6월 20일

1635년 4월 18일, 김광계는 기제사를 준비하러 지례(知禮)로 떠났다. 원래는 김광계의 마을에서 지낼 기제사였으나 김광계의 넷째 아우 김광악(金光岳)의 부인 권씨가 4월 11일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마을이 불안하여 지례로 제사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례로 가는 길에 아들 김렴이 따라왔다.

4월 25일에는 아들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김광계 홀로 운암사(雲巖寺)에 갔는데, 곧 염이 따라와 김광계와 함께 머무르며 『상서』를 강독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운암사에 있다가, 4월 30일에는 함께 배를 타고 침락서재로 갔다. 5월 2일에도 역시 아들 염을 데리고 광산 김씨의 묘소들이 있는 거인(居仁)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5월 20일, 6월 20일에도 염은 자신의 사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러 와서 며칠간 머무르다 갔다.

그 뒤에도 끊임없이 제사와 성묘가 있었기 때문에 염은 자주 김광계를 만나러 와야 했으며, 김광계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길 때 염을 데리고 다니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염은 서서히 김광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로 성장해 나갔다.

“들판에는 목화 집안에는 돼지”

노상추, 『노상추일기』,
1802년 8월 15일~26일

그리 점잖은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으나 집안 살림 경영은 힘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노상추의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았고 가끔은 곤궁하다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노상추가 서울에 올라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을 돌본 것은 조카들과 아들이었다. 이들이 해 놓은 집안일이 노상추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다. 그래서 노상추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집안 살림을 효율적으로 경영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농사란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쓴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흉작을 면키 어려웠다. 올해도 목화가 흉작이었다. 처음 시장가격은 30근에 1백 동이었다. 모름지기 흉작이라면 그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건만 올해 목화는 너무나도 헐값이었다. 듣자 하니 수령이 농민들에게 성전(城錢)을 빌려주고 3할의 이자를 거두기로 하였는데, 시장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이자를 마구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농민들이 이자를 내기 위해 목화를 마구 팔아야 해서 목화 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덕분에 노상추의 목화 값도 똥값이 되었다.

노상추는 목화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먼저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도토리와 잣을 수확해 보기로 했다. 조카 기엽을 수월산에 보내서 상수리를 심어놓은 것을 살펴보게 했고, 또 집 뒤 언덕에 심어놓은 잣나무도 살펴보았다. 상수리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수확할 것이 없었으나 잣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18송이를 딸 수 있었다. 이 잣나무는 무술년(1778) 봄에 대곡사 인근 잣나무 숲에서 딴 잣을 심어놓은 것이었다. 벌써 25년이 흘렀는데, 크게 자란 잣나무가 17그루이다. 노상추는 수확한 잣을 사당에 올렸다.

또 돼지도 한 번 쳐 보기로 했다.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팔면 어떨까 싶어서 돼지우리도 지었는데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최흥원, 『역중일기』,
1763년 12월 28일

1763년 12월 28일. 계미년도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흐린 날씨에 간간이 눈발이 뿌리는 날이었고, 어머니 병환도 어제와 같은 정도였다.

최근 딸아이가 부쩍 몸이 쇠하여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무언가 기운이 날 만한 보양 음식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한탄스러웠다. 얼마 전 아들을 잃고 난 최흥원은 남은 딸들마저 허약한 몸으로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부쩍 늘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어 딸아이의 몸보신 거리를 좀 사 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장에 보낸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요즘 시장에 어물 귀하기가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청어도 1냥이나 하고, 생대구도 1냥 정도는 줘야 구할 수 있습니다. 어물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꿩 한 마리도 7전이나 나가니, 도저히 그 가격으론 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최흥원이 들어보니 정말로 그 정도의 가격이라면 쉬이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을 보며 최흥원은 고민에 빠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보양이 될만한 생선이나 꿩을 좀 사다가 딸아이에게 먹여야 하는지... 한편으론 아프신 어머니 반찬거리를 대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한 처사인가 싶어 최흥원은 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힘든 하인을 격려하고 동네의 작은 잔치를 열며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6년 3월 9일~1859년 6월 21일

1846년 3월 9일, 서찬규는 회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닷새 안에 가야 해서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니 신석룡은 뒤따라 갈 수가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천천히 오라고 하고, 덕우와 함께 갔다. 연일 길을 재촉했더니 노복들은 힘들다고 하고 창졸들도 발이 부르텄다고 했다. 서찬규는 밤에 개를 삶도록 하고 술을 사서 하인배들을 배불리 먹였다.

1849년 3월 4일에는 남산의 족형 재씨·자형 평선씨 등 모두 10여 이 술을 가지고 수레를 타고 공부하고 있는 서찬규를 찾아 암자로 왔다. 그들은 함께 예계동으로 들어가 화고를 삶고, 오후 늦게 암자로 돌아와 함께 묵었다.

서찬규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1850년 4월 29일에 산격의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이종 원규[자는 선장(善長)]씨 집으로 갔다. 그가 먼 길에서 돌아왔다고 개고기를 삶고 술을 마련해 주었다.

1859년 5월 5일, 서찬규는 여러 친구들과 뱃놀이하며 개를 삶아 먹고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50~60인이 되었다.

6월 21일에는 서찬규의 부친이 연신제의 말애 폭포로 목욕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동네 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 오후에는 구암서원에 가서 개를 삶고 술을 마시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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